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표절의 궤적을 되짚어 보기 [CriticM / 1508]

!@#… 게재본은 여기로. 이전부터 해오던 해적판 이야기 등을 모태로 재구성한 글.

 

만화 표절의 궤적을 되짚어 보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사실 표절이라는 개념은 여러 기준에서 다르게 쓰이곤 한다. 우선 법적인 의미의 표절은 꽤 기계적인 개념이라서, 양적 기준 같은 구체적 경계선을 두고는 표절이다 아니다를 뚜렷이 갈라버리는 것이다. 반면 대중 담론적 의미의 표절은 지나치게 넓게 쓰이곤 해서, 비슷한 모습이 발견만 되면 너도나도 “표절이네”를 외치곤 한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더 세분화하고자 하는 이들은 비슷함의 수준에 따라서 모사와 도용과 표절을 나누어 보기도 한다.

하지만 먼저 전제해야할 것은, 창작을 이뤄내는 것에 있어서, 남이 이미 만들어놓은 성과를 자신의 작업에 반영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점이다. 매번 바퀴부터 재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잘 된 부분은 흡수하고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감을 얻어온 남의 것과, 자신이 새로 더했다고 내놓는 기여 부분의 경계를 뒤섞는 것에서 발생한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여러 표현과 내용 속에서 정작 내 키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 구분하는 이유는, 한쪽으로는 각 창작자들에게 재산이든 명성이든 정당한 자기 몫을 부여해주는 것에 있다. 하지만 더욱 거시적인 측면에서는, 누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창작을 기여했는지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개인의 창작이든 장르나 조류 전반의 발전이든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이 있다.

반면 그런 명백한 순기능보다는 당장의 이득을 손쉽게 극대화하고자 하는 것이든, 그릇된 명성이라도 쌓고 싶은 것이든, 그냥 노동량을 줄이고 싶은 것이든, 제도적 한계에 대한 의식적 저항이든, 아니면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든 영감의 출처를 지워버리는 경우가 있다. 여러 작품들을 통해 만들어진 장르 규칙 같은 좀 더 광범위한 영감이라면 어차피 출처가 애매하므로 건너뛸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한 개별 작품이 영감의 출처라면 문제점 또한 특정적이 된다. 그런 경우 십중팔구는, 가져왔음을 숨기다보니 신나서 너무 많이 가져오고, 그 와중에 자신의 중요한 기여는 매말라 버린다. 그런 난감한 경우라면 마음 놓고 붙일 수 있는 모멸적 명칭이 바로 ‘표절’이다.

[라이파이]가 당대 ‘잭 커비 풍’ 미국만화 그림체나 연출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표절을 운운한다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변장 슈퍼히어로 장르에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있는 코드들을 바탕으로, 자기 이야기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952년에 전쟁통에 히트한 모험활극인 [밀림의 왕자]는 일본만화 [소년 케냐]라는 특정 작품의 이야기를 그대로 모사한 명실상부한 통짜 표절이었다. 그림체만 달라져있을 뿐, 작품의 재미를 이루는 핵심 요소인 소재와 장면, 줄거리가 고스란히 옮겨져 있던 것이다. 그리고 서봉재라는 가상의 작가를 두어, 그 작가의 오롯한 창작인 것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표절에 대한 철퇴를 가하기에는 당대 문화 상황이 워낙 열악했고, 대형 히트는 오히려 그런 식으로 해외 히트작을 표절하는 것이 창작노동의 고됨을 줄이고도 손쉽게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음을 증명해버렸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최소한 1980년대까지 만화 표절이 평범한 무단 복제 해적판에 머물지 않고, 특정 작가가 특정 작품을 베껴서 자기 작품이라고 내미는 매우 선명한 표절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실은 단순하다. 80년대까지 심의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전체가 사전심의로 이루어졌으며, 만화는 80년대까지 당국의 사전 검열에 의한 심의필을 받아야 했고, 더욱이 70년대까지는 만화 원고 자체에 직접 빨간펜으로 심의 삭제를 지시받았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원고가 있어야 하거나, 최소한 심의를 신청하는 작가가 있어야 한다. 즉 베껴서 원고를 만들고, 가짜로 작가를 하나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한국 만화판에는 표절의 복마전이 시작되었다. 온전한 자기 창작을 하는 장인들의 맥이 끊기는 일은 없었지만, 1960년대의 주류 만화 유통경로인 만화방은 독점화와 양적 공세가 시작되었고, 출판사는 창작능력보다는 표절을 해서라도 성공가능성 높은 내용을 빨리 많이 밀어내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하필이면 비교적 비슷한 대중문화코드를 지니는 일본에서 테즈카 오사무, 치바테츠야, 요코야마 미츠테루 등 간결하고 명확한 그림체와 몰입도 놓은 이야기를 펼치는 걸출한 작가들이 정력적으로 히트작들을 양산하고 있었기에, 표절할만한 출처는 차고 넘쳤다. 고유성 작가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에는 하도 현지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표절작을 내는 공정이 발달하다보니 테즈카 오사무의 단편인 [꼬리 인간]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동시에 한국에서 표절작이 출간된 촌극도 있었다고 한다.

한번 정착된 표절의 관행은 만화방 너머 당시 떠오르던 아동 잡지의 만화 연재에도 자연스레 옮겨갔다. 1970년대에 소년중앙에 연재된 [허리케인 죠]는 명백하게 치바테츠야의 공전의 히트작 [내일의 죠]의 표절작으로, 번듯한 한국 작가 명의와 한국인으로 번안된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공장제 만화방 만화의 관행, 저작권 의식도 만화 작품의 고유성에 대한 가치부여도 낮았던 당대 인식 등에 물들어, 표절이 당연하다는 듯 이뤄지던 시기였던 것이다. 아동잡지와 함께 탄생한 단행본 문고 시리즈 역시 온전히 표절의 굴레 안에 있었다. 70년대를 풍미하고 80년대초까지 명성을 떨쳤던 ‘클로버문고’ 시리즈에는 수많은 작품들이 소장형 문고판으로 출시되어 수집하기 좋게 제작되었는데, 히트작 다수가 상당한 표절 요소를 담고 있다. 시리즈를 시작한 [유리의 성]이든, 가장 유명해진 [바벨 2세]든, [우주여객선]이든 일본 히트작을 고스란히 한국 작가를 내세워 다시 그린 표절작이다.

다만 계속된 작업 과정에서 그림체의 방향이 달라지고, 한국 상황에 번안하는 과정에서 줄거리와 정서가 조금씩 달라지는 등 표절 위에 고유한 창작이 덧붙여지려는 몇가지 단초가 발견되었다. 야부키 죠는 장렬하게 산화했지만, 표절작의 백만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판이 점차 발달함에 따라서, 작품 전체를 베껴오는 전면적 표절 너머, 요소별 표절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즉 제작자 또는 창작자가 원작의 매력적인 어떤 요소를 베껴오되 나머지 이야기는 자유롭게 새로 만드는 부분적 표절이 고개를 든 것이다. 하나의 이유는 물론 히트작의 연장을 위해서다. 예를 들어 [바벨 2세]의 성공을 보고는 한국의 어떤 출판사는 속편으로 계속 인기를 확장시켜가고자 했고, 따라서 그들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최대한 논리적인 아이디어인 [바벨 3세]를 생각해내고는 작가를 기용했다. 캐릭터 표절, 그들이 구사하는 초능력 소재들에 대한 표절은 명백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비록 이전 이야기들의 변형과 재탕이라고 할지언정 기본적으로 창작해내야 했다. 어떤 면에서는 표절이라기보다는 오늘날의 동인 창작에 가까운데, 오마쥬가 아니라 고유 창작으로 포장되었다는 점에서 표절이라는 명찰을 떼기는 어렵다.

그런 부류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경우는 [로보트 킹] 연작인데, 가장 전면에서 눈길을 끄는 매력요소인 주인공 로봇의 디자인은 명백하게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자이언트 로보 2호’에서 가져와 변형시킨 것이다. 그리고 당시 모두들 그랬듯 영감의 출처를 지운 만큼, 캐릭터의 표절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당대 SF 장르의 소재와 주제들을 독창적으로 소화해낸 쪽에 가까웠기에, 2000년대에 이 작품이 복간될 당시 독자들 사이에서 표절과 독창적 의의에 대한 여러 논쟁이 벌어졌던 바 있다.

그런데 캐릭터 표절의 전성기는 역시 1980년대 콩콩 코믹스의 ‘전성기’ 작가로 대표되는 일련의 트렌드였다. 성운아, 전성기 등의 필명을 내세워서, 출판사는 일본 인기작들의 사실상 단순 복제라고 할 수 있는 표절작들을 출판하고 큰 인기를 구가했다. 이들은 두껍고 눈에 잘 띄는 원색 표지를 넣고 몰입도 높은 만화를 양산했는데, 처음에는 권법을 소재로 하는 소년만화 [철권 친미]를 토시하나 고스란히 가져온 [쿵후소년 용소야], 그리고 [일격전]을 가져온 [권법자]에서 성공가도를 시작했다. 두 작품 시리즈의 성공에 고무되어 더욱 사업을 넓히고 싶은데, 두 작품의 인기에 제대로 편승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해답은 80년대의 대본소 만화방에서 새롭게 인기세를 몰고 있던 성인극화류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인기 캐릭터를 마치 특정 주연배우처럼, 서로 전혀 무관한 다른 작품에 고스란히 다시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애초에 온전한 자기 창작이 아니라 표절작으로만 장사를 하면서 그런 방법을 어떻게 쓸 것인가. 간단하게도, 새 작품을 가져오면서 캐릭터의 얼굴만 원래의 히트 캐릭터로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근대 이전 중국의 권법가인 친미는, [브레이크샷]의 표절작인 [나인볼 황제 용소야]에서 당구의 황제가 되었다.

90년대가 시작되고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조금씩 진전되면서, 주로 일본만화를 출처로 하던 만화계의 표절작 관행은 일종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굳이 작가를 동원해서 표절작을 만들지 않아도 정식 라이센스 판본을 낼 수 있는 경로가 생겨났다. 반대로, 그냥 자유롭게 해적판을 출판해서 게릴라식으로 문방구에 보급하고 사라지는 불법적 행태 또한 인기를 끌었다. 그 와중에서 전면적 작품 표절이나 캐릭터 표절보다는, 좀 더 세밀하게 소재 표절을 하는 관행이 두각을 나타냈다. 즉 명백한 표절보다는 캐릭터 도용에 의한 저작권 침해, 멋진 장면이나 연출에 대한 출처를 은폐한 베껴 그리기 등이 좀 더 눈에 띄이게 된 것이다(후자는 아예 선을 고스란히 베낄 경우 ‘트레이싱’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한 때는 멋진 구도를 만화로 구사하기 위한 용인된 기법처럼 여겨졌으나 점차 저작권 침해라는 본질적 요소가 부각되어 표절의 일종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소년챔프의 창간 초기 인기작인 [스트리트 파이터 III]은 당대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오락실 게임인 스트리트파이터2의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나와서, [드래곤볼] 초반을 연상시키는 방식의 개그 격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환기의 특징은, 새로운 관행과 함께 여전히 구시대의 관행도 공존한다는 것이다. 유명 만화가가 당대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소년만화잡지에 연재했던 [Y세대 제갈공두]는, 알고보니 [크레용신짱]의 성인스러운 아이 캐릭터와 가족구도, 개별 에피소드들을 내용을 고스란히 베낀 표절작이었다. 한 5년 전에만 이런 일이 생겼더라면 여타 수많은 표절작 사이에서 그저 평균으로 묻혔겠지만, 90년대는 PC통신으로 전국각지에서 열성 만화독자들이 동호회를 만들고 자신들끼리, 그리고 출판사 담당자와도 의견과 정보를 교류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제갈공두]는 그런 환경 속에서 갑작스러운 조기 연재 종료를 맞이했다.

물론 만화계의 표절에 대해서는 이미 70년대에도 개탄의 목소리가 일각에서 이뤄졌지만, 만화가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워낙 대중적으로 희박하였기에 화제를 만들어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1991년 [제국의 함대] 사건은 그런 트렌드가 바뀌어감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한 인기 대본소 만화 작가(즉 제작사)가 내놓은 [제국의 함대]라는 선 굵은 인기작이, 사실은 일본만화 [침묵의 함대]의 전체 표절작임이 일간신문들에 기사화되었던 것이다. 표절 사실의 자료 수집과 비교는 PC통신의 만화동호회에서 이뤄졌던 것이었고, 결국 작가가 자신의 개입 여부를 부인하는 등 회피에 나섰다. 이 사례 또한 5년전만 하더라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여졌을 만한, 원작을 좌우반전 복제하고 그 위에 캐릭터 얼굴을 자기 그림체로 새로 그려 넣는 방식이었다.

만화가 진지한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의 보급, 대중의 집합적 감시의 눈이 한층 매서워지는 미디어 진화, 저작권과 창작의 고유성에 대한 점진적 의식 향상 등에 힘입어서, 90년대를 거치며 만화에서 표절은 마침내 “일반적 관행”에서 “부끄럽고 단죄할 사례”로 바뀌어나갔다(인기만화 [원피스]를 노골적으로 표절한 게임 [와피스] 사례에 대한 대중의 열띤 조롱이 좋은 예다). 그 와중에서 낙인이 남용되어 유사한 모습만 발견되면 아류작 수준이기만 해도 무조건 법적으로 단죄해야할 수준의 완전한 표절로 몰아붙이는 반작용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표절 사례가 줄어들거나 최소한 표면에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향으로 왔다. 오늘날 만화 표절이 뿌리 뽑힌 것은 물론 아니고 앞으로도 완전히 없어질 것은 아니겠지만, 참여와 노력 속에 나름 발전이라는 것이 있었음을 조금은 자랑스러워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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