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하고 폭력적인 슬럼 활극의 반가움 – 도로헤도로 [기획회의 282호]

!@#… 일본만화의 매력을 고작 말랑한 모에물에서나 찾곤 하는 나약한 현대인들에게 무언가를 다시 일깨워주는 작품이랄까(핫핫).

 

암울하고 폭력적인 슬럼 활극의 반가움 – 도로헤도로

김낙호(만화연구가)

90년대에 한국에 일본만화가 정식 그리고 해적판으로 쏟아지는 와중에 그 매력에 눈을 뜬 이들 가운데에는,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 같은 소년만화의 잘 짜여진 오락성에 반한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며 단행본 시장을 살찌웠다. 하지만 좀 더 소수의 부류는, 우울하고 폭력적인 미래세계의 험한 환경 속에서 험한 일들을 겪는 SF들에 열광했다. ‘아키라’, ‘총몽’, ‘애플시드’ 등으로 대변되는 이 부류의 작품들은 기계문명이 극한으로 발달했으나 정작 생활은 슬럼화된 도시풍경, 일상화된 폭력과 인명경시, 잦은 신체훼손과 사이보그화, 그리고 그 속을 폭력으로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정체성 혼란이나 독특한 허무주의 정서 등이 듬뿍 담겨있었다. 일본식 사이버펑크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이런 작품들은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래로 계속 저물어가며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어가지 못하고 점차 드물어졌다. 인명경시의 SF상상력은 세계를 일소하는 내용을 다루는 소위 ‘세카이물’이라 일컫는 스케일 큰 유사신비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험한 일상의 세계를 험하게 살아나가는 펑크적 인간형은 내적 고뇌로 가득한 소년소녀들로 대체되었다. 그 부류의 작품들이 보여주었던 독특한 활력과 기괴하지만 매력적인 어두운 공간적 상상력은 지난 시대의 것이 되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부류의 정수를 훌륭히 계승하며 더욱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드문 작품이 하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으니, 바로 99년부터 현재까지 연재중인 [도로헤도로](하야시다 큐 / 시공사 / 2권 발행중)다. 정작 이 작품은 SF가 아니라 마법이 난무하는 판타지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서는 철저하게 일본식 사이버펑크를 구사한다. 이 작품의 세계관에는 마법사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각각 존재하는데, 마법사는 외관상 인간과 같지만 뇌 속에 작은 악마 모양의 종기가 있고 마법의 연기를 만들어내는 기관이 내장에 있다. 그 결과 손이나 입 등에서 마법의 연기를 내어 마법을 사용하는데, 상대를 버섯으로 변신시킨다거나, 파충류로 만든다거나, 상처를 치료하는 등 각 개인마다 능력이 다르다. 그런데 이들은 마법능력을 연습해보기 위해 종종 인간들이 사는 슬럼 세계인 ‘홀’에 차원 이동문을 만들어 난입, 인간들을 모르모트로 희생시킨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홀에는 마법사에게 얼굴을 도마뱀으로 변신당한 거구의 남자 카이만, 그리고 무술에 능한 여성 동료 니카이도가 그렇게 온 마법사들을 역으로 사냥한다. 그들의 목적은 카이만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것으로, 마법사의 얼굴을 삼켜서 카이만의 몸 속에 있는 어떤 존재에게 얼굴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법피해자로 넘치는 도시와 마법사들의 그저 그런 세상 두 곳을 무대로 마법사와 인간, 악마와 좀비들이 모험을 벌인다.

[도로헤도로]는 전혀 착하지 않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넘쳐난다. 하나 같이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이들을 살해해버리는 것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특별한 타인에 대해서는 챙기는 마음이 크며, 비인간적 생활과 인간적 감정들 사이에 재미있는 순간들이 드러난다. 마법사 범죄조직의 청소부인 신(心)은 심장모양 가면을 쓰고 다니며 상대를 조각내는 마법을 구사하고, 주 무기가 장도리일 정도로 폭력의 화신 그 자체다. 하지만 홀에 사는 과거 생명의 은인을 돕고, 파트너를 소중히 대하는 도시남이다. 마법사를 연구하는 인간 카스카베 박사는 여러 사람들을 구하지만, 실상은 ‘미친 과학자’에 가까워서 마법을 연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마법사들의 시체로 각종 기괴한 실험을 일삼는다. 선인도 악인도 아닌, 맥락과 관점에 따라서 바뀌는 인물들 투성이인 것이다. 각자 자기 목적에 충실하게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고 달리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이들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재미에 푸욱 빠져들게 된다. 심지어 시트콤의 유쾌함까지 느낄 수 있는 대목들이 간간히 등장할 정도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살아가고 만들어내는 세계는 진흙 시궁창이라는 제목 그대로, 암울하기 짝이 없다. 인간의 세계인 홀은 길 가다가 풋내기 마법사에게 걸려서 몸이 잘못 변형되거나, 그렇게 해서 죽었는데 마법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날에는 좀비가 되어 되살아나거나, 공권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무정부주의 동네에서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강하거나 그 자체로 문제가 많은 자치회에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 그렇다고 서서히 멸망해가는 묵시록 세계도 아니고,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슬럼 속에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는 곳이다. 그렇다고 마법사의 세계라고 해서 그와 대비되는 부르주아 천국인가 하면, 그냥 평범하게 부유한 곳도 가난한 곳도 적당히 존재하는 사람 사는 세상이다. 마법능력의 차이에 따라서 출세길과 신분이 갈라지고, 가장 우수한 이들은 면허시험을 통해서 악마로 승격되기 위해 경쟁한다. 약한 자는 멸시당하고, 그 중 일부는 그런 사회체제에 저항을 하려 노력도 한다. 인류에 대한 확실한 악으로 보이는 마법사들도 자기 세계에서는 그냥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고, 홀의 자치회도 원래 마법사와 그 혈족들을 실제 범죄여부와 관련 없이 마녀사냥 하듯 처형하고 다녔다. 다들 각자, 암울하지만 당연하게도 매우 현실세계와 비슷한 점이 넘치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에 일조한다. 다만 두 세계 모두 폭력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따로 없는데, 각종 다툼이 그냥 상대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것으로 해결되기 십상이다.

기술문명이 마법으로 바뀌었을 뿐, 도시 슬럼 분위기의 비주얼과 미래적 누더기 패션 등은 이 작품이 일본식 사이버펑크의 연장선에 있음을 확실하게 해준다. 사실적이면서 건방진 분위기가 일품인 얼굴 표정과 분장은 ‘아키라’의 영향권에 있으며, 부던히도 썰리고 쪼개지는데 조금 보다보면 징그럽기보다는 그냥 일상풍경이 되어버리는 뒷골목 풍경은 ‘총몽’ 초반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무엇보다 극명한 것은 그림체나 몇몇 캐릭터 설정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애플시드’ 등의 작가 시로 마사무네의 각인이다. 특히 건장한 체격과 강력한 무력의 남자와 강하고 똑똑한 여성의 파트너십(이 작품에서는 이 구도의 역전 커플도 나온다) 주인공 구도가 대표적이다. 암울한 세상 자체를 딱히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하루하루 자기 관심사로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점차 큰 사건에 휘말리는 스토리 전개 방식도 반갑게 익숙하다.

비록 묵직한 주제감은 덜하지만, 일본식 사이버펑크의 명작들이 주었던 암울한 상상력의 폭력 도시 활극의 정서와 재미를 되새기며 00년대 특유의 쿨한 캐릭터 감성까지 살짝 함께 느끼고 싶다면 오늘날 [도로헤도로]만한 작품을 찾기란 무척 힘들 것이다.

도로헤도로 Dorohedoro 1
하야시다 규 지음/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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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즉 이번 발간호): 나이트런 – 파더스데이. 깜빡하고 글 제목을 짓지 않… OTL 편집부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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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 dcdc님/ 검열에 눈가리고 아웅하기 위해 피를 하얀색으로 칠하고 칼을 젓가락으로 치환만 하면 진짜로 시트콤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핫핫)

  2. 일본엔 이런 숨은 보석같은 작품들이 가끔식 툭툭 나와서 참….

    전체적인 분위기는 암울하고 지저분한 뒷골목풍경들 같지만 은근 상류사회나 귀족들(부르조아?)의 모습도 그려지는게 … 여성작가다운 이미지라 생각했는데.. 얼핏보면 진짜 시트콤같기도 하네요. ㅎㅎ.
    아… 그리고 또 한가지 재미있는 설정이 …. 철저하게 반기독교 …라기보다는 친악마적인 사회모습. 홀은 말하것도 없고 마법사세계역시 절대적인 공권력이 없다는게 바로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정반대되는 모습이죠. 이게 또 재밌어요. 시시콜콜 악마들이 참견하기도 하고 ..또 악마들끼리도 서열이 있고 …ㅎㅎㅎ.

  3. !@#…ㅅ님/ 이게 다 악마의 음악(슬립낫이라든지 슬립낫이라든지 슬립낫이라든지) 때문입니다(핫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