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능력을 키울 만화 [학교도서관저널 1201]

!@#… 만화가 독서능력을 떨어트린다느니 하는 러다이트정신 충만한 이들이 좀 출몰했던 작년말 즈음에 쓰여졌던 원고.

 

독서 능력을 키울 만화

김낙호(만화연구가)

꽤 오래전부터, 만화책과 다른 문자 중심 책을 비교하여 전자를 열등한 것으로 평가하는 이야기들은 늘 있었다. 문자로만 되어야 진짜 책이며, 만화책은 독서능력을 오히려 떨어트리는 사이비로 취급하는 괴상한 사고방식 말이다. 시각적 심상을 통해서 서사를 전달하는 것이 그 자체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발상은 딱히 탄탄한 근거와 함께 오는 경우가 없다. 다만 독서전문가들의 인용구를 대충 붙여, 만화에 익숙해지면 다른 책을 읽을 능력이 떨어진다며 관성적으로 타박하는 글이 나올 따름이다. 방학을 앞두면 방학이라고, 신학기는 신학기대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니까, 뭐 결국 아무 때나 그런 류의 내용들은 언론 지면을 빌어 고개를 든다. 그 내역이란 어휘력이 빈곤해지며, 상상력이 결핍되고, 의성어 위주의 선정성에 빠져서 사고력 생성에 방해된다는 논지로 가득하다.

사실 그런 류의 “오로지 내가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유익하다”라는 무척 무익한 접근은 비단 만화와 다른 책의 관계 뿐만 아니라 거의 똑같은 패턴으로 온라인 글과 종이책, 단문과 장문 사이 등에서도 시비가 붙곤 하는데, 만화라는 매체표현양식에서는 그런 민망한 편견이 좀 더 오래되었을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고력을 키우고 싶다’면서 어떤 만화를 읽는가, 그리고 어떤 식으로 만화를 읽는가 등 독서 지도의 문제다. 만화가 아니고 쓰레기 같은 책이 딱히 적은 것도 아니고, 같은 우수한 책을 읽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게 읽는 경우들이 낯설다고 할 수 있겠는가. 기계적으로 학습만화가 장르모험물보다 독서능력에 더 도움이 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논리적 사고와 독해능력, 언어구사력은 논리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만화를 제대로 즐기는 과정에서, 독해능력과 언어구사력은 정제된 고급스러운 문학적 완성도의 만화들을 읽게 하고 같이 토론하는 것을 통해서 얻는다.

논리를 논하다

가장 쉽게 동의할 수 있을 법한 영역부터 살펴보자. 독서를 통해 얻어야할 능력으로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이라면 논리력이다. 논리적 말의 전개를 읽어나가며 논리를 통한 사고에 친숙해진다는 발상이다. 그렇다면 아예 논리를 논하는 만화를 들어보는 것이 낫겠다. 그냥 ‘기법’들을 가르치는 유사교과서로서의 논술 학습만화 같은 것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논리를 탐구하는 것 그 자체를 살펴보자는 말이다. 그런 지점에 있는 작품이 바로 [로지코믹스](독시아디스, 파파디미트리우 외)다. 이 작품은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란드 러셀의 일대기를 그리는 작품인데, 그저 인간의 성장이 아니라 논리를 탐구하는 과정을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수학적 엄밀함과 객관성을 통해 철학적 세계를 규명하고자 하는 논리철학의 발전과정, 그 와중에 같이 교류하고 충돌하는 수많은 20세기초 지성들이 각자의 사상과 함께 등장한다. 1+1의 궁극적 논리 규명을 위해 십년 넘게 고생한 작업과정, 자신보다 더 강력하게 객관성을 공식화하려한 후학 비트겐슈타인, 괴델과 비엔나학파 등이 논리에 대한 탐구 속에서 엮여나간다.

논리에 대한 이들의 발상을 때로는 그들 자신의 입으로, 혹은 작가들이 이 책의 창작 과정에서 서로 토론하는 극중 모습을 통해 제시하며, 하나의 답이 아닌 탐구의 과정을 각자의 일생과 당대의 시대맥락 속에서 펼쳐나간다. 서사의 전개와 작가의 설명, 여러 시점과 개념들의 자연스러운 교차과정은 만화의 시각적 연출을 통해서 비로소 난해함의 함정을 피할 수 있다. 그렇듯 어떤 팍팍한 문자책도 쉽게 해낼 수 없는 방식으로 독자를 논리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문자가 논리와 사고를 배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논리를 추구하는 내용을 얼마나 더 모든 표현수단을 통해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가에 따라서 독자의 논리력도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사고의 폭은 역사를 통해

독서능력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인간사에 대한 폭넓은 사고를 기르는 것에 있다. 기계적으로 논리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게 인간사의 맥락에 자신의 사고를 개방하여 새로운 이야기와 정보를 취득할 때 섬세하고 합리적으로 소화해내는 것이다. 그런 능력을 길러내는 가장 직관적 방식 가운데 하나는 바로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모든 학습과정의 기초가 되는 것이 시행착오이듯, 인간사의 시행착오는 바로 이전 역사를 알고 패턴을 읽어 같은 실수를 가급적이면 회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표준 역사교과서 책에 머물 것이 아니라, 역사의 여러 측면들을 각각의 시각에서 소화하고 가급적이면 현대의 우리들과 연결시켜주는 작품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고유명사 새로 외우기 바쁜 식으로는 곤란하고, 그것 역시 언제 어딘가 누군가들이 살아온 “이야기”임을 잘 보여줘야 재미를 붙여 읽어낼 수 있다.

[십자군 이야기](김태권)은 중세 십자군 전쟁의 전개과정을 보여주며, 인간사에서 반복되는 유구한 전쟁의 어리석음에 관해 비판하는 만화다. 원래 2003년 미국의 이라크침공 당시 시작된 작품인데, 당대 국제 정세와 오늘날의 관계, 귀족부터 일반 민중까지 각자의 무지와 탐욕들이 어떻게 잔인한 피바다와 허무한 결말로 귀결되었는지 반복해서 보여준다. 중세 태피스트리와 벽화들 특유의 위축되고 왜곡된 인체형상을 차용한 그림체로 펼쳐지는 우매한 잔인함의 순환반복 확대 과정은, 문자로만 된 역사책들이 전달하기 힘든 독특한 전달력을 지닌다. 나중에 같은 제목으로 출간된 인기 역사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와 비교하더라도 같은 지면에서 전달할 수 있는 단순 정보의 양은 부족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인물과 세력 사이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모순들을 전달하는 것에 있어서는 한 수 위다. 당대의 문제있는 모습들이 현대 한국사회의 어떤 모습들과 닮아있다고 넌지시 던져주는 메시지 역시, 시사만평 장르가 발전시켜온 시각적 패러디와 연상 기법을 사용할 때 극대화된다.

혹은 좀 더 우직하게 당대 역사만 묘사한다고 해도 좋다. [만화 조선왕조실록](박시백)은 조선 왕들의 역사를 담아낸 기록문화 ‘조선왕조실록’을 충실하지만 쉽고 선명하게 묘사해내는 역작이다. 교과서에서 중간고사 문제 암기용 명칭으로만 배우고 잊어버리던 각종 제도와 문물들의 맥락과 쓰임새가 매번 확실하게 제시된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조선 시대상의 진화 과정을 하나의 장대한 서사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궁중암투극의 드라마에 몰입하기보다, 조선이라는 사회의 곳곳이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에 집중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궁 속의 일을 묘사하기에 바쁜 것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 민초들의 생활상 등이 한꺼번에 물려있다. 소설 창작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서사적 재미를 지니며, 알아보기 쉬운 캐릭터화를 통해 고유명사의 바다에 함몰되기보다 이야기로서의 유기성을 유지한다. 이런 작품을 정독하면 다음 모의고사에서 암기문제를 맞추는 것에는 도움이 될 되겠으나, 역사적 교훈을 통한 인문적 사고의 폭은 반드시 더 넓어져 있을 것이라고 본다.

섬세한 읽기는 문학적 완성도에서

독서능력의 한층 고급 영역이라면, 바로 섬세한 읽기다. 말에 심어져 있는 복선을 파악하며, 가장 절묘한 표현들이 어떻게 좋은 소통과 언어적 미감을 일으키는지 습득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바로 작품이 구사하는 언어의 문학적 완성도에서 나오는데, 만화의 경우 서사의 상당부분을 문자언어가 아닌 그림의 연속에 맡기기 때문에 문자책 우월론자들이 쉽게 자신의 옳음을 주장할 수 있을 법한 부분이다.

다만, 구사하는 언어에서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을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귀여니 장르연애소설과 이상문학상 수상작들이 문장의 수준이 다르듯, 만화 역시 하나로 묶이기보다는 작품에 따라서 문장이 전혀 다르다. 한 중년 교수의 자아 찾기 여행을 그려내는 [아스테리오스 폴립](데이빗 마주켈리)을 예로 들어보자. 자신의 디자인이 건축된 적 없는 건축학 교수가 관념과 현실의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자신의 짜여진 삶과 일탈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결국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야누스의 양면성에 대한 상징, 각종 미술사조에 대한 성찰, 심지어 그림과 글의 혼성에 대한 적극적 탐구가 이뤄진다. 이것은 시각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동시에 이뤄지고, 어떤 대사나 지문도 허투루 지나가지 않는 꽉 찬 구조를 지닌다. 문자로만 독서 지도를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난감한 교재가 되겠지만, 좀 더 폭넓게 문학적 함축과 상징, 구조를 파고들어볼 용의가 있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작품이 되어줄 것이다.

혹은 그냥 말 자체가 다양하게 풍부해도 된다. [프롬헬](앨런 무어/에디 캠벨)은 19세기말 런던의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를 둘러싼 음모와 수사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빅토리아 시대 각 계층의 생활습관과 언어, 상스러운 범죄현장과 고급스러운 수사로 가득한 대사들이 가득하다. “최초의 현대적 살인마 사건”을 왕실의 음모, 언론과 소문의 사회상에 엮는 문학적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며, 고급스럽게 설계된 복선과 상징의 대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당연히 초등학생 도서지도용 작품으로 쓰기에는 내용이 지나치게 강렬하지만, 다시 말해 비단 만화를 통한 독서능력 습득을 고작 초등학생들에게나 한정짓는 것이 한심한 일 아니겠는가. [프롬헬]의 고급스러운 대사들을 보고 있다보면, 만화에서 자주 구사하는 구어체 자체가 언어능력을 줄이는게 아니라, 그것의 섬세함을 제대로 논해볼 필요가 없는 엉터리 지적 환경이 언어능력을 줄이는 것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만화로 독서를

묵직하게 개별 작품들을 놓고 독서능력과 어떻게 연결시킬까 고민하기가 아무래도 너무 귀찮다면, 좀 더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만화 잡지들도 좋다. 아예 그런 쪽으로 특화된 잡지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문 만화 잡지”를 표방한 격월간 [싱크]는 연구단체인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만화작가들이 협업하여 만드는 잡지로, 현 사회에 대한 인문학적 주제를 만화와 글로 함께 담아낸다. 잡지에는 식민역사에 대한 각성, 여성인권에 대한 문제 제기, 철학의 기본 개념들 등 다양한 토픽들이 들어있다.

더욱 저연령층에게는 [독서평설 아이(만화로 보는 독서평설)]도 추천할 만 하다. 오랜 출판경력을 자랑하는 독서평설 시리즈의 만화판 자매지이며, 교과서를 내는 교육출판사에서 직접 발간하는 것이 특징이다. 표준 교과과정과 직접 연계된 풍부한 토픽, 자극적 재미를 통제하면서도 학습모험만화풍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조절 능력등이 장점이다.

만화는 독자를 진지한 독서로 입문시키기 위한 당의정이 아니다. 그냥 당의정스러운 만화를 당의정스럽게 읽었다면 당의정인 것이다. 문자책이든 만화책이든, 종이책이든 온라인글이든, 긴 글이든 짧은 게시판 글이든, 진지한 이야기를 선별하여 진지한 읽기를 할 때 독서능력이 향상된다. 그런 고민이 부족하다면, 셰익스피어를 쌓아놓고 읽는다한들 아무것도 향상될 일이 없다. 하기야 지금 이 잡지를 펼쳐서 이 글을 읽고 있을 정도의 독자라면 더 고민하고 싶은 관심은 이미 충분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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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학교도서관저널. 특정 컨셉 아래 청소년들에게 추천하는 책들을 묶는 내용으로, 만화를 진득하게 즐기는 것의 즐거움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배합해보자는 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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