소년의 동경 – 『바벨2세』
김낙호(만화연구가)
활극형 서사문화에서 종종 사용되는 몇 가지 원형적 요소들이 있다. 초월적으로 강력한 주인공, 그 힘을 더욱 배가시켜주는 동료, 물리쳐야할 대상인 강력한 적. 이 공식을 성장하는 소년들을 대상으로, 이입이 가능하도록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우선 힘을 놓고 보자면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주어지는 초월적인 힘’이 되어주는 것이 좋다. 실제로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고 근육이 붙는 (혹은 옆의 친구들이 그렇게 변모해나가는 것을 목격하는) 시기, 엇비슷하던 또래 동료들이 서로 다양한 개성으로 분화해나가는 시절, 본격적인 사회적 경쟁에 눈을 뜨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엇비슷하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엇비슷한 사람들 중에, 혹시나 내가 급격한 성장, 거의 변신에 가까운 성장으로 초월적인 힘을 얻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동경을 충족시켜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날 일어나보니 근육질 헤라클레스가 되어있다기보다는, 몸은 여전히 감정이입 가능한 소년이되 뭔가 엄청난 초자연적인 힘 – 거대로봇을 움직인다거나 초능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 좋다. 힘을 배가시켜주는 동료는 어떨까. 충직한 ‘부하 겸 친구’들이 적격이다. 누구를 제대로 부릴 정도로 성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 말을 항상 따라주고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부하/친구가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왕이면 이들 역시 각각 어떤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면 더욱 좋다. 강력한 패거리의 탄생이다. 라이벌은 어떨까. ‘나’와 비슷한 능력을 가졌지만, 빈번히 나에게 지는 라이벌이어야 한다. 너무 약하면 내 초월적 힘의 진가를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곤란하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강해서 내가 져버리면 그것 또한 난감하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 라이벌이 마음이 악하다든지, 세계정복을 노린다든지 해야 그를 물리치는 입장에서 찝찝하지 않다. 자, 공식을 완성해보자.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얻게 된 소년이, 신기한 힘을 가진 동료(부하)들과 함께 세계정복을 꽤하는 악의 초능력자와 싸운다. 당연하게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설정이다.
최근, 한국에 해적판으로 30년도 훨씬 넘게 계속해서 소개된 바 있는 고전 소년만화 『바벨2세』(요코야마 미츠테루 / AK커뮤니케이션스 / 전8권)가 마침내 정식 라이센스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 만화가 바로 앞서 이야기한 ‘성장하는 소년의 초능력 동경 공식’의 가장 순수한 정수를 담고 있는, 원형 그 자체다. 지금 3-40대 성인들에게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소년생활의 추억 그 자체고, 이후에도 『바벨2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수많은 장르 작품들을 읽으며 그 다음 또 다음 세대의 소년들이 성장했다. 작품 자체의 의미나 재미와 관계없이, 그 추억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은 한국에서 이미 범접하기 힘든 지위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만화의 신”으로 추앙받는 데즈카 오사무라든지 이시노모리 쇼타로 등 동시대의 여러 명작가들이 유사한 장르에서 경쟁작들을 선보이던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 『바벨2세』가 소개되었을 당시 이 작품의 입지는 워낙 독보적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이 행사한 영향력은 막강했다. 초능력 소년에 대한 장르법칙 자체를 세우다시피한 것에 비하면, 모 유명작가가 당시 발표한 무허가 속편『바벨3세』사건은 작은 애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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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줄거리는 꽤 간단하다. 평범한 중학생 소년 주인공이 사실은 자신이 지구에 불시착한 고도의 문명을 지닌 우주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결과 선조들이 지어놓은 요새 바벨탑의 주인이 되어 초능력을 깨우쳐서 세계정복을 노리는 초능력자 악당 요미를 물리친다는 것이다. 그를 보좌하는 세 로봇 충복은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표범 로뎀, 거대한 새 로프로스, 물속을 누비는 거한 포세이돈 등이다. 원숭이, 개, 새와 함께 도깨비를 물리치는 일본의 모모타로 전설의 모티브마저 느껴지는 이 구도는, 긴장감 있게 진행되는 이야기솜씨와 결합하여 소년의 동경을 완벽하게 빨아들이는 한 시대와 한 장르의 대표작을 탄생시켰다.
사실『바벨2세』는 이 장르의 원형이자 대표작이며 무엇보다 뛰어난 모험 활극이지만, 그 이상으로 고전 걸작으로 추앙받을 만한 깊이는 다소 부족한 편이다. 만화 『마징가Z』가 선악의 모호함을 이야기하고 (TV의 애니메이션과는 크게 다르다) 『아톰』이 인간됨과 힘의 의미에 관하여 성찰하며, 『사이보그009』가 인간의 복합적 마음에 대해서 돋보기를 들이밀 때, 『바벨2세』는 오로지 세련된 오락성의 극한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집중한 결과 의외의 부분에서 큰 성과를 이루었는데, 바로 조연 캐릭터들의 숨겨진 매력이다. 우선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세계정복을 노리는 악역 ‘요미’의 매력이다. 요미는 선악이 모호하거나 구분 자체를 초월한 절대자가 아니라 분명한 악당이다. 하지만 너무나 인간적으로 그려진다. 요미는 부하를 아끼며, 인정을 발휘하는 어른스러운, 지도자스러운 중년 남자다. 소년의 감정이입을 의도한 절대적 선의 피눈물 없는 집행자인 주인공과는 달리, 정작 악역인 요미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실수를 한다. 나아가 나중에는 세계정복 자체보다도, 주인공에게 이기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을 일삼는 그를 보며, 통쾌함이 아닌 어떤 다른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번 정식 출간을 통해서 소년시절 읽었던 느낌과는 다른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악역인 요미의 인간적인 매력, 현실적인 느낌을 발견하고 놀라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충직하게 주인공을 보좌하는 세 로봇들은 또 어떤가. 그 헌신의 모습이 오히려 주인공의 어떤 통쾌한 초능력 충격파보다도 더 감동적으로 와 닿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벨2세』는 독자층인 성장하는 소년들의 동경의 원형을 정확히 잡아내고 세련된 오락성을 추구하는 작품이다. 비록 그림이나 연출은 지금 보자면 구식이 되었을지언정, 그 자세는 너무나 정직해서 지금 봐도 여전히 작품에 빨려 들어간다. 소년시절 추억의 작품으로 머물기에는 아까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장르만화의 모범이자 하나의 원형이다. 독자들이 단지 소년시절의 추억을 되새김질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당시에 발견해서 즐겼던 멋지게 재미있는 장르만화를 다시 한 번 발견해서 재미있게 감상하겠다는 마음으로 이번에 출간된 8권 박스세트를 구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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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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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2세 세트 – 전8권 요코야마 미쓰테루 지음/에이케이(A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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