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의미한 의인화의 사례를 좀 더 해보려다가 그만 둠.
의인화의 매력을 살린 만화들
김낙호(만화연구가)
인간의 지각능력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면모가 있다. 그 거대한 두뇌의 훌륭한 인지 처리력을 가지고, 세상 환경에서 발견하는 오만가지 모습 속에서 최소한의 단서만으로도 사람의 면모를 조합해낸다(대략 점 두 개, 그 밑에 선 하나 그것을 둘러싸는 윤곽선만 있으면 사람 얼굴을 인식한다든지). 그 위에 상상력이라는 또 다른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여, 그것이 사람처럼 생각하고 움직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이런 능력은 한쪽으로는 토테미즘 신앙의 기반이 되기도 하고, 다른 쪽으로는 좀 더 풍부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준다. 그것이 바로 바로 ‘의인화’라는 기법이다. 사람이 아닌 것들이 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오히려 살짝 거리감을 두면서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재미있는 계기를 만들어줄 힘이 있다.
동물이나 물건 등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캐릭터로 재창조해내는 의인화 기법은, 이왕이면 그들이 살아 움직이며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또한 기본적인 외관 또한 해당 동물/물건과 사람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듯 만들어낼 때 더 이입의 폭이 늘어난다. 그러다보니 구체적 묘사가 있고 형상화의 폭이 자유로운 편인 만화 형식과 궁합이 좋다. 이 기회에 몇 가지 효과적인 의인화 만화를 살펴보자.
속성의 표현
의인화의 가장 뚜렷한 강점 가운데 하나는, 외모나 행동의 속성을 한층 강렬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다. 폭력적 과거를 지내고 지금은 나름의 회한을 지닌 중년 아저씨를 그려내기 위해, 공격적인 인상의 주름진 인상을 그려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예 불독을 의인화해서 훨씬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불안 많은 성격의 온순한 주인공을 토끼로 그려낸다든지 말이다.
[선천적 얼간이들](가스파드)의 주인공은 의인화된 거북이다. 굼뜬 것은 아니지만 주변의 활력에 은근히 끌려다니는 구석이 있고, 호기심 많아 보이되 완전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도 않은 초롱초롱한 파충류 눈이 특징이다. 작가 자신을 대입한 거북이 캐릭터의 주변에는 닭, 물고기, 개 등 다양한 의인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각각의 동물화와 묘하게 맞물리는 방식으로 불같은 추진력을 발휘하며, 어떤 엉뚱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가보는, 즉 적절히 그만 두는 법을 모르는 ‘얼간이’ 같은 짓을 해서 나름의 성과와 많은 실패를 하며 독자들에게 큰 웃음을 준다. 아예 비유된 동물 같은 짓, 예를 들어 닭으로 비유되었다고 하여 새벽마다 닭울음을 짓는다든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별명처럼 살짝 어울리는 성격으로 움직인다.
지난 십여년간 의인화된 동물 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 가운데 가장 큰 명성을 누렸던 작품 중 하나는 [위대한 캣츠비](강도하)일 것이다. 포털 연재 웹툰이 붐으로 자리를 잡으려 했던 비교적 초창기에, 뛰어난 그림실력으로 풍부한 표정을 구사하며 성인 취향의(에로틱하다는 것이 아니라, 진득하게 꼬인 연애사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로맨스극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백수 남자 주인공 캣츠비는 줄무늬 고양이, 그의 친구 하운두는 둥글둥글한 개, 캣츠비의 옛 여자친구였으나 다른 남자에게 간 페르수는 분홍 고양이, 새로 등장한 여인 선은 노랑 고양이 등이다. 비록 고양이와 개의 습성을 캐릭터에 노골적으로 집어넣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각 인물들의 성격 유형이 인상으로 드러나는 바를 최대한 강렬하게 표현해내는 방식으로서 동물 얼굴이 적절한 효과를 발휘한다. 도도하며 차가운 분홍 고양이, 막 굴러다니는 줄무늬 고양이, 선하고 충직한 인상의 둥글둥글한 개 같은 식으로 말이다. 또한 인간의 얼굴이 아닌 의인화된 동물들이기에, 불륜드라마 같은 내용 요소들을 질펀하고 무겁기보다는 좀 더 담백하게 전달하는 효과도 있다.
의인화된 동물이 꼭 비유적인 것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진진돌이 에볼루션](김기정, 윤종문)은 인간의 말을 하고 이족보행을 하는 특수능력을 얻어낸 동물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군사훈련을 통해, 동물로서의 특기와 인간들의 전투방법을 겸비한 최고의 특수부대원들이다. 주인공인 진진돌이는 진돗개로, 곰, 너구리, 쥐, 물개 등의 부하들을 데리고 특수 임무에 나선다. 당연하게도 진진돌이는 진돗개 특유의 뛰어난 후각, 용맹함, 전우에 대한 충성 등이 기본 특기다. 적군 역시 ‘비인간 전투원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특수한 동물들로, 시리즈의 진행에 따라서 조류, 어류 등 다양한 종족들이 등장한다. 물론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의인화된 동물들이라는 주인공에 이입하며 보다보면, 인간들의 벌이는 어리석고 자기 파괴적인 행위들에 대한 성찰적 시각들이 적잖이 펼쳐진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전쟁액션 특공대물이지만 말이다.
역할의 비유
개별 캐릭터들의 특성 표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경우가 바로 의인화된 동물이나 사물들을 통해서 역할을 비유하는 것이다. 동물의 종류에 따라서, 혹은 같은 동물 안에서도 세부 종을 나누어 인간사회에서도 흔한 구별짓기와 차별, 협력과 반목을 표현해낸다.
[개판](박현욱)의 주인공 바울은 의인화된 잡종 투견이다. 근근히 싸움판을 전전하는 그에게, 정의를 추구한다는 비밀조직 아마란스가 스카웃을 제안한다. 그리고 조직의 활동, 조직 안에서의 적지 않게 부패한 세력들 간의 권력 구도 등에 휘말리며 그저 탁월한 싸움 실력으로 조금씩 난관을 해쳐나간다. 개에 관한 잡종이니 순종이니, 싸움개이니 지능형이니 하는 여러 구분들이 작품 속 캐릭터들의 얼굴에 그대로 반영된다. 개로, 염소나 기타 동물들로 비유된 캐릭터들은 동물 속성에 따른 역할이 부여되어 업신여기고, 존중하고, 서로 충돌한다. 눈으로 확연히 보이는 종으로 갈라진 갈등 요소들을 십분 활용하여, 멋진 액션씬으로 가득한 잘 만든 느와르 액션 활극이 완성된다.
동물의 비유로 역할을 부여하는 만화라면, 아무리 이미 많이 소개된 작품이라고 해도 걸작 르포물 [쥐](아트 스피글먼)를 빼놓고 넘어가기 곤란하다. 2차대전 유태인 수용소 생존자인 아버지의 이야기를 취재하여 만화로 만드는 작가의 자전적인 작품으로, 여기에서 유태인은 모두 쥐의 얼굴을 하고 있고 독일인은 고양이다. 쥐와 고양이로서 포식관계에 가까웠던 당시의 모습들을 나타내며, 실제 2차대전 중 독일 나치 정권이 유태인을 더러운 쥐에 비유하는 선전을 즐겨 구사했다는 것에 대한 반영이기도 하다. 폴란드인은 독일 제국주의의 또 다른 피해자이면서도 상황을 방관하는(그러면서도 이기적인 선택은 서슴치 않는) 돼지, 독일을 패배시킨 미국은 고양이의 천적인 개로 그려진 것 역시 절묘하다.
물론 의인화 역시 여느 표현방식과 마찬가지로, 과유불급이다. 즉 그런 동물이나 사물에 비유했기 때문에 비로소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불필요하거나 방해되는 장식에 불과하다. 전형적인 기업극화를 만들며 딱히 동물을 통한 역할 배분의 비유를 하지 않는데도 굳이 주인공이 호랑이고 조연이 용과 고양이일 이유는 딱히 없으며, 오히려 이야기가 다루는 진지함에 방해만 될 뿐이라든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인화 자체가 작품의 생명인 경우가 있다. 거의 서로 연결되지 않는 짧은 완결형 에피소드 유머로 구성된 [넌피플](고리타)의 주인공들은 오늘날의 잡동사니들이 의인화된 버전이다. 재떨이, 담배, 자판기 커피, 도너츠 그런 것들이 인간사의 어떤 장면들을 절묘하게 연출해내는, 사물개그물이다. 사물의 특성을 활용한 직선적인 개그도 많지만, 속 깊은 비유와 처절한 풍자가 넘칠 때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꽤 유명세를 얻은 한 에피소드는 전구 주인공이 입산하여 불교적 구도의 길을 걷는 이야기다. 그런데 빛을 스스로 내는 것과 반사하는 것의 차이를 통하여, 자신의 오만과 아집을 깨닫는 과정 자체를 절묘하게 압축해낸다. 이런 류의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의인화이기에 비로소 이 정도까지 깔끔하게 가능해진다. 이 정도 선까지 도달할 때, 의인화는 비로소 확실하게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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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학교도서관저널. 특정 컨셉 아래 청소년들에게 추천하는 책들을 묶는 내용으로, 만화를 진득하게 즐기는 것의 즐거움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배합해보자는 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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