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예찬: 박쥐 옆에 개똥지빠귀

!@#… 2002년 가을 정도, 이라는 괴(?) 동인지가 나와서, 코믹 행사에 부스까지 내서 판매된 적이 있다. 아주 드물게도 – 아니 제가 기억하는 한에서는 최초의 – 미국만화 전용 동인지였던 것이다! 미국만화 정보 사이트 카투넷의 운영자 Majorglory님의 주도하에 여러 작가들과 필자들이 참여했다…심지어 형민우, 강찬호님 등 프로 작가들도 다수. 미국식 이슈 판형을 염두에 둔 편집이 빛나는, 지금은 레어 아이템. 여하튼, 그 지면에 기고했던 글. 2호가 나오면 <영웅이라면, 스판덱스다!>라는 글을 기고하겠다고 미리 아이디어까지 다 잡아놨지만… 2호는 나오지 않고 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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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예찬: 박쥐 옆에 개똥지빠귀

  2001년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1,2선발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을 두고, 한국의 각종 일간 찌라시들은 ‘원투펀치’라는 정체불명의 별명을 달아주었다(야구의 권투화?). 하지만 미국 현지에서 이들을 부르는 진짜 별명은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랑스러운 “Dynamic Duo”다! 뭐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Dynamic Duo라는 것은 바로 ‘배트맨과 로빈’을 칭하는 말이다. 슈퍼히어로계의 전설, 궁극의 2인조팀의 별명을 부여받은 두 투수들에게 영광이 깃들기를.

  배트맨과 로빈은 톰과 제리, 콩쥐와 팥쥐 만큼이나 ‘and’가 어울리는 대명사가 되어있다. 배트맨 하면 로빈이 저절로 떠올라야 하는 것이 순리라는 듯이 말이다. 원래 밥 케인이 배트맨을 처음 만들었을 때에는 배트맨은 펄프 문학이나 라디오 드라마(이 중에는 한참 나중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쉐도우‘도 있다)의 인기장르였던 느와르 풍 범죄 수사물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배트맨은 트렌치코트 대신에 망토를 두르고, 중절모 대신 가면을 쓰고 있을 뿐 원래는 ‘탐정’이었다. 그리고 그 장르의 관습들을 적극 차용해 들여오다 보니, 자연스럽게도 배트맨은 다른 슈퍼히어로들보다 꽤 하드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 주류 만화에서 슈퍼 히어로 장르가 점점 강력한 위세를 떨쳐나가면서, 배트맨 시리즈도 느와르풍보다는 뭔가 ‘히어로물 다운’ 이미지들을 적극 도입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우선은 그 어둡고 하드한 범죄수사 이미지를 벗고, 화려한 액션과 색감의 향연을 펼칠 수 있도록 배트맨에게 또다른 반쪽을 붙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짜잔! 그리하여 로빈이 탄생했다. 때는 1940년, Detective Comics#38호였다.

  로빈은 배트맨의 파트너이자, 모든 면에서 배트맨에 대한 반대말이다. 배트맨을 표현하는 이미지가 중년, 까다로움, 진지함, 신중함, 좋은 체구, 흑청색 계열의 단색 등이라면, 로빈은 청년(혹은 ‘소년’), 경솔함, 대범함, 작은 체구다; 그리고 어둠의 피조물 배트맨과는 정 반대로 빨간 웃통과 초록색 바지, 노랑 망토를 휘날리는, 걸어 다니는 색칠공부 같은 녀석이다. 박쥐와 개똥지빠귀. 당연히 대단히 부조화를 이루며 작위적인 느낌을 줄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파트너쉽이 그렇게도 최강으로 꼽힐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로빈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어두운 배트맨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저스티스 리그 아메리카같이 단지 다양한 캐릭터들을 골고루 크로스 오버 출연시켜서 마케팅하기 위한 조합이 아니라, 파트너쉽을 만들기 위해서 아예 상대 배역을 만들어낸 것이다. 마치 슈퍼맨의 애인역할이 되기 위해서 탄생한 로이스 레인처럼 말이다.

  배트맨 최상의 파트너이기 위해서 탄생한 로빈. 배트맨과 로빈은 단순한 업무상의 파트너 이상으로, 마치 중년 아버지와 청소년 아들에 가까운 가족급 관계를 보여주기도 하는, 서로 끈끈히 연결되어 있는 파트너다. 특히 배트맨의 지나치게 초인적이고 빈틈없는 능력에 대해서 일종의 핸디캡으로서 작용해준 덕분에, 로빈은 배트맨의 극적 긴장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로빈은 슈퍼 히어로의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보다 ‘인간적’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정겨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트맨 만화를 가장 열성적으로 보는 독자층인 ‘소년’들의 대변자 아니던가! 여하튼, 로빈이 배트맨의 파트너가 되어준 덕에 스토리들에는 더욱 다양한 인간적 긴장관계가 저절로 도입된 셈이 되었다.

  물론 파트너쉽이라는 것은 대단히 미묘한 관계다. 특히 범죄수사물을 기반으로 시작했던 만큼, 비중있는 ‘우리편’ 여성캐릭터가 없는 상태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게다가 로빈의 주요 역할(?) 가운데 하나가 악당들에게 납치 당해서 배트맨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점점 심각해진다. 여기에 더하자면, 로빈 – 혹은 딕 그레이슨 – 은 서커스 공중곡예단이었던 부모들이 살해당한 후, 브루스 웨인네 저택에 입주해서 눌러앉아 동거생활을 하게 된다. 이 모든 단서들을 다 더해보고도 배트맨과 로빈의 관계가 동성애 코드로 읽히지 않는다면 오히려 신기한 일일 것이다. 필자같은 건전무쌍한(-_-;;;) 사람도 그런 결론에 달하고 있는데, 눈에 불을 켜고 트집을 잡고자 하는 당시의 검열주의자들에게는 오죽했으랴… 짜잔~ 그리하여 ‘배트걸’이 탄생했다. 여하튼 우리편에 여자도 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배트걸의 도입은 로빈에게 있어서는 물론, 배트맨 시리즈 전체에 있어서도 사실은 백해무익했다(무슨 유치원 교사가 남녀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가는 것도 아니고…). 배트걸이라는 작위적인 캐릭터는 로빈이 맡고 있던 여러 역할들을 잠식해 들어갔고, 배트맨과 로빈의 파트너쉽이 뿜어내던 조화나 호흡은 사정없이 깨졌다. ‘Dynamic Duo’는 깨지고, ‘Dynamic Trio’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한 상태로 극적 긴장만 해친 꼴이 된 것이다. 배트맨은 배트맨대로 계속 나름의 입지를 지니고 돌아다녔지만, 배트걸은 로빈을 감싸안고 자폭한 꼴이 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배트맨의 인기와 작품적인 잠재성을 극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80년대 이후의 재해석에서 로빈의 역할은 점점 더 격하되어 왔다(뭐 배트걸은 거의 완전히 무시당해버렸지만 말이다). 어디, 배트맨 ‘공식 스토리라인’를 한번 살펴 보자. 딕 그레이슨은 배트맨 스토리 안의 시간으로 6년간 파트너를 하다가, 한번 거의 죽을뻔 한 후 브루스가 그의 안위를 걱정, 팀을 깨버렸다. 그레이슨 군은 현재는 ‘나이트윙’이 되어서, 여전히 영웅질을 하고 있다. 뭐, 일종의 다 큰 자식 자립시킨 꼴이지만, 여하튼 이제는 어엿한 DC 세계관의 일원이 되어있다. 이 다음에는 제이슨 토드라는 녀석이 배트맨 자동차(배트모빌)의 타이어를 훔치려다가 2대 로빈으로 등극한다. 그리고는, 2년 정도 활동하다가 조커에게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그리고 지금은 팀 드레이크라는 녀석이 21세기형 3대 로빈을 맡고 있는데… 이 녀석은 14세, 말 그대로 ‘애’다! 컴퓨터 능력도 출중하고… 더더욱 파트너라기 보다는 꼬마 조수, 마스코트처럼 격하되고 있다. 정사는 아니지만, 배트맨 세계관 재해석의 신호탄을 날린 프랭크 밀러의 명작 ‘The Dark Knight Returns’에서도 로빈이 죽어 없어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배트맨은 은퇴상태로 중노년에 돌입. 그리고 당돌한 고등학생 아가씨(!!!) 캐리 켈리가 로빈을 자청하고 나선다. 아, 그러고 보니 DKR의 후속편인 ‘The Dark Knight Strikes Back’이 최근에 시작되었는데, 캐리 켈리는 여기서 캣 우먼으로 전업을 했다고 전해들었다(이런…-_-;). DC 세계관의 종합선물세트 ’Kingdome Come‘에서도 배트맨은 독자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이래저래, 한때 배트맨의 위풍당당한 파트너였던 로빈은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툭하면 죽고, 무시당하고, 없어지고, 바뀌고…

  아, 물론 배트맨의 가장 강력한 매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어두움과 음험함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그 지점들을 상당히 좋아한다; Arkham Asylum에서처럼 누가 광인이고 누가 정상인인지 혼란스러워 하는 광기, 그것은 배트맨 시리즈에서만 가능한 재해석이다. 음험한 광기는, Joker니, Two-Face니, Mad Hatter니, Dr.D니, Scarecrow니 등등 워낙 잘 만들어진 수많은 미친 악역들을 통해서 전달할 수도 있다. 게다가, 배트맨 아저씨의 더러운 성깔머리도 만만치 않게 어둡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오히려 이쪽으로만 너무 흘러오다 보니, 배트맨에서 몸과 몸이 부딪히는 화끈한 액션, 곡예성 스턴트들이 너무나 매말라버렸다는 것이다. 더 이상 그다지 ‘Dynamic’하지 않다는 것이다. 화끈한 액션활극 + 수사극 + 슈퍼히어로 모험의 풍미가 담겨있던 한 시대의 향수는, 역시 로빈이라는 캐릭터를 다시금 그리워하게끔 만든다. 로빈과의 파트너쉽을 통한 뜨거운 남자들간의 로망을 왜 무시하냔 말이냐! ‘dynamic duo’라는 옛 모토를 다시금 강조하는, 진짜 ‘구식 그대로의’ 배트맨 어드벤처를 한번쯤 다시 보고 싶어진다.

  필자가 지금 진짜로 보고 싶은 배트맨 재해석은, 배트맨과 로빈이 우정과 연애감정의 가느다란 경계 위에서 위태로운 곡예타기를 하는, 므흐흐한 물건일지도 모른다(동인들이여! 달려들기를!). 아니면 ‘영웅본색’ 같은 오우삼 영화에서나 보는 끈끈한 남자간의 애증과 파트너쉽의 뜨거운 스토리를 보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앞으로도 ‘배트맨의 숨은 균형추’ 로빈이 맡아야 할 임무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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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네이버 덧글 백업]
    – None – 후문이지만 3대로빈인 팀드레이크는 배트맨 비욘드의 조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04/09/30 1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