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배트맨 관련… 인데, 앞으로 아캄어사일럼이나 킬링조크 같은 당연히 다루어줘야 할 만한 물건들이 한국어판 나오면 그때 가서 또 어쩔 수 없겠지. -_-;
탐정과 형사 – 『배트맨: 이어원』
김낙호(만화연구가)
특정한 작품 속 캐릭터와 세계관의 기원을 탐구하는 이야기가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애초부터 원래의 작품이 충분히 흥미를 끌었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이 소수만을 위한 비인기작이었다면 ‘실마릴리온’은 작가의 창작노트에 불과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설정으로 해당 작품에서 바탕에 깔고 있던 이야기를 풀어주는 것에 불과하다면, 마찬가지로 아무런 메리트가 없다. 그렇기에 두 번째 조건, 바로 기원 자체가 캐릭터와 세계관에 대한 재해석이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와 캐릭터에 과거를 부여함으로써 현재 모습 이면에 있는 동기들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틀어주는 과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기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가장 본질적인 매력요소를 다시 파내야하며, 더욱 깊숙하게 과거와 현재를 이어가는 고리들을 만들어야 한다. 일종의 리버스 엔지니어링이 필요한 셈인데, 때로는 작가 자신의 처음 의도를 넘어서는 부분까지도 고도의 이해력이 필요한 만큼 기원 스토리는 성공보다는 실패사례가 더 흔하게 눈에 띄곤 한다. 반면에 ‘대부2’에서 볼 수 있듯 기원 스토리와 현재의 모습들이 제대로 엮여 들어가면, 시대의 명작이 탄생한다.
『배트맨: 이어원』(프랭크 밀러 글, 데이빗 마주켈리 그림 / 곽경신 옮김 / 세미콜론)은 슈퍼히어로 만화 장르의 손꼽히는 명작 가운데 하나로, 기원 스토리의 모범이다. 80년대말, 수십년간 진지한 모험물에서부터 키치적 TV시리즈까지 갖은 방식으로 소진된 배트맨 시리즈에 의미를 부여하여 재탄생시키는 기념비적 작품 두 개가 등장했다. 하나는 배트맨의 후일담을 그려내는 『다크나이트 리턴즈』고, 다른 하나가 바로 기원을 다루는 『배트맨: 이어원』이다. 두 작품 모두 희극적 모험물로 변모한 배트맨 시리즈를 강렬하고 거친 범죄극으로 돌려놓았던 바 있는데, 전자가 성인취향의 폭력적 활극과 사회풍자에 집중한다면 후자는 사회정의에 관한 절제되고 진지한 느와르를 표방한다. 작품의 줄거리는 부모를 눈 앞에서 살해당한 억만장자 청년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라는 자경단 활동을 시작하는 과정, 범죄와 타협하지 않고자 하는 고든 경찰 부서장이 고담시에 적응하여 자신의 방식을 정착시키는 과정 등을 그려내고 있다. 즉 사회의 불의라는 조건을 직면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수단을 총동원하여 개인으로서 활약하는 탐정으로서의 배트맨, 그리고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공권력을 올바른 방식으로 리드하여 범죄를 소탕하는 형사로서의 고든, 두 사람의 이야기다.
『배트맨: 이어원』은 느와르라는 장르를 선택하여, 슈퍼히어로물 특유의 초인들의 활극이라는 요소보다는 범죄라는 소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범죄자들 역시 초능력으로 세계를 혼란시키고 지배하려는 이들이 아니라, 돈으로 엮인 부패와 조직적 폭력이다. 이것은 사실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와 고담시라는 세계관이 처음 나왔을 때 ‘탐정물’이었다는 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맞서는 싸움보다, 악의 음모를 파헤치는 수사와 그 과정의 인간군상에 초점을 두는 이야기였던 셈이다. 그런데 범죄도시 고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작품은 한층 과감한 선택을 한다. 바로 작품의 절반, 아니 내용적으로는 그 이상을 바로 탐정 배트맨이 아닌 형사 고든에게 할애한다는 것이다. 배트맨의 경찰 측 협력자이자 히어로가 악당을 때려눕히면 마지막에 도착해서 범인을 인도하는 극적으로 미미한 역할에 머물곤 했던 고든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마치 옛날의 거대 로봇물에서 주인공 로봇이 출동하기 전에 적당히 부숴지곤 하는 역할인 지구방위대에 초점을 맞추는 격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자경단 탐정인 배트맨과 공권력의 형사 고든이 대등하게 다루어짐으로써 사회정의 추구에 대한 양면적 접근은 비로소 탄탄하게 완성된다. 개인의 무력으로 뒤집기에는 범죄의 조직력이 너무 강하고, 공권력만으로 대항하기에는 관료성이나 집단 내의 부패 등 경직된 부분에 대처하기 쉽지 않다. 악으로 물든 세상에 개인으로써 분연히 일어나는 이와 공권력의 문제를 내부에서 개혁하며 치안을 구축하는 이의 팀플레이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도시를 지배하는 범죄에 맞설만한 힘이 된다. 그리고 같은 사회정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강력한 유대감은, 혈맹이라든지 하는 무의미한 수사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만들어낸다.
기원 이야기로서 이 작품은 그들이 자신들의 길을 선택한 결심의 과정을 그려내기 때문에, 이미 완성된 것을 넘어 아예 아이콘화된 캐릭터에서는 느끼기 힘든 인간적 매력이 가득하다. 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인지 처음 궁리하고 고민하는 배트맨과 고든의 모습에는 번민이 넘친다. 그리고 작품의 끝에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내적 갈등이 치유되고, 결의가 다져진다.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시피, 『배트맨:이어원』은 ‘다크나이트’ 신드롬을 일으킨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판 배트맨 시리즈가 표방하는 방향성의 모태가 된 작품이다. 여기에는 초인적 능력자들이나 신비주의가 빠지고, 대신 암울한 범죄도시의 들끓는 욕망의 바다에서 스스로 반항적으로 일어선 이들이 있다. 원래 이런 접근은 스토리를 담당한 프랭크밀러의 장기이기도 한데, 이 작가 특유의 마초적 과잉으로 빠져들지 않고 차분한 톤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바로 고든이라는 이례적일 정도로 이성적인 캐릭터의 역할이다. 그는 무력도 쓸 줄 알고 정의감도 넘치지만, 기본적으로 가족형 인간이고 법의 테두리를 지키는 공무원으로서의 의식이 있는 상식인이다. 그의 존재 덕분에, 배트맨 역시 질주하는 초법적 정의의 화신이 아니라 범죄를 소탕하는 해결사의 역할로 자제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림작가 마주켈리의 부드러운 곡선은 암울한 이야기의 어둠침침한 비주얼 속에서도 어떤 인간성의 풍미를 섞어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모든 접근이 다 성공적이지는 않다. 예를 들어 작품 속에는 배트맨 시리즈 궁극의 팜므파탈인 ‘캣우먼’의 기원도 이야기하지만, 도덕적 모호함, 피해자와 가해자의 흐린 경계가 가장 큰 매력인 캐릭터의 기원으로서 무력을 갖추어 자경단화하는 창부의 이야기라는 것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또한 훗날 투페이스라는 악당이 되는 덴트 검사의 정의로운 나날들의 이야기도 훗날의 파국에 대한 복선 없이 낭비되는 감이 있다. 이렇듯 배트맨-고든이라는 투톱구도 이외의 부분에서는 섬세함이 부족한 셈이다.
한국어판은 원서의 완전판을 기준으로 하여, 부록으로 원화 스케치, 배트맨 시리즈에 대한 작가들의 생각을 담은 단편들 등 매력적인 보조자료가 빼곡하게 들어있다. 특히 배트맨의 기원을 재해석하는 과정, 만화에 대한 자신들 및 사회적 인식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든 종류의 대중문화 애호가들에게 있어서 필견이다. 번역은 좀 더 거친 말투들이 잘 살았더라면 좋았겠지만, 너무 과장해서 거친 말투를 하다가 오히려 거리감을 만드는 폐단을 감안할 때 만족할 만한 수준이다. 게다가 다행히도 핵심이 되는 배트맨과 고든 만큼은 원래부터 정중한 말투의 소유자들이니까 말이다.
정의는 히어로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탐정과 형사의 결의가 한 방향을 향해서 힘을 합칠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배트맨: 이어원』은 이렇게 해서 배트맨의 세계에서 범죄를, 정의를 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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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배트맨 이어 원 데이비드 마주켈리.프랭크 밀러 지음, 곽경신 옮김, 리치먼드 루이스 그림/세미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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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back by gorekun's me2DAY
고어핀드의 생각…
캐릭터와 세계관의 기원을 탐구하는 이야기가 흥미를 끌기 위해서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은, 원래 작품이 충분히 흥미를 끌었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두 번째 조건, 기원 자체가 캐릭터와 세계관에 대한 재해석이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바람의 검심 추억편 얘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