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그렇듯, 게재본은 여기로.
[만화로 보는 세상] 타협과 회피의 의의 – ‘오! 한강’
김낙호(만화연구가)
우리는 흔히 역사를 드라마틱한 줄거리로 기억한다. 줄거리가 아니면 굳이 기억에 남겨놓기 힘들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백 수천 년의 인류사가 궁중암투와 격렬한 전쟁, 국가 단위의 통일과 분열, 커다란 정쟁과 세계의 격변 같은 것들로 고밀도 압축된다.
하지만 하루하루 새로운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실을 둘러보면, 그 대부분은 결코 그런 장렬한 승리와 패배의 역사가 아니다. 마찰이 없다거나 세상 속 권력의 큰 흐름들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부분의 경험이 장엄한 결단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보다는 타협과 회피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주어진 현실에 타협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마찰과 갈등의 순간에 상대를 거꾸러트리거나 혹은 그러려고 하다가 장렬히 바위에 내쳐진 계란이 되어 몸을 불사르기보다는, 살아갈 길을 마련한다. 자기 주변의 세상을 자신의 마음대로 주무르는 패자가 되는 매우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면, 크고 작은 타협을 이어간다. 회피는 한 발짝 더 나아가, 갈등에 대처하기 위해 타협조차 하기에 복잡할 경우 아예 문제 자체를 외면해버리는 조치다. 이 또한 모든 사안에 에너지를 할애할 수 없는 우리들의 한정된 물리적 역량과 인지능력을 감안할 때 당연한 일이다. 다만 타협이 가급적이면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합의가 되도록 노력하여 단순한 굴종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회피가 지나쳐서 당장 자신들에게 한 다리 건너 곧바로 피해가 올 사회적 사안에 눈을 감다가 큰 코 다치지만 않으면 된다. 유감스럽게도 그 경계선은 대체로 뚜렷하지 않고, 덕분에 항상 역사는 시행착오로 가득하지만.
역사는 상대를 멸절시키는 이들의 화려한 이야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뒤편에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포섭되어가는 과정으로 더욱 가득하다. 아무리 선명하게 기억하고 싶어도 사람들의 선택은 선과 악의 이분법 구도가 아니다. 타협으로 가는 작은 반항, 혹은 작은 비겁함의 연속일 따름이고, 회피당하는 여러 사안들이 누적되어 결국 터지기도, 혹은 계속 묻히기도 하는 과정이다.
이런 정서를 느끼기 좋은 만화가 바로 허영만 · 김세영 콤비의 `오! 한강`이다. 이 작품 속에서는, 주인공 이강토가 해방 전후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나가며 겪는 누가 적이고 친구인지, 수시로 커다란 역사적 인식과 개별적 사례들이 서로 어긋나는 모습들이 계속 이어진다.
화가를 지망하는 강토는 매 순간 정의와 현실 사이에서 타협을 하다가, 결국 극사실주의라는 미술사조로 스스로를 객체화하고 회피하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이후 80년대를 살아가며 역시 미술을 하며, 사실화풍과 의지 사이에 조금 더 적극적인 선택을 하고자 한다. 하기야 사실은 작품 자체도 다소의 타협으로 만들어졌다. 반공물을 그려달라는 권력층의 의뢰에 의해 시작했으나, 반공보다 허망함을, 작은 저항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돼버렸으니 말이다.
이렇듯 타협과 회피 속에서 무언가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 교과서용 요약판이 아닌 실제 역사의 흐름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그런 작은 모습들, 비겁하기도 하고 작은 용기이기도 한 그런 것들을 제대로 직면할 때 비로소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속에서도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 그만큼 더 집요하게 지향점과 제도를 이야기하여 역사를 움직여야 한다. 나름대로 안정을 찾은 사회일수록, 특히 민주주의 사회일수록 이런 점을 뚜렷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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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전자신문의 ‘만화로 보는 세상’ 연재칼럼. 필자들이 돌아가면서 ‘만화의 사회참여’, ‘만화 속 역사’, ‘만화와 여성’, ‘웹툰트렌드’ 등의 소재를 다룬다. 제일 무겁고 재미없어지기 쉬운 파트인 ‘역사’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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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back by Nakho Kim
[캡콜닷넷업뎃] 타협과 회피의 의의 – 오! 한강 (전자신문) http://capcold.net/blog/6284 | 타협은 변절이라 믿는 근본주의자들이야 싫어하실 이야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