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그리며 세상에 자리잡기 – <그림자 소묘>[으뜸과 버금 0502]

만화는 자유로운 표현방식이다. 그림과 글을 거리낌 없이 섞어 쓰며, 그것도 그런 그림들을 여러 개를 마음대로 공간 속에 분할하고 흩뿌리고 붙여넣는다. 세밀한 그림과 대충 그린 여백 넘치는 작대기 형상들이 공존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조화를 이루도록 지휘감독이 행해질 때 비로소 진가를 드러낸다 – 바로, 이야기의 효과적인 전달이다. 만화의 생명은 이야기로서의 재미(말하자면 길어지겠지만, 여기서는 우선 ‘독자를 끌어들여서 작품을 끝까지 만족스럽게 읽도록 만드는 힘’ 정도로 적당히 규정하고 넘어가자)이고, 그것이 확보되었을 때 비로소 그 속에 담긴 정서와 메시지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유대감을 만들어 깊은 울림을 준다. 이야기를 든든한 핵심축으로 놓고, 그것을 가장 확실하고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는 기법들을 마음껏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만화의 매력이다.

<그림자 소묘>(김인/새만화책)라는 작품이 소리소문 없이 출간되었다. 홍보는 기본적으로 출판사의 마케팅 역량 문제이기는 하지만, 좋은 작품이 아무런 주목도 못받고 그냥 묻혀버리는 경우는 역시 언제라도 안타깝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시골에 살던 소녀가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와서 새로운 환경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이다. 작품은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소녀가 서울에 올라와서 미술학원 강사와 친해지며 낯선 사람들이 만든 그 공간 속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이야기, 후반부는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린 다른 소녀가 주인공과의 상호교류를 통해서 비로소 이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이야기다. 두 이야기는 절묘하게 서로 연결되고 대칭되어, 세상과의 만남이라는 하나의 큰 주제를 따뜻하게 이야기한다.

<그림자 소묘>는 위에서 이야기한 만화의 기본원칙에 충실한 만화다. 사람의 존재감이란 것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것을 미술의 소묘에서 이야기하는 그림자 개념으로 치환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발상이 신선하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 속에 피터팬과 웬디의 그림자 소동을 모티브로 섞어넣어서 자연스럽게 흥미를 돋구는 능숙한 구성 솜씨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위해서 다양한 시각기법들이 총동원된다. 사실 주류 상업만화들이 펜과 잉크로 가는 것에 비해서 콘테와 붓으로 그렸다느니 하는 것은 솔직히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화제 거리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콘테 질감의 소묘, 2차원적 형상과 여백의 붓선들이  각각 정말로 가장 효과적으로 이야기의 재미를 확대시켜줄 수 있는 그 순간에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밀도의 소묘 그림체로 묘사되는 인물들, 존재감을 잃었기에 하얀 여백 면과 붓선 만으로 형상화된 소녀. 현실의 거리와 그림으로 그려진 지도, 그리고 그 두가지가 섞여들어가면서 만드는 풍경. 따뜻하고 탄탄한 이야기를 돋보이게 만드는 멋진 ‘만화적’ 표현이다.

물론, 그림 질감의 밀도가 전체적으로 높아서 주류 만화에만 너무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약점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중문화로서 즐기려는 작품에 대해서는 항상 작품으로 들어갈 진입장벽이 무척 낮기를 바라기 때문이다(이런 경향을 비웃기 위해서,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푸코의 진자>에서 첫 챕터를 일부러 집요할 정도로 난해하게 썼다). 특히 만화에 대해서는 더욱 더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생명력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라면 언젠가는 결국 독자에게 도달하고 만다. <그림자 소묘>가 그런 작품이 되어줘야 한다고 믿는다.

[으뜸과 버금 2005. 02.]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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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 <그림자 소묘> (새만화책) 02/25 13:25 쿠루쿠루(enter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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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본이 –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한 글을 능숙하게 쓸 수 있어야 진짜 프로인 것이지요. 저는 아직 그 경지에 다다르지 못해서…T.T 2005/02/26 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