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쟁이 늙은이의 거친 정의에 관하여 – 다크나이트리턴즈

!@#… 세미콜론에서 최근 한국어판을 출판한 ‘다크나이트 리턴즈’는, 이 블로그 오시는 분들 가운데 눈치챌만한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꽤 일찌감치 작업이 끝났으나 출시가 늦어졌던 책. 출판사와 작가의 불필요한 까다로움과 느린 소통 덕택이었는데(그러니까 마블한테 계속 발리지), 게다가 책에 미국판 단행본에 들어간 것 이외의 사항을 현지에서 추가하는 것도 결국 반대했다. 덕분에 출판사가 성심성의껏 준비했던 책내해설이나 캐릭터 정보 등이 최종출판물에서 제외되고, 그냥 온라인상에서 공개. 그리고 이왕 공개한 김에 여기에도 살짝. 뭐 여튼, 책내서평인 만큼 책 읽으려는/읽은 사람에게 뿌듯함을 주는 것(+더욱 열심히 읽도록 동기부여)이 주 목표.

 

한 고집쟁이 늙은이의 거친 정의에 관하여

김낙호 (만화연구가)

『배트맨: 다크나이트 리턴즈』는 한국에 20년은 너무 늦게, 하지만 배트맨의 후일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너무 일찍 찾아왔다. 하지만 어떤 시차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 이 작품을 읽을 때 재미를 주고 항상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는 것은, 이 작품이 무엇보다 배트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둠의 정서, 기사의 거친 모험 활극, 그리고 항상 다시 돌아와서 일을 처리하는 고집까지 말이다. 비록 전성기를 훌쩍 넘긴 노년의 배트맨이라 할지라도, 떨어지는 신체능력은 더욱 강렬한 의지로 상쇄되어 오히려 작품의 핵심을 더욱 공고하게 해준다.

사실 배트맨은 엄밀하게 말해서 슈퍼히어로라기보다, 슈퍼히어로들과 맞먹는 능력을 발휘하는 그냥 히어로다. 그의 근원은 나중에 DC코믹스의 어원이 된 Detective Comics 시리즈에 있고, 그 뜻 그대로 ‘탐정’이다. 그는 어떤 선한 의지의 상징체가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자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자연 재해나 외계에서 온 초월적 악의 현신과 종종 싸우는 슈퍼맨과 달리, 배트맨의 숙적들은 거의 항상 범죄자들이다. 그의 무기는 초월적 힘이 아니라 돈으로 개발한 장비, 단련된 신체와 지능이다. 슈퍼맨보다 딕트레이시에 가까웠던 그는, 애초부터 하드보일드 탐정물 장르의 유행과 새로 부상하는 슈퍼히어로물 사이의 혼성으로 탄생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주류 만화 산업에서 슈퍼히어로물은 끝없이 성장했고, 배트맨 역시 탐정보다는 전신 스판 액션 캐릭터로서의 속성이 점점 더 강조되었다. 그리고 장르에서 요구하는 다양한 이입의 재미를 위해 조력자들이 자꾸 붙어나가면서 고독한 느와르 히어로가 아니라 대가족의 가장이 되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한 출판사의 여러 작품들이 하나의 세계를 만들게 되면서, 초월적 힘을 지닌 진짜 슈퍼히어로 친구들과 어울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배트맨은 점점 더 부족해졌다. 별다른 힘도 없는데 고담시의 범죄가 아니라 지구와 우주의 평화를 지키는 판에 자꾸 끼어들어야 한다니, 얼마나 애매한가. 그렇게 해서 80년대 중반까지, 배트맨은 스스로의 매력을 잃어갔다.

그때 등장한 작품이 바로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다. 이 작품은 배트맨의 새로운 발명이라기보다, 발랄한 모험극 속에서 희미해졌던 배트맨의 원초적 속성을 재발굴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늙어버린 노년의 배트맨이라는 파격적 설정으로, 오히려 가장 처음의 배트맨을 끌어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프랭크 밀러가 재발견한 배트맨은 인간과 다른 종들과 어울려 시간을 허비하는 모험가가 아니다. 초월적 힘을 지닌 정의의 사도이기 이전에, 내 동네를 어지럽히는 악을 뿌리 뽑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파수꾼, 자경단으로서의 히어로다. 숙명이 아닌, 의지와 고집의 화신이다. 그런 속성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작품 속에 같이 등장하는 슈퍼맨, 아니 ‘켄트’다. 공공선을 위해 움직이는 슈퍼맨은 가장 포괄적 조직과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라면 스스로 정치가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최소한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게 된다. 그러니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 시스템인 미국 연방정부의 하수인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하지만 그런 슈퍼맨을, 박쥐 의상을 입은 노회한 탐정은 가볍게 비웃는다. 고집쟁이 늙은이는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힘을 모은다. 그리고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땅의 질서를 위협하는 모든 공격을 거칠게 제압한다. 주먹을 쥐고 스스로를 지키는 미국식 정통 ‘보수’의 얼굴이다. 그 속에서 정의로운 개인의 각성을 읽든, 또 다른 파시즘의 씨앗을 읽든 독자의 자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진장 ‘폼’ 난다는 것이다.

의외로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배트맨의 세계 속에서 번외 편에 가까운 이야기다.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미래를 다루었으며, 하다못해 현재 진행의 일부로서 미래를 엿보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나아가 『킬링 조크』의 사례처럼 나중에 이야기 요소의 일부가 현재의 이야기로 편입된 경우도 아니다. 즉, 그냥 배트맨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상의 미래를 다룬 한 작품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맨 시리즈의 방향을 크게 바꾼 영향력 면에서는 그 어떤 작품보다 중요하게 꼽힌다. 아니 슈퍼히어로물 전반의 방향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을 정도다. 배경에 스며들어 있는 노골적인 현실 정치적 색채, 마치 프로레슬링처럼 양식화된 타격기가 아니라 거칠고 강건한 액션 스타일, 슈퍼히어로의 역할과 의미를 들쑤시는 자기 성찰 등이 만들어내는 깊이 있는 재미는 명품 급이다. 이런 시도들은 각각의 요소별로는 이전에도 없지는 않았지만(예를 들어 70년대 데니스 오닐-닐 아담스 콤비의 배트맨 작업들도 어두운 분위기의 재발견에 큰 부분을 할애했다), 이 모든 것을 장르적 즐거움 속에 모두 녹여내면서 대중적 인기까지 얻어 큰 전환점을 마련해준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TV 방송의 교차편집, 풍부한 슬로우 모션, 박력 있는 편집 등 만화 연출력 역시 뛰어나서, 같은 해에 발표된 영국의 『워치맨』과 함께 만화라는 장르 자체의 활기를 새로 넣어준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만화를 좋아하는 것은 다시금 ‘쿨한’ 취향이 되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적당히 그늘진 슈퍼히어로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지금, 이런 시도가 시대의 흐름과 함께 힘을 잃었을 법한데도 불구하고, 정작 이 작품만은 오늘날 다시 봐도 여전히 힘이 넘친다. 비단 세계적인 정치현실이 다시 보수주의의 물결로 뒤덮였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힘으로 스스로를 지킨다는 고집불통 노인의 의지가 주는 울림 덕분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멋진 만화적 스타일, 장르 팬들과 일반 독자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긴장감 넘치는 표현력이 있다. 개인의 힘으로 날아다니며 거칠게 몰아치고, 같이 일어선 사람들로 자경단을 조직해서 악을 처단한다. 정치적 타협도 없고 포기도 없다. 자고로 세계 최악의 대도시 고담시의 범죄와 싸우는 세계 최고의 탐정인 배트맨이라면, 역시 이래야 한다니까. ***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 1
프랭크 밀러 외 지음, 김지선 옮김/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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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oughts on “고집쟁이 늙은이의 거친 정의에 관하여 – 다크나이트리턴즈

Trackbacks/Pings

  1. Pingback by 모기불통신

    자고로 배트맨이라면….

    고집쟁이 늙은이의 거친 정의에 관하여 – 다크나이트리턴즈 를 읽고 무진장 공감해부럿다.

    아니 글쎄 배트맨이라면 자고로 이래야지 조커가 다칠까봐 오토바이로 치지도 못하는 샌님 배트…

Comments


  1. 착각이었군요. 서점에 꽃혀있는 다크나이트 리턴즈를 지나가며, 지름신을 물리쳤다고 생각한것은.

  2. 끝에서 두번째 문단 세째줄
    나 아가 ==> 나아가
    30여초를 헤매고서야 의미파악을….

    여튼 요즘 히어로물들이 잘 팔려서 기분이 좋아요. 저변이 형성되면 다양한 한국식 히어로물들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네요.

  3. !@#… 모과님/ (아니 이 무슨 괴이한 오타가…;;; 수정 들어갑니다) ‘한국식’ 히어로물의 단초들은 사실 이미 시작되었죠. 강풀의 ‘타이밍’이라든지, 네스티캣의 ‘트레이스’라든지… 게다가 사실 무협지들이야말로 은근히 슈퍼히어로물과 가까운 만큼, ‘서울협객전’ 같은 이유없이 저평가된 작품도 주목할만 합니다. 단! 역시 스판을 좀 입어줘야 하는데…;;;

    nomodem님/ 서점 서가보다, 자기 서가에 들어 있는 것이 더 흡족해지는 책이죠. :-)

  4. 어허 캡선생님.

    워치멘과 같은 반열에 올라갈수 있는 , 시민쾌걸(대한민국황대장은 개인적으로 논외)을 상기하셔야죠,

  5. !@#… nomodem님/ 이럴수가, 시사만화 시민쾌걸을 빼놨군요. (그러고보니 황대장은 스판까지 이미 구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