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의 적이라는 역사적 교훈 – 『왓치맨』[전자신문 100623]

!@#… 지방선거 직후에 쓴 원고인데, 여차저차 밀려서 좀 늦게 나왔다. 전자신문 게재본은 여기.

 

공동의 적이라는 역사적 교훈 – 『왓치맨』

김낙호(만화연구가)

태고적부터 인류 역사 속에서 매우 반복적으로 나타난 패턴이자 매력적인 가치로 각인되어 있는 내러티브 가운데 하나는 바로 강대한 적을 물리치기 위해 나머지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이다. 서로의 이견은 유보해두고, 우선 힘을 합쳐서 모두를 집어삼킬 강한 적을 물리치자. 맘모스를 사냥하던 원시인들도, 페르시아에 맞선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세계대전의 연합군도, 한국 현대사 속 수차례 반복된 반독재 시위대도, 보다 안정적인 상황에서는 정당간 정치연합도 그렇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많은 경우 이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방식의 문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되어준다.

하지만 뭉치기 위해 이견을 유보하는 것을 남용하고자 하는 유혹 또한 넘친다. 이견을 서로 조율하고 합의해서 모두에게 최적의 상태를 만들어내는 복잡한 방식을 거치기보다는, 그런 과정을 생략했는데도 사람들이 대충 따라오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강대한 공통의 적에게 승리해야한다는 당위를 극대화하면 된다. 경제 불평등이 주는 사회적 분열을 해결하지 않고도 불만을 잠재우려면, 국제경쟁에서 한국이 진다는 위기감이 최고고 덤으로 파이론을 동원하면 끝이다. 최소한 70년대부터 현재까지 계속 통용되고 있다. 혹은 여러 정치적 비전을 가진 정당들이 정책연대와 후보 배분 같은 섬세한 정치적 거래에 실패했는데도 연합의 정당성을 유지하려면, 이탈자는 적을 물리친다는 대의를 배신한 이적행위자로 몰아가면 된다. 게다가 자신들이 하는 것이 작은 스케일의 파시즘이 아니라 큰 정의의 구현이라는 자기만족감까지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어떤 공동의 큰 적이 실제로 존재할 때가 적지 않지만,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하나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이라크”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고 실제 이라크를 폭격하여 미국 국내갈등을 봉합해둔 부시 대통령 시절 미국 정부를 상기해보라. “공동의 강대한 적”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효과 만발의 꼼수다.

미소 냉전이 더욱 심해진 가상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걸작 슈퍼히어로 만화 『왓치맨』은 이런 역사적 패턴을 극단까지 몰고 가는 설정의 작품이다. 냉전의 논리 자체가 강대한 적을 두고 서로 자기 진영 내부의 갈등을 덮어버리는 것인데, 문제는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사회 전반이 속으로 곪아 들어간다. 종말론적 불안심리, 크고 작은 폭력, 갈등을 원활하게 해결할 능력이 안 되는 사회 시스템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모습 속에 인류가 멸망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스스로를 인간 이상으로 생각하면서 인간을 굽어 살피고자 하는 박애정신 넘치는 정의의 슈퍼히어로가 공동의 적이라는 역사적 교훈에 착안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수수께끼의 적을 가공하여 수백만명을 단번에 죽인 결과 나머지 인류가 하나가 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파시즘이 기다리고 있다.

이왕 역사적 교훈을 따지려면, 끝가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공동의 적을 내세워 갈등을 덮어버린 사회는 승리하든 거짓이 드러나든 공동의 적이 없어지는 그 순간, 그간 미루어두었던 모든 갈등이 폭발해왔다. 그 사회의 멸망을 피하는 방법은 더 강력한 공동의 적을 빨리 생각해내서 또 갈등을 덮거나, 힘들더라도 갈등을 직면하고 조율하는 방식들을 개선시켜 나가거나 두 가지 중 하나다.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지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어느 쪽이 덜 미친 짓인지는 비교적 명확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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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전자신문의 ‘만화로 보는 세상’ 연재칼럼. 필자들이 돌아가면서 ‘만화의 사회참여’, ‘만화 속 역사’, ‘만화와 여성’, ‘웹툰트렌드’ 등의 소재를 다룬다. 제일 무겁고 재미없어지기 쉬운 파트인 ‘역사’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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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oughts on “공동의 적이라는 역사적 교훈 – 『왓치맨』[전자신문 10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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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ingback by Nakho Kim

    [캡콜닷넷업뎃] 공동의 적이라는 역사적 교훈 – 『왓치맨』 http://capcold.net/blog/6102 | 전자신문 칼럼. 내용이(늘 그렇듯) 민감해서 짤렸나 싶었는데 순서만 연기된거였다는;;

  2. Pingback by Art Son

    RT @capcold [캡콜닷넷업뎃] 공동의 적이라는 역사적 교훈 – 『왓치맨』 http://capcold.net/blog/6102 | 전자신문 칼럼. :왓치맨을 보고 찝찝했다면 ….

Comments


  1. !@#… ceptin님/ 안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대체로 안그러려고 지금껏 고생길 걸어온 것이 아깝기도 하고.

  2. 진보신당이 광장안에 들어가서 실력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안티를 넘어서 무엇을 지향하는지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편적 복지. 사람 앞에 사람 없고 사람뒤에 사람없는 세상을 꾸리려는 모습 말입니다.
    진보신당 자체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 대중과 생긴 이 거리감을 걷어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해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정치적이거나 이론적인 구호보다 좀 더 생활에 밀접한 조금은 현실적인 언어를
    현 정치에 활용해서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20대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없는 것은 아무래도 현 정당정치 세력이 과거 사고에 머물러
    있어서 아닌가 싶거든요.
    좀 더 희망적이고, 그들이 타석에 들어서게 만들 탁월한 언어. 정치판에서 보고싶달까요.
    즉 그 역활을 진보신당이 해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요.

    아. 정말 진보신당 잘 됐으면 합니다. 제발. 아자.

  3. !@#… 망구스님/ 분명하게 드러내려고 늘 노력하고 있지만, 그걸 히트시키지 못하고 있죠. 낮은 인지도나 기득권세력의 견제(서울시장 TV토론을 최선을 다해 봉쇄한 오세훈 현 시장이라든지, 무조건 양당구도로만 다루는 대다수 언론이라든지) 같은 핸디캡이 분명히 있지만, 1)당으로서 2)선거이외의 기간에도 적극적으로 3)실제 자신들의 활동내역을 제대로 부각해서 대중에게 접근하는 요령이 턱없이 모자라죠. 우직한건 알았으니, 명민해질 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