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속성이 빛을 발하다 – <엠마> [으뜸과 버금 0504]

메이드, 즉 하인 내지 하녀라는 소재는 무척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가능하게 해준다. 우선 헌신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현모양처 또는 자상한 아버지형 캐릭터를 쉽게 창조할 수 있다. 자기 집단 내에서 어울릴때는 발랄한 노동자이며, 기품 있는 집안에서 일을 돌보고 있는 동안에는 예절과 품격을 지킬 줄 아는 멋쟁이. 상류층의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류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생기는 격차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나아가 서비스를 하는 자와 서비스를 받는 자 사이에서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우정이나 애정. 뭐랄까, 너무나 이야기의 규격이 맞춤형처럼 확연히 눈에 보인다. 그리고 당연히도 그것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써먹어서, 이제는 정말이지 지겨울 정도다. 특히 특정 소재나 표현요소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일본에서 90년대 이후 정착된 소위 ‘모에’라고 불리우는 소비성향 물결 속에서 메이드 – 특히 여성 메이드는 한층 더 정형화된 욕정과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통속성이 극단으로 치닫다가 이상한 변이를 맞이해버린 셈이다.

하지만 통속성이, 꼭 이러한 어두운 결말으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엠마>(모리 카오루, 북박스 / 현재 4권 발매중) 같은 소중한 사례가 있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한 메이드와 귀족 남성의 신분을 초월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려나가는 이 만화는, 수많은 메이드물에 익숙할 대로 익숙할 만한 만화팬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욱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우선 전제를 하건데, 이 작품은 메이드물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다른 여타 공산품 만화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작가가 메이드에 대한 진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착을 한다는 점이다. 메이드의 생활을 묘사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고증하여 재구성한 19세기 영국의 거리를 비롯해, 당시의 생활습관 하나하나를 되살려낸다. 그 결과 메이드는 성적 환상으로 버무려진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노동자이자 품격 있는 집안의 주인들이 되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의 미덕은 빛을 발한다.

이러한 집요함은 작가가 만화를 연출하는 모든 방식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1권 첫 대목에서 주인공 엠마가 등장할 때, 그녀가 청소하는 방의 풍경을 훑어주며 일하는 엠마의 손놀림, 목선, 표정을 하나씩 훑어나가는 시선처리는 어떤 영화나 사진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만화 본래의 효과다. 메이드들의 활기찬 집단 노동 장면에서 묻어나오는 에너지 역시 메이드 층의 다양한 속성들을 보여주기에 가장 효과적인 시퀀스들로 압축되어 묘사된다.

물론 <엠마>는 통속적이다.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니, 지난 2000년 인류 문학의 과거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갈 정도로 전형적이다. 주말 드라마 마냥, 나중에 뻔히 맺어질 것이 보이는 두 신분차이나는 마음의 연인들이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적당히 시련도 닥치고, 방해자들도 끼어든다. 그 과정이 특별히 특이하지도 않고, 캐릭터들 역시 파격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다. 그 기본공식 위에 작가는 자신이 집착하고 싶은 메이드라는 흥미로운 소재거리에 하염없이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솜씨가 가히 녹록치 않아서, 독자들이 공감하고 따라온다.

결국 좋고 재미있는 만화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통속성/참신성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통속적이라면, 아예 확실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집요하게 끝까지, 맨바닥까지 밀어붙이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엠마>를 추천한다.

 

[으뜸과 버금 2005.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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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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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이버덧글 백업]
    – 코믹도치 – 조용한 주인공의 성격이 참 맘에들었어요..요즘 여자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왈가닥이거나 겉만평범녀를 흉내내고 알고보면 절대 평범하지 않은 캐릭터들만 난무하는데 말이지요… 2005/04/24 21:18

    – pinksoju – 통속성…;; 맞는 얘기긴 한데, 이 리뷰는 만화소개가 아니라 읽지 말란 소리로밖에 안보이는 모순이..ㅋㄷ 솔직히 정치적으로 불쾌하긴 어떤의미에선, 엠마나 까페알파나 마찬가지입니다.. 2005/04/25 1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