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면서 말하기: 만화로부터 배우기 [계간 새야 04봄]

[계간 <디자인 교육 새야> 2004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전에 인하대 온라인 강좌에서 써먹은 강좌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보여주면서 말하기의 장점을 설명하는 글인 주제에, 그림 올리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여기는 그냥 글만 올립니다. -_-; ]

 

보여주면서 말하기: 만화로부터 배우기

김낙호 (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학생들이 필자에게 “멀티미디어란 무엇인가요?”라고 문의해오면 항상 들어주는 사례가 있는데, 바로 <가족오락관>의 ‘스피드 퀴즈’다. 이런 장면을 기억해보자: 한 출연자가 어떤 단어를 열심히 말로 설명해서, 다른 팀원 한명이 해답을 맞출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다가 다른 색깔의 카드에 쓰여진 단어가 나오면, 말을 그만두고 몸짓만으로 여러 흉내를 내며 같은 목표를 향해서 매진한다. 두 가지 시도 모두 보통 상당히 어색하면서도 처절하기 마련인지라, 시청자와 관람객의 폭소를 유발하곤 한다. 왜 그럴까? 평소에는 우리가 그만큼 말하기와 보여주기를 동시에 자연스럽게 구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상의 방식을 동시에 결합해서 표현하는 행위, 즉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멀티미디어인 것이다.

보여주며 말하기를 지면이라는 공간으로 옮긴 것이 바로 그림과 글의 결합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림과 글의 결합은 글이나 그림 각각이 전달하는 바 이상으로 효과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가능하게 해준다. 하지만 얄궂게도 결합 자체에서 나오는 힘이 워낙 강한 덕분에, 단지 특정한 하나의 표현방식을 한없이 자세하게 파고들면서 표현의 정수를 찾아내고자 하는 일부 ‘고급예술’ 진영으로부터 저급한 것으로 핍박을 받기도 했다. 그 핍박받는 대상의 대표주자가 바로 만화인데, 그만큼 만화가 글과 그림의 결합을 통한 새롭고 효과적인 표현의 개발에 있어서 선두 역할을 해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보여주면서 말하기가 단지 보여주기와 말하기를 산술적으로 각각 합친 것 이상의 효과를 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 ‘말하기’에 해당하는 문자언어를 살펴보자. 문자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인데, 지극히 표준화된 일련의 기호들의 조합으로 넓은 범위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문자를 ‘선들의 조합’이 아닌, 하나의 기호화된 문자로서 인식한다는 것 – 즉 독해력(literacy)이라고 부르는 기능은 정보전달의 효율성을 통해서 인류의 문화를 바람직하든 말든 간에 다음 단계로 올려놓았다. 지금 PC를 켜고 메모장을 열어서, 이 글 가운데 한 페이지 분량을 타이핑하고 저장해 보자. 대략 5-6KB 정도의 용량의 파일이 생긴다. 이제, 그 똑같은 내용을 출력해서 그것을 스캐너에 넣고 스캐닝을 하고, JPG 등의 그림 파일로 저장을 해보자.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해상도로 저장하려면 아무리 못해도, 5-60KB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훨씬 큰) 파일이 생긴다. 즉 선들의 조합이 아닌, 하나의 기호로서 인식하게 될 때 정보의 전달은 훨씬 표준화되고 효율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1: 문자로 인식될때 소실된는 다양한 시각 정보] ⓒ맥클라우드

하지만 문자는 나름대로의 단점이 있다. 기호라는 형식으로 표준화시킨다는 것은, 그 만큼 미묘한 차이들이 사라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춘기 소녀의 연정이 담긴 예쁜 글씨의  러브레터도, 원고마감에 즈음하여 긴박하게 악필로 갈겨쓴 글도, 문자라는 차원에서는 내용 이상의 차이가 없다. 다시 말해서 미묘하고 풍부한 시각적 의미가 거세된, 내용만 남는다. 이러한 약점을 커버할 수 있는 것은 예전부터 그림의 영역이었고, 글은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글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부분, 즉 추상의 영역이나 수사학 등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림 역시 글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나 정서의 전달보다는, 시각적 실험에 집중했다. 즉 그림과 글은 자신들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일종의 분업관계로 발전해 나갔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분업은 주로 서양에서 일어났던 것이며, 동양의 경우는 시화라든지, 서예 등 글과 그림의 연결고리가 일정부분 돈독하게 유지되기도 했다). 글과 그림이 각자의 방향만 보고 달려나간 분업체제 하에서는, 두 가지가 점점 서로의 연결고리를 잃어갔다. 소위 고급예술은 각 매체의 가장 미묘한 가능성들이나 미학을 파고 들어가는 것 – 즉, ‘표현’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에 중독된 나머지, 모든 매체의 원래 목적인 효과적인 공유/교류라는 지점을 놓쳐버리는 경향이 생겨났다. 즉 가능성의 실험에 매진하다가 정작 실용성을 잃은 것이다.

이에 비해서 태생적으로 대중성을 기반으로 해왔던 만화라는 장르는, 정반대의 위치를 고수하면서 발달했다. 가장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 기존의 법칙이나 규율을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파괴해나간 것이다. 하나의 그림 안에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회화의 규율을 벗어던지고 여러 그림들을 연속시켜서 읽도록 만들었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림에 글을 삽입하여 활용했다. 미적인 아름다움으로서의 표상들이나 기법들보다는 효과적으로 형상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간략화된 카툰화법을 도입했고, 이러한 요소들을 때로는 한꺼번에, 때로는 하나씩 사용했다.

그림과 글의 접합 방식은, 현대만화에 이르러서 강력한 새로운 이정표들을 몇가지 맞이 했다. 단지 글과 그림이 병렬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문자 기호들이 그림 속으로 적극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양상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의성어/의태어 삽입이다. 의성어/ 의태어 삽입은 만화의 극중(diegetic) 공간의 한복판에 문자로 된 기호들을 넣는 방식으로, 현실공간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구상(具象)과 상징계의 공존을 만들어 낸다. 단적으로, 현실세계에서 자동차가 큰 소리를 내며 브레이크를 밟을 때 하얗고 큰 ‘끼이이익~’하는 글자들이 바퀴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자들이 만화 속에 나올 때 독자는 그것을 시각요소가 아닌, 청각 등 다른 감각에 호소하는 자극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 지금은 많이 익숙해져 있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너무나 놀라운 과정이다. 의성어로 쓰인 문자의 그래픽적인 배치에 따라서 화면상에서 그 소리의 음원과 방향 등을 나타내 줄 수도 있다. 나아가, 글자체, 크기, 크기변화, 필체 변화 등 수많은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오감의 성질을 다양하게 규정지을 수 있다. 극중 공간 속으로 들어간 의성어/의태어는 문자이면서도, 필요에 따라서 그림으로서의 속성을 얼마든지 살려낼 수 있는 독특한 만화 표현 장치인 것이다.

[그림2: 말풍선의 유희적 활용] ⓒ끼노

두 번째는 바로 ‘말풍선’이다. 단순한 그림과 글의 병렬 – 예를 들어서 그림 밑에 글이 자막처럼 쓰여져 있는 방식 -을 넘어서서 말풍선이라는 기구가 발명된 이유는, 바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진행 묘사 때문이다. 말풍선은 극중 공간 속에, 그 공간과는 분리된 다른 차원의 별도 공간 – 즉, 언어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의성어/의태어의 경우 역시도 시각 세계와는 다른 것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연현상을 만들어 내는 기구다. 하지만 말풍선은 아예 현실의 감각영역이 아닌, 추상의 공간을 접합시킨다. 그리고 그 속에 극중 인물이 말하는 언어가 문자로서 표현이 된다. 하지만 말풍선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꼬리에 있는데, 그 것이 특정한 극중 인물을 가리킬 때 그 공간 속의 언어는 바로 그 인물의 것이 된다. 말풍선의 발명 덕분에, 만화에서 화자(話者)의 개념이 태어났고, 세부적이고 드라마틱한 서술이 가능해졌다. 말풍선은 극중 공간의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 않으면서 언어의 세계와 현실세계를 교묘하게 병존시킨다. 말풍선은 그림으로 묘사된 이야기 세계 속으로 언어를 끌고들어왔으며, 그 덕분에 소설 등의 다른 이야기 문학이 지금까지 이루어놓았던 업적들을 흡수할 수 있는 강력한 기반을 이룩했다. 또한 말풍선을 만들어냄으로서, 말풍선의 모양 그 자체를 이용하거나 말풍선의 안과 밖에 들어가는 언어를 차별화하여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아가, 말풍선은 ‘생각풍선’이라는 변형도 낳았다. 화자를 향한 꼬리를 일련의 동그라미로 처리함으로써, 만화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까지도 가볍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말풍선은 ‘언어’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만화라는 시각 매체 속에서는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라면 그 규정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말풍선 속에서도 글자체, 글자크기, 크기의 변화에 따라서 말의 크기나 어감, 목소리, 속도 등이 대단히 다양하다. 심지어 그림의 요소들을 말풍선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언어의 공간과 그림의 공간의 경계선을 가볍게 허물어버리는 표현들도 등장한다. 그만큼 만화라는 양식에 있어서는 글과 그림의 혼합, 경계선의 월경 등이 필요에 따라서 자유롭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의성어/의태어, 말풍선 등 흔히 알려져있는 만화의 ‘보여주며 말하기’ 기법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들이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칸 경계선을 글자로 만들어서 그 칸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를 잡아주거나, 만화 칸의 배경을 자잘한 글씨의 글로 채워서 잡담같은 분위기를 만들거나, 아니면 칸 바깥의 공간에 글을 배치시킴으로서 그 페이지 분량에 해당되는 사건 전개 전반 위로 흐르는 거대한 나레이션으로 기능하게 하는 등, 작가의 의도에 따라서 다양한 표현을 주저없이 활용해볼 수 있다.

[그림3: 말풍선의 안과 밖] ⓒ카고 신타로

글과 그림이 이야기 전달을 위해서 결합하는 파트너쉽 관계에 관해서, 만화이론가 스콧 맥클라우드는 이 분야의 고전인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에서 몇가지 이분법적인 전제를 하고 있다. 우선, 이야기의 전달은 중심적인 상황묘사(줄거리)와 심화되거나 자유로운  표현방식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야기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역할을 그림이 맡아주면 글이 보다 넒은 영역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으며, 반대로 줄거리 묘사를 글이 맡아줄 경우 그림이 그만큼 실험적인 모험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만화에서 글과 그림이 결합되는 방식을 크게 7가지로 거칠게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1) 글 중심: 글이 중요한 서술도구이며, 그림은 글에 대한 간단한 도해에 그친다.
2) 그림 중심: 그림이 중요한 서술도구이며, 글은 의태/음향효과에 그친다.
3) 이중 결합: 글과 그림이 같은 상황을 중복적으로 전달한다.
4) 첨가 결합: 글과 그림이 서로의 내용을 좀 더 강력하게 보좌해준다.
5) 병렬 결합: 글과 그림이 각각 일견 서로 무관한 내용을 보여준다.
6) 몽타쥬: 글이 그림의 일부로 녹아들어간다.
7) 상호의존적 결합: 글과 그림을 둘 다 독해해야 하나의 상황이 이루어진다. 

비록 애매한 범주이기는 하지만, 이 가운데 만화에서 가장 정교하게 발달시킨 것은 상호의존적 결합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글과 그림은 엄격한 분업관계가 아니라, 결합을 통해서 원래의 글과 그림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전개함에 있어서, 글은 그림과 역할분담이 자연스럽게 서로 섞여있다. 여기에 만화의 또다른 강력한 표현적 강점으로 꼽히고 있는, “상황 그림의 연속성”이 더해지면 그 효과는 더욱 무궁무진해진다.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 담긴 각 칸마다, 글과 그림이 만들어내는 균형이 조금씩 변형되고 흔들릴 때, 독자는 이야기속으로 하염없이 빨려들어가고 만다.

[그림4 : 명료함은 반드시 쉬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필링엄/수서

예술적 실험이 아닌 설명을 위주로 글과 그림이 결합할 때 나오는 가장 선명한 효과 가운데 하나는, 내용이 구체적이고 명료해진다는 것이다. 글과 그림은 서로의 의미를 확장시켜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제한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새가 날고 있습니다”라는 글과 결합되어 나오는 비둘기 그림은, 사람들이 글만 읽었을 때 상상할 수 있었던 새의 범주(독수리, 참새, 기러기 등)를 일거에 정리해버린다. 또한 글은, 그림 속에서 비둘기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 보도블럭 위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 아닌, 하늘을 날고 있다는 상황으로 규정한다. 속칭 ‘학습만화’로 불리우는 실용만화들의 높은 교육적 효과는 바로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유의해야할 지점은, ‘명료함 = 쉬움’ 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설명대상에 대해서 핵심적인 개념 위주로 요점정리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그 핵심개념 자체가 저절로 커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리 깔끔하고 작게 압축해서 짐가방을 꾸린다고 할지라도, 짐의 무게 자체는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따라서 글과 그림의 결합을 통해서 내용을 명료화시키는 것은, 보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서술 방식을 통해서 내용을 풀어주는 것과 동행할 때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떤 학습만화는 머리만 아프고, 어떤 학습만화는 알찬 지식으로 다가오는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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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글과 그림의 창조적인 결합방식과 그 의미를 만화라는 양식을 중심으로 몇가지 살펴보았다. 애초에 만화학 개론을 강의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논의를 접고자 한다. 분명히, 다른 영역의 여러 표현양식들이 성공적으로 결합될때 일어나는 신비한 결과는 흥미롭다. 그것은 이야기와 정서, 생각들의 더욱 효과적인 전달을 가능하게 하며, 보다 깊은 의미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필자가 이 지면에서 하고 싶은 말은 단순히 만화라는 양식에서 만들어낸 개별적인 글-그림 결합 기술들을 참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만화라는 양식이 견지해온 자세, 즉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창조정신으로 매체간 벽을 허물고 넘나들 수 있다는 마인드 자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분과 학문이나 전통적인 형식구분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동원하고 결합시킬 수 있다는 자유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굳이 말하자면, “만화를 읽듯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것이 좋다”.

[그림5: 초보적인 글-그림 결합이 적용된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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