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창작 노동에 관하여: 블랙잭 창작비화 [기획회의 396호]

!@#… “따라하지 맙시다.”

 

만화 창작 노동에 관하여 – [블랙잭 창작비화]

김낙호(만화연구가)

인기만화가 천계영 작가가 트위터에 남긴 인상 깊은 발언 중 하나는, “창작이라서 고통이 아니라 초과근무하면 원래 고통스러움”이다. 그렇듯 창작이란 기본적으로 노동이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시간과 육체를 투여한다. 적성에 잘 맞지 않을수록 같은 수준의 성과를 위해 투여해야할 노동이 더 크고, 적성에 잘 맞아도 신나서 너무 과도하게 노동하면 힘들어 쓰러진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습의 일본만화의 기틀을 가다듬었다고 봐도 큰 과장이 아닌 전설적 만화가 테즈카 오사무의 별명은 ‘만화의 신’이다. 테즈카의 혁혁한 성과는 여러 장르들을 확립하고 탁월한 연출법들을 개발해내고 인간의 깊숙한 본질을 건드리는 명작들을 만들어낸 질적 측면을 가장 먼저 꼽게 된다. 하지만 함께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런 질적 성과의 바탕에는 엄청난 작품 활동량이 있다는 것이다. 고작 환갑의 나이로 세상을 떴지만, 그동안 무려 단행본 700여권, 15만 페이지에 달하는 작품을 창작해냈다. 비슷한 이야기를 쳇바퀴처럼 반복해서 양산한 것도 아니고, [철완 아톰] 같은 소년만화의 모범부터 [리본의 기사]의 순정만화 감수성, [붓다]의 진득한 장엄함조차 소소해보이게 만드는 [불새] 연작의 거대함까지 다양한 장르와 소재, 연출의 폭을 선보이며 쌓은 비블로그래피다.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애니메이션에 도전, 회사를 설립하고 그 안에서 엄청난 작업 분량을 직접 틀어막았다. 이야기의 질에서 천재적 이야기꾼이지만, 이야기 생산력에 있어서는 아예 신의 영역에 도달한 창작 노동자다.

[블랙잭 창작비화](미야자키 마사 / 학산문화사 / 4권 발매중)은 테즈카 오사무가 한창 만화를 그려내던 시절의 일화들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묘사해내는 만화다. 물론 테즈카라는 사람에 대한 전기는 자서전을 포함하여 이미 여럿 나와 있지만, 오로지 만화를 만들어내는 창작노동의 현장에 집중하여 아예 만화 형식으로 표현해내는 작품이기에 매력적이다. 그러다보니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일에 파묻혀 도저히 인간으로서 살아남을 방도가 없어 보이는 만화 창작 노동의 현장에서, 테즈카 오사무가 어쨌든 일을 해내는 모습이다. 그리고 편집자, 어시스턴트 등 주변인들이 그 엄청난 에너지에 같이 호응하거나, 어느 틈에 함께 휘말려 들어가는 모습이다.

언론 인터뷰 등에서 늘 빵모자를 쓰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화판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은 거짓말이고, 실제 테즈카의 작업은 머리띠를 질끈 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무섭게 찡그린 표정으로 좋지 않은 눈을 원고에 거의 붙이다시피하는 것이었다. 마치 자신의 머리에 있는 내용을 놓고 현실의 종이와 힘겨운 승부를 하듯, 온 힘을 다한 노동인 것이다. 또한 그렇게 많은 것을 이뤄내고 있으면서도, 계속 당대 작가들과 경쟁해서 이기고 싶어한다. 응모전에 심사위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시간이 없다거나 재미없는 만화에 질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작품을 차라리 응모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해버린다. 그렇기에 자기 작품에 대한 통제력도 엄청나서, 미국 여행 중에 펑크나게 생긴 연재 원고의 완성을 일본에 있는 어시스턴트들에게 전화로 지시를 내리는 일화도 있다. 아무 자료 없어도, 자신이 그렸던 이전 화의 장면들을 모두 선명하게 외우고 있어서 어느 페이지 어떤 장면을 참조하여 다시 그 공간을 그려내라고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테즈카의 장점은 재능도 넘치고 생산력도 넘치는 것이지만, 치명적 단점은 열정이 그보다 더욱 더 넘쳐서 결국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의 작업에 도전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어떤 식인가 하면, 원고 마감 기일의 압박이 상당한 상태에서 편집자가 다음 작품을 논의하러 오는데, 촉박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여러 작품을 구상해서 내놓고 그 중 골라보라고 제안한다. 편집자는 제시된 작품들이 모두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그 다음에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상식적인 대응인 “어떤 것을 가장 빨리 원고를 끝내실 수 있습니까”를 묻는다. 그러자 테즈카는 노발대발하며, “나는 전심전력으로 일하고 있으니 당신도 제대로 좀 생각하라고”를 외친다.

적당히 판타지물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매번 성공하는 것이겠지만, 다소 과장은 섞더라도 기본이 다큐 계열이다보니 실패 속에서 겨우 봉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열정 넘치고 위태로웠던 나날들의 모습이 테즈카와 일본 현대만화계의 수많은 거대한 실존인물들을 통해서 펼쳐진다. 너무 많은 원고를 동시에 작업하고 있어서 어차피 대부분의 작품들은 마감을 어기게 되기 때문에, 여러 출판사의 편집자들이 서로 자기 작품을 먼저 받아가려고 서로 경쟁하며 작가를 독촉한다. 늘 만화를 그리지만, 그런 독촉을 모두 견뎌낼 수는 없기에 작가는 전국을 돌며 도망을 다닌다. 그런 일화들이 테즈카가 남긴 수많은 작품만큼이나 많이 펼쳐진다.

이런 일화들은 대소동으로서 우습기도 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대한 동경을 일으키기도 하고, 턱없는 과로를 당연하다는 듯 종용하는 분위기에 혀를 차게 만들기도 하고, 결국 온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모습에 반면교사의 교훈을 보여주는 듯 보이기도 한다. 당사자들이야, 당시를 돌아보며 고생스러웠던 작업과 그래도 그 이상으로 그런 엄청난 에너지와 함께하며 얻은 고양감을 동시에 회고한다. 하지만 지금의 독자들에게는, 매 순간 열정과 광기 사이 어디엔가 있는 듯한 모습에서 어이 없는 유머와 약간의 섬뜩함도 함께 읽어낼 구석이 있다. 그런 복합적인 맛을 전달해주는 비결 가운데 하나는, 요즘 분위기의 미형보다는 온갖 경악과 적당히 지저분한 표정들을 만들어내는 살짝 고풍스러운 그림체다. 그가 그려내던 둥그렇고 귀여운 미형 그림으로 이미지가 박혀있는 테즈카를, 일에만 몰두한 무서운 아저씨로 그려내는 격차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동시에, 다큐 접근법에 걸맞게 상당히 세밀한 당대 공간과 인물 모습들을 그려내는 디테일 역시 좋다.

[블랙잭 창작비화]는 조금도 바람직하지 않은 미친 열정으로 서로를 혹사시키던 어떤 창작풍경의 유쾌한 판타지 같은 실화다. 이런 작품을 보고 “맞아 다들 저 정도는 해야 해”를 떠올리면 당연히 낭패다. 그보다는 처절하고도 유쾌한 작품이 만들어내는 웃음과 경악 속에서, 재능과 열정조차도 일에 대한 적절한 조절과 만나지 않으면 온갖 문제를 만들고 주변인들을 괴롭히게 됨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블랙잭 창작비화 4
요시모토 코지 지음, 미야자키 마사루 원작/학산문화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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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마당씨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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