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2004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스크롤의 압박. (여담: 소제목은 대부분 편집부에서 뽑아주셨는데, 저보다 훨씬 감각이 좋으셨다는…)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이쪽 지면 통해서 시사만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계속 꺼내볼 예정입니다.
(주: 도판의 만평 개재일은 인터넷판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따라서 종이신문과는 1일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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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택 만평의 한계:
가상의 서민성과 음모론의 유통기한
김낙호 (만화연구가)
십수년 간 1면에 배치된 김상택의 시사만화
필자는 대한민국 신문들의 독자 길들이기 음모를 싫어한다. 그들은 능숙한 지면배치와 화려한 편집술로 첫째 면부터 마지막 면까지의 흐름을 주도면밀하게 쥐고 흔들어서, 독자들의 사고를 자신들의 ‘객관적이고 공평하다는 정론’으로 마비시킨다. 이런 놀라운 깨달음을 얻은 바, 결코 신문을 페이지 순서대로 읽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어느 날 오랜 고민 끝에, 그냥 가장 읽기 쉽고 재미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신문독서법을 개발해냈다. 바로, 시사만화부터 보자! 득의양양하게 미소짓는 필자였으나, 알고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었다. 허탈하기는 하지만, 뭐 그만큼 시사만화의 힘이 보편적이고도 강력한 것이라는 사실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진 셈이었다.
매우 원론적인 질문부터 해보자: 도대체 시사만화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보자면, 시사를 다루는 만화일 것이다. 하지만 한 시대의 창작물치고 그 시대의 세상사, 즉 ‘시사’를 크게 또는 작게라도 다루고 있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하지만 굳이 장르로서 시사만화라는 구분을 만들어 낸 것은 어느 특정한 부류의 만화들이 시사라는 분야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특화되었고, 이를 위한 나름대로 체계화된 서술방식을 갖추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시사만화는 영어명칭인 Editorial Cartoon(논평 만화)에서 드러나듯이, 단지 소재로서의 시사가 아니라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사설으로서 기능하는 만화 장르다. 즉 현존하는 시사만화 장르의 가장 큰 뿌리이자 본질은 일반적 서사 예술이라기 보다는, 언론 논평이라는 말이다. 시사만화의 미덕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두 가지 가치인 ‘촌철살인의 풍자’와 ‘기발한 해학성’을 가미하여 만화언어 – 즉 이미지로 구성된 서사형식으로 사설의 내용을 표현해내는 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시사만화라는 장르의 정체다.
필자 같은 의심많은 독자들이 많아서인지, 한국의 신문들은 그들의 얼굴격인 1면에는 주로 ‘주장보다는 팩트’를 보여주면서 시작해야한다는 의식이 있다. 비록 그 팩트의 선정과 묘사방법 자체가 이미 충분한 자기주장인데도, 심지어 캠페인의 경우마저도 보도기사의 형태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무려 만평임에도 불구하고 경향신문 시절부터 2003년 9월 20일까지 십수년간 1면에 배치된 바 있는 시사만화가 있으니, 바로 김상택의 만화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시사만화는 사설의 일종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김상택 만평은 그만큼 신문으로부터 특별한 – 즉 독자들에게 팩트에 준할 정도로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질 만하다고 여겨지는 – 코너로 대접 받은 셈이다.
그런데 김상택 만화는 정말로 그렇게 매력적이고 보편적 호소력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매력은 지금도 유효한가?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김상택 만화는 활력이 소진되었다는 소견을 밝히고 싶다. 그것은 필자가 해당 작품의 연재지면인 중앙일보의 논조에 대해서 가지는 거부감이나, 비단 1면에서 2면으로 밀려났다느니 인터넷 상에서 여러차례의 물의를 일으켰다느니 하는 식의 가시적인 문제를 떠나서,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말초적 즐거움만을 추구해온 시사만화의 한계가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김상택 만화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아도, 그 것이 걸어온 길은 한국에서 시사만화가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는 매력으로 가득하다. 덕분에 필자는 김상택 만화보다도 더욱 매력적이지 못한 비논리적인 주장들의 덩어리를 여기에 졸문으로 뱉어내고 있다.
김상택의 세계관을 발현하는 그림체
(그림: 중앙일보 04.5.3)(그림: 경향신문 93.3.4)
95년에 출간된 첫 번째 단행본 <10센티 정치>의 추천사에서부터 최근 출간된 <시사만화 바로보기>까지, 김상택 만화에 대한 여러 평들은 우선 그림체부터 이야기하면서 시작하곤 한다.
실제로 마치 당연한 법칙처럼 극도로 간략화된 선만을 구사하는 4칸 시사만화들은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한칸 만평들 역시 뚜렷한 윤곽선으로 승부하는데, 김상택 만화는 수많은 잡선으로 처음부터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거칠고 신경질적으로 화면 전체를 수놓고 있는 사선들은 배경과 등장인물 등 그림 속 형상들을 모호하게 뭉그러트리며, 명암의 전체 기조를 어둠에 가깝게 가지고 간다.
90년대 초의 만평에서는 그나마 등장인물의 얼굴 정도는 알아보기 편하도록 깨끗한 윤곽선으로 처리되었으나,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시각적인 인물구분이 거의 무의미해질 정도가 되었다. 대신 직접적으로 이름을 표시해주는 ‘꼬리표’가 매번 붙어서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을 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미지 서사인 만화라는 양식에 있어서 그림체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감수성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특히 김상택 만화의 경우처럼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갈고 닦아낸 스타일이라면 그것은 세계관의 직접적인 발현 그 자체다. 즉각적으로 유발되는 불안, 신경질, 절망의 감정은 물론, 엇비슷하게 뭉뚱그려진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통하여 ‘그 놈이 그 놈이다’라는 식의 냉소를 보낸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그런 시각은 누구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까? 어차피 다 똑같은 인간으로 취급당한 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라고 고안된 연출은 아니다. 그들을 싸잡아서 혐오할 수 있는 존재, 바로 ‘서민’들을 노리는 것이다.
박재동과 김상택 그리고 상상된 서민성
한국의 신문 시사만화는 비슷한 펜선과 어중간한 발언수위로 지지부진함을 면치 못하고 있던 시기를 지나 80년대 말-90년대 초에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 쌍두마차로 꼽히는 것이 바로 한겨레신문의 박재동, 그리고 경향신문의 김상택이었다.
둘 다 최고권력에 대한 서슴없는 비판을 일삼았으며, 전례없던 과감하고 서민적인 감수성의 비유와 참신한 화풍을 통해서 시사만화의 표현의 폭을 넓혔다. 덕분에 이들의 만평은 일반서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으며 각 신문의 간판코너로 발돋움했으며, 이후 시사만화의 다양화에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둘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박재동은 만평에서 다루는 이야기의 의제설정 자체를 서민의 삶과 관심사에 맞추려는 노력을 지속한 반면, 김상택은 서민들이 쉽게 보고 비웃으며 즐기도록 희화화하더라도 정치권과 재계 등 ‘그들의 이야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비웃음을 통한 카타르시스에 집중할 뿐, 서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에 대한 공감으로 무언가 움직이도록 만드는 힘이 없는 것이다.
박재동이 한겨레 그림판에서 그러했듯 노동자의 애환이나 학생들 여성들의 짓눌린 인권을 꼬집어주는 방식까지는 당연히 아니더라도, 적어도 음모가 횡행하는 그런 뒷세계가 당장 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관심 조차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즉, 박재동의 만화와 김상택의 만화를 서민적이라고 부를 때,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김상택의 만화는 서민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비유적 표현으로 음모꾼들을 다루어준다는 점, 또는 심지어 그 음모꾼들을 풍자적 비유의 차원에서 서민적인 모습으로 묘사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각적 표현력의 진일보에 불과할 뿐, 핵심은 관내 리포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대중성이 있고 또한 아마도 정치인 본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을 수 있지만, 그것은 ‘서민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일종의 가상적인, 상상된 서민성에 불과한 것이다. 서민의 의제, 서민의 시각과 이데올로기가 없이 시청률 높은 궁중드라마로서 기능할 뿐이다.
(그림: 중앙일보 2003년 7월 16일)
2003년의 대선자금 수사 상황을 묘사한 7월 16일자 만평은 김상택 만화의 가상적 서민성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사례다. 정대철에 대한 조사가 노무현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그 조사의 여파로 이회창 전 대선후보까지 맞물려 있는 상황을 물귀신 작전으로 묘사한 것이다. 여러 인물들이 서로 발목을 잡고 물 속으로 빠져드는데, 선비 하나가 뭍에서 나무를 잡고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모습은 분명히 지극히 해학적이다. 마치 구수한 판소리나 민담에서 나올 법한 서민적 유머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민속 탈춤에서 나랏님들을 비웃고 조롱한 그런 즐거움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기에는 결정적인 요소가 한 가지 빠져있다. 바로, 서민이 빠져있는 것이다. 고매하신 분들의 아귀다툼 틈바구니에서 때로는 의연하게, 때로는 능글맞게 어쨌든 자신의 살 길을 찾아나서는 진짜 서민은 애초에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만의 유치한 리그’가 벌어지고 있고, 서민들에게는 단지 관람석에 앉아서 구경하는 것 만이 허용된다.
음모론적 세계관
(그림: 중앙일보 2004년 4월 23일자)
김상택 만화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라고 한다면, “세상 모든 것에는 음모가 있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 화면 속에서 모든 사건과 사회현상들은 키 플레이어들 사이의 관계로 묘사된다.
최근 북한 룡천역 폭발 사고에 대한 만평(중앙, 04.4.23)은 이러한 시각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른 만평들이 피해자들의 고통을 보여주면서 사고의 비극성을 부각하거나 인도적 지원을 위한 조율을 고민하는 여러 주체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에 집중한 반면, 김상택 만화는 대표적인 음모론인 ‘김정일 암살 미수설’을 채택한다. 아예 사고 자체는 묘사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요한 것은 북한 최고의 키 플레이어인 김정일과 그를 둘러싼 가정된 암투다.
김상택 만화에서 각종 시사 사건들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한 것이며, 그 들과 이익이 상충되는 다른 이들이 반격 전략을 세우고 있다. 그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2분법적인 구도가 만들어지는데, 두 패거리가 갈려서 뒤에서 치열한 암투를 하고 그 결과 우리가 보는 그런 사건들이 일어난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항상 뒤에서 누군가가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카드패를 세고 있는데, 심지어 훈훈하고 따뜻한 사안이라 해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2002년 축구 월드컵 4강전에서 한국대표팀이 독일에게 패한 다음날의 만평인데, 여기에서는 심지어 (실제로는 어떻든 간에) 건강한 스포츠맨십 정신마저도 정면으로 부정당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라는 캡션과 함께, 독일 대표팀의 푈러 감독과 선수들이 비행기를 타고 결승전이 열리는 요코하마로 날아가면서 버스를 타고 3/4위전을 치르러 가는 한국팀을 콧노래 부르며 비웃는 장면을 묘사한 이날의 만평은 곧바로 큰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기대치도 않았던 축구 4강 진출이라는 선전으로 이미 축제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으며 나아가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게임을 보여주는 것이 최고다”라는 식의 관대한 스포츠정신을 일시적으로나마 획득한 일반 대중에게 이러한 묘사는 그 가치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관리오류로 인하여 중앙일보 인터넷판에서 이 만평이 경기시작 이전 시간에 올라온 것으로 표시되자 그 반감은 감정적인 매도로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그림: 중앙일보 2002년 6월 26일)
사실 시사만화가가 자신의 시각에 따라서 상황을 해석하고 묘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위에서 들어본 월드컵 경기의 사례를 놓고 보더라도, 작가는 프로스포츠의 세계가 외관상의 도덕성과는 달리 실제로는 여느 정치판 못지않게 이권과 음모의 세계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그리 말이 안될 것도 없다. ‘국민’의 감수성을 무시했다는 도덕적 비난은 단지 다른 차원의 문제일 뿐이다.
음모론, 통찰력과 편집증적 망상의 두 얼굴
왜 음모론인가? 그것은 음모론의 본질은 이유를 설명해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단지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일이 벌어졌는지를 밝혀내려고 한다. 음모론은 ‘오캄의 면도날’ 마냥 가장 명쾌하고 직관적인 것이 진리라는 식의 접근을 즐기는데, 명확한 실체를 가진 개인(들)으로서의 주체를 세우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마치 한 시대를 풍미한 인기 TV시리즈
정치권, 재계 등 상류층에서 실제로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황당한 배후거래로 점철되어왔던 한국의 현대사를 생각해볼 때, 음모론적 세계관이 지니는 막강한 설득력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한국의 소위 중앙일간지들은 특히 정치/경제분야의 사건들을 등장인물 위주의 드라마화하는 정도가 대단히 높은 것으로 자주 지적받아왔고, 그 결과 재미 – 그것이 비록 술자리에서의 안주거리 수준에 머무른다 할지라도 -를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음모론은 양날의 칼이다. 사회현상들은 키 플레이어들의 미시적인 거래관계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정치의식, 문화적 취향변화 같은 수많은 거시적인 흐름들과 심지어 우연한 사고 등의 가외 변인들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음모론에 집착하면 그러한 부분을 간과하거나, 무리해서 그것을 각 개인들의 이해관계로 치환하려는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그것은 꽤 미묘한 지점인데, 거시적 흐름이라는 것도 결국은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경우에 따라서는 놀라운 통찰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균형점을 찾고자 하는 의지 없이 음모론에 온 신경을 할애하면 최악의 경우 편집증적 망상에 버금가는 시대착오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
(그림: 중앙일보 2002. 3. 13)
사건은,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초반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가 1위를 달리고 김근태 후보가 최하위에 머문 후, 김 후보가 사퇴한 것이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사퇴의 이유는 자신이 당선가능성이 그만큼 없다고 판단한 후, 그렇다면 다른 후보 가운데 가장 제대로 된 사람을 밀어줌으로써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음모론으로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모호하고 이상적인 이야기다. 김상택 만화에서 음모론의 잣대를 들이기 위해서 택한 길은 보다 명확하다: 경기고 동문이라는 명확한 실체가 있고, 학벌이라는 뚜렷한 이해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경기상고 졸업생인 노무현 후보에게 밀린 것은 그 이해관계에 저촉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퇴함으로써 그것을 지켜낸다는 발상이다. 음모론적 세계관을 통한 상황 설명에 나름대로 성공을 한 셈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동문회 자리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풍자적인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에 허위사실이라느니 사실왜곡이라느니 하는 단선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고 또한 들이대서도 안된다. 하지만 단지 자신의 음모론적 세계관을 고수하기 위해서 뚜렷한 근거도 없이 시대착오적이고 위험한 가치인 학벌주의를 동원해서 악의적 비난을 하는 것은 도덕적 자살행위에 다름없다.
결국 대한매일에 만평을 연재하던 백무현의 오마이뉴스 투고기사를 통해서 논란은 폭발했고, 명색이 중앙일간지에서 해당 만평을 개재하기로 판단했다는 사실 자체까지 엮여들어가면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게 되었다. 만평의 내용이 너무나 절묘하게 진실을 꿰뚫어서 논란이 오가는 것이라면 좋았겠지만, 시사만화의 표현이 어디까지 용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오점을 남기게 된 것이다.
한쪽 ‘편’에 붙는 선택을 한 것일까?
음모론적 세계관과 가상의 서민성 등 부정적 어조로 묘사를 했지만, 실제로 이러한 것들이 김상택 만화를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었던 핵심적인 요인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김상택 만화의 지명도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음모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저돌적인 수위의 풍자로 90년대 내내 축적해온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실제 일반 시민들 – 서민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않는 음모꾼들의 드라마 묘사는, 지극히 말초적인 재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로 가야하겠는데 이런 장애물이 있다는 식의 지향성이 부재하는, 단순한 묘사로 끝난다. 뭐가뭔지 모를 혼돈의 시기라든지 참여가 배제되고 억압된 시기라면 모를까, 실제로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기를 열망하는 시대에 이러한 접근법은 빠르게 유효성을 잃고 만다.
시사만화의 미덕이 풍자와 해학이라고 볼 때, 그 중 풍자는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비유와 생략, 과장을 통해서 고밀도로 명쾌하게 압축해내는 기술으로, 작가의 가치관과 주장을 표현해내는 직접적인 메시지다. 하지만 명쾌함은 설득력과 등가가 아니며, 일반적인 언론 논평의 경우 설득력 확보가 언어의 깔끔한 논리구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시사만화의 그것은 바로 ‘해학’이다.
아무리 명쾌한 상황설명을 하고 있는 시사만화라고 할지라도, 해학이라는 가치가 개입되지 않으면 설득력을 잃은 교조적 프로파간다에 불과하게 된다. 일반 대중의 흥미를 더 이상 끌지 못하고 서서히 매너리즘과 슬럼프의 함정에 빠지는 경로를 가게 되는 것이다.
대중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할 때 가장 먼저 쇠퇴하는 것은 해학성이다. 그 경우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의제설정 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자신의 창작성을 재구축하거나, 다른 하나는 냉소의 자세를 유지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한쪽 ‘편’에 붙는 것이다.
원래 김상택은 경향신문사에 입사, 노보에 만화를 그리다가 88년에 본지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99년, 경향신문이 재무 구조를 완전히 개편하면서 ‘독립언론’을 향한 힘겨운 발걸음을 딛어나갈 때, 작가는 중앙일보로 지면을 옮겼다. 앞서 이야기한 바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모를 일이다. 중앙일보에서의 이사대우나 국세청의 신문사 세무조사 자료, 기자들의 후일담 등을 바탕으로 전해지고 있는 소문만이 고액 스카웃설의 근거가 되고 있을 뿐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경향신문 재직시 “저는 만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단행본 <10센티 정치> 서문에서 재인용)라고 말했을 정도로 시사만화에 대한 겸손함을 보였던 김상택이, 중앙일보로 옮긴 이후에는 목소리의 방향과 수위가 명실상부한 조중동 급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김상택 만화에 남은 것
사실 한국에서 특정 신문에 전속된 시사만화가는 작가라기보다는 언론인이다.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표현하기에 화백이라는 명칭이 붙지만, 해당 신문 해당 지면의 이해관계나 시각과 철저하게 부합해야 한다.
‘김근태 학교망신’ 만평 사건 당시 중앙일보 편집국장이 우리는 화백의 의견을 그대로 존중해준다고 말한 것과는 달리, 2002년의 동아일보나 최근의 세계일보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로는 신문 지면과 만평의 지향성이 맞지 않을 때 작가는 퇴출된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로, 맨 처음에 말했듯이 신문의 시사만화는 서사작품이라기보다 논평이고 사설이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그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을 수 없으며, 다만 어떤 방식, 어느 정도의 수위로 표현해내는가의 문제다. 그런데 김상택의 만화는 음모론과 가상적 서민성으로 무장했고, 따라서 지극히 공격적이고 직설적이다.
(그림: 중앙일보 2004년 4월 15일)
위의 만평은 2004년 국회의 대통령 탄핵안 통과에 따른 후폭풍으로 인하여 총선에서 민주당을 진두지휘한 조순형과 추미애가 낙마하는 것을 보며 노무현 대통령이 샴페인을 터트리는 장면이다. 작가는 평소의 소신이자 특기인 이분법적 적대관계를 묘사하여, 무려 이들을 노무현 대통령의 ‘적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통쾌해하면서 터지는 샴페인과 지나가는 경호원들까지, 탄핵정국부터 모든 것이 사실은 적 제거를 위한 대통령의 음모였다는 뉘앙스를 물씬 풍긴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것을 고려한 정치적 판단이 없었으리라고 믿을 만큼 순진할 필요는 없지만 소신과 방향성을 버린 한/민/자 공조, 그리고 국회의 권위를 남용하여 민의를 거스른 탄핵결정 등 분명히 문제의 핵심은 명확했고,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이에 대한 심판을 가한 것은 보통의 유권자들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와대 음모론, 민주당/열우당간 파괴적 경합을 줄기차게 제기하고 한나라당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조중동이다. 김상택 만화는 그 목소리를 충실하게 확대생산해주고 있는 나팔수 역할 – 아니 이쯤되면 돌격대장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지금 김상택 만화에 남은 것은 해학도 날카로운 풍자도 아니라, 수구적 발상과 협잡으로 가득찬 조중동식 사설 논평을 그대로 옮긴 강렬한 시각 이미지 뿐이다.
사실 민주주의 사회에서라면, 조중동의 시각 역시 비록 최선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선택가능한 여러 옵션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전에, 시대를 반영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고 있는 시사만화가 시대의 흐름에 대한 능동적인 해석과 사회적인 가치판단을 게을리하여 본래의 재기발랄함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다. 적어도, 지금 이 곳 한국에서는 인터넷 등 뉴미디어 힘입은 진짜배기 서민성이 가상적인 서민성의 자리를 좁게 만들며, 음모론의 유통기한은 지나고 있다. 과연 김상택 만화는 다시한번 봄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 너무 비관하지도 않으며 한번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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