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물 만화와 함께 성장하기 [학교도서관저널 1106]

!@#… 다만 성장물은 좀 와사비 같은 면이 있어서, ‘찡함’에 감동받는 취향은 스스로 어느 정도의 성장을 거친 후에야 생겨난다.

 

성장물 만화와 함께 성장하기

김낙호(만화연구가)

만화를 무슨 말초적 자극 하나만을 위해 보는 경우가 아니라면(딱히 그 쪽이 항상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대체로 그 안에 담겨있는 이야기를 위해 읽는 것이다. 이야기 속 누군가가 펼쳐나가는 과정에 몰입하며 즐거워하기도, 슬퍼하기도 하는 간접체험 속에서 무언가 생각이든 감정이든 얻어내는 것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잘 만들어진 이야기란 종종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들이 그저 단순히 시작할 때도 끝날 때도 똑같은 상태이기보다는, 이야기가 펼쳐진 결과로 무언가 변하는 것을 담아낸다. 한마디로 주인공이 ‘성장’을 한다는 것이다. 성장물이란 주인공의 성장이 이야기의 가장 핵심에 놓인 일군의 작품들을 하나의 장르처럼 느슨하게 묶어 부르기 위한 구분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대부분의 극만화는 어떤 식으로든 주인공들의 성장을 다루고 있지만, 성장을 다른 어떤 소재로 치환하기보다는, 성장기의 내면적 갈등들을 봉합하고 결국 사회에 적응하고 살게 되는(혹은 살게 될 것을 아는) 절차로서의 이야기를 말한다.

이렇게 개념화시켜서 말하면 다소 난해할 수 있지만, 사실은 이런 식이다. 인기 환타지 격투 만화 [드래곤볼]의 주인공들은 힘든 훈련과 사투, 변신을 통해 계속 성장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내면이나 성장기 자체의 갈등보다는, 성장의 척도가 오로지 무력으로 치환되어 있다. [검정고무신] 같이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만화는 현재의 작가와 과거의 모습들이 대비되며 성장의 이미지를 자동으로 만들어내곤 하지만, 작품 자체를 놓고 볼 때는 과거의 단면 자체에 머물기 때문에 성장이 중심에 놓여있지 않다. 좀 더 본격적으로 ‘성장물’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회고나 승부 같은 것이 아니라 성장기의 극복과 새로운 어떤 안정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물론 성장을 이뤄내서 도달한 그 상태가 꼭 좋은 상태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성장물은 몰입과 간접경험이라는 이야기의 매력을 가장 가깝게 충족시켜주는 방식이며, 성장과정의 내면적 갈등을 소재로 삼기에 성장 과정에 있는 독자들에게 더욱 거깝게 다가설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솔직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누구라도 늘 나름대로의 성장기에 있지 않던가.

섬세하고 잘 만들어진 성장물 만화의 보물창고는 90년대 중반 이후 북미지역의 작가주의 만화계다. 장쾌한 초월적 폭력과 복잡한 캐릭터구도로 특화된 슈퍼히어로 장르 위주의 주류만화에 반발하여, 작가주의 작품들은 오히려 가장 차분하고 현실적이며 개인적인 이야기들로 파고들었다. 그 중 상당수는 자전적 요소가 강하거나, 최소한 자신이 살아온 환경을 잘 반영한 이야기들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명작은 [고스트월드](댄 클로우즈 / 세미콜론)으로,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판이 ‘판타스틱 소녀백서’라는 괴상한 제목으로 한국에서 개봉하기도 했다. 평단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에 비견되곤 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90년대를 살아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의 두 소녀로, 자신들을 둘러싼 구태의연한 세상에 대한 냉소적 시선을 독설로 풀어내는 것이 일상이다. 엉터리고 말도 안 되는 재미없는 세상에 사람들이 적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비웃으며, 그 안에서 연애든 기타 인생사든 사람들이 매달리는 가치들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서로 지적한다. 하지만 그것은 초월적 관조가 아니라, 스스로도 그 안에서 결국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늘 함께 하는 위악이다.

좀 더 정면에서 성장기의 우울한 외로움을 직면하는 명작도 적지 않다. 그 중 돋보이는 작품인 [너 좋아한 적 없어](체스터 브라운 / 열린책들)은 내성적 성격으로 커가면서 머리 속에서만 상상력으로 이런저런 것을 그려보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활발하지도, 딱히 문제아 수준으로 막나가지도 않으며 그저 늘 외로운 청소년 성장기를 그려낸다. 그나마 펼쳐진 사랑의 실마리 또한 좋아한 적이 있기는 했는지 더욱 큰 외로움의 고백으로 돌아올 뿐이다. 어떤 식으로 외로움에 처하게 되는지 섬세한 상황 디테일이 살아있으며, 모든 것은 담담한 페이지당 6칸 고정적 칸 연출 속에 매우 정적으로 펼쳐진다.

깊이 있는 울림을 주는 성장물이라고 해서 늘 공격적이거나 무겁기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아니 무겁더라도 충분히 유머감각과 함께 갈 수 있다. [다르면서 같은](데릭 커크 킴 / 길찾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한인교포 2세대들의 20대 성장기다. 성장기라고 하면 흔히 사춘기를 연상하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하고 법적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성장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학, 적당한 첫 일자리 등 여러 어중간한 단계 속에서 사회인으로서의 자기자신을 계속 유예하며 “키덜트”적 상태를 유지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뒤돌아볼 때, 어떤 고교 동창은 이미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는데 자신은 아직 고교 첫사랑에게 상처 입혔던 죄책감도 미처 정리하지 못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런 과정들을, 어느날 도착한 발신인 없는 러브레터를 역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크고 작은 소동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펼쳐나가는 작품인 것이다.

또한 평생의 성찰을 따로 픽션화하지 않고 담담하게 서술하는 것도 매력적이다. [즐거운 집](앨리슨 벡델 / 글논그림밭)은 여성 동성애자인 작가가 거의 말년에 동성애자임을 밝혔던 자신의 아버지를 회고하는 작품이다. 장례를 가업으로 하던 환경에서 자라나며 자신의 성정체성,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자잘한 감상주의를 오히려 최대한 배제하고 건조하게 기억을 풀어나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위시하여 각종 문학적 참조가 넘치지만, 이야기 자체는 과장 없이 섬세하게 과거 순간들의 디테일을 탐구한다. 시간 순서대로 주욱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 어떤 소재가 매 단원 주어지면 그것과 관련된 기억들을 짚어내는 방식이지만, 여러 조각들을 작품을 읽으며 맞추어내면 어떤 식으로 작가가 현재의 모습까지 성장했는지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이런 자전적 요소가 강한 성장물들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종종 녹아들어 있는 만큼, 현실감 있는 디테일과 섬세한 감정 균형이 잘 살아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작품 자체가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겪은(혹은 여전히 겪고 있는) 혼란에 대한 여러 감정과 기억의 추스림 과정의 일부가 되는 만큼, 가장 솔직한 방식의 정서적 공감을 찾을 수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성장물들은 좀 더 추레한 현실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온갖 방식으로 청춘은 이야기 속에서 미화되곤 하지만, 사실 그렇게 재기 넘치지도 아련하지도 않은 그저 또다른 현실이다. 그것을 오히려 정확하게 직시할 때, 또 다른 성장물의 재미를 발견하게 된다. [열아홉](앙꼬 / 새만화책)은 정말 별 것 없는 후기 청소년기의 편린들로 가득하다. 압도적인 재능이 있어서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딱히 영민해서 주변의 기대를 모으는 것도 아닌 그저그런 청춘들이 그저그런 나날을 보내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이 때로는 한심해서, 때로는 그냥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한숨이 나온다. 대부분의 평범한 이들에게는, 그 상황을 위트로 냉소하는 것도 이미 픽션의 영역이고, 파괴적 청춘의 에너지로 승화하는 것도 작위적이다. 그런 지리멸렬함의 감성을 솔직하게 펼쳐버리는 것이 이 작품의 장점이다.

혹은 꽤 동화적인 감성을 보이면서도 사실은 충분히 성장통의 아픔들, 성장한 다음에도 사실은 별 것 없음을 뼈아프게 짚어줄 수도 있다. [바이바이 베스파](박형동/애니북스)는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동화적 비유, 혹은 청춘의 종말에 대한 단편들이 묶인 책이다. 요술공주 밍키는 어른이 되어 현실에 찌든 중년여성이고, 베스파 바이크로 떠나는 마지막 여행으로 청춘이 끝나고 별 볼 일 없는 어른의 생활로 뛰어들 자신과 대화하기도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청춘의 상실은 아픈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임을 인정할 정도의 성숙함은 충분히 있고, 밍키는 요술이 없어도 나름대로 적당히 행복하게 계속 살아갈 다짐을 보여준다.

그런데 성장물이 가장 독자들과 강한 공감대를 끌어모을 수 있는 것은, 당대의 청년 현실과 실시간으로 함께 호흡할 때다. 누군가의 지난 날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지금 세상과 보조가 맞을 때다. 그런 의미에서 [무한동력](주호민 / 상상공방)은 청년 백수 취업기라는 지극히 오늘날 한국현실에 적합한 성장통이 담겨있다. 대학가면 여자/남자가 줄을 서고, 번듯한 월급 나오는 직장이 최고라는 식의 각종 현대 한국사회의 신화들이 말 그대로 신화임을 알면서도 거부하지는 못하는 애매한 시대다. 공무원 고시를 준비하며 소위 청년인턴의 허상을 경험하는 이, 자기 전문기능으로 작은 가게에서 일하며 창업을 꿈꾸는 이, 딱히 꿈도 아니지만 안정적 직장을 위해 금융권 사무직이 되겠다고 하염없이 이력서를 돌리는 이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하숙하는 곳의 주인 아저씨는, 하숙집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지만 무한동력 장치라는 커다랗고 가능성 희박한 꿈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이다. 모든 이들이 현실 속에서 꿈과 현실을 함께 안으며 조금씩 성장하는 이 과정을 보면서 가슴 한 켠이 찡해지지 않기란 힘들다.

종종 성장물은 성장의 과정에 있는 전환기의 정서, 즉 앞날에 대한 불안과 기대, 무언가를 잃었다는 상실감, 그리고 결국 그것도 지나가리라는 것을 아는 사후적 달관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렇기에 성장물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려면 두 번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우선 독자 자신이 어떤 성장의 와중에 있을 때 이입하며 읽는 것이 한 번이고, 그 단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지나온 이들이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곱씹어보는 것이 두 번째다.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 아마도 또 다른 성장의 과정에 돌입하여 이전 성장에서 느꼈던 무언가를 다시 들춰보는 것일 수도 있다. 혹 좀 더 어린 시절 읽었던 기억에 남는 좋은 성장물이 있다면, 지금 다시 읽어보기를 권장한다. 혹 지금 자신에게 적용될 만한 다른 좋은 성장물을 소개받았다면, 당장 책장을 펼치기를 권장한다. 성장물의 궁극적 힘, 바로 성장물과 함께 자신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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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학교도서관저널. 특정 컨셉 아래 청소년들에게 추천하는 책들을 묶는 내용으로, 만화를 진득하게 즐기는 것의 즐거움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배합해보자는 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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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글 읽고 흥미가 생겨서 여기 나온 만화들 다 찾아봤는데요.

    새만화책에서 나온 는 없고, 열린책들에서 나온 가 있는데 절판 상태네요.

    앨리슨 벡델 만화는 이란 이름으로 글논그림밭에서 나왔네요. 이것도 절판이고요ㅠ

    박형동 것은 란 제목으로 나와있고요. 이건 팔고 있네요 ㅎㅎ

    좋은 만화 많이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절판된 책이 있어서 안타깝지만으뉴ㅠㅠㅠ 도서관을 뒤져봐야겠네요 ㅎ

  2. 잉 댓글이 왜 이러지 ㅠㅠ 중간중간이 지워졌네요; 수정도 안 되고 ㅠ

    새만화책에서 나온 ‘널 좋아한 적 없어’는 없고, 열린책들에서 나온 ‘너 좋아한 적 없어’가 있다,
    앨리슨 벡델의 이 글논그림밭에서 나와있다,
    박형동의 가 애니북스에서 나와있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3. 꺽쇠괄호가 문제군요ㅜ.. 앨리슨 벡델의 ‘재미난 집’, 박형동의 ‘바이바이 베스파’

  4. !@#… 초롱님/ 앗 [너 좋아한 적 없어] 출판사를 제가 오기했습니다. 굿바이 -> 바이바이와 함께, 얼른 수정 들어갑니다 :-) 그런데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절판인건지 참;; OTL (재미난집은 무려 2008년 출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