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에 의한 단죄자와 살인마 – 살인자ㅇ난감 [기획회의 304호]

!@#… 시작부터 사족: paulgravett.com의 ‘2010 최고의 만화’에 이 작품을 선정했을 때는 ‘Murderer Toy’라고 제목을 옮겼는데, 만약 실제 해외진출을 노린다면 아예 새로운 제목을 지어야할 듯.

 

우연에 의한 단죄자와 살인마 – [살인자ㅇ난감]

김낙호(만화연구가)

공교롭게도,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추적자’ 등 00년대에 세계적으로 크게 명성을 얻었던 한국영화들 가운데 상당수는 꽤 잔혹한 내용을 담아내곤 했다. 단지 범죄가 소재로 다뤄지고 피가 많이 나온다고 해서 잔혹한 것이 아니라, 공권력은 무능하고 정의라는 가치는 늘 흐릿한 비정한 현실을 다룬다. 나아가 옛 느와르 장르들이 그나마 고수하던 하드보일드한 낭만마저 제거해버리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는 한층 흐리며, 긴장감 넘치는 현실 도피는 커녕 계속 우리 실제 사회의 일면을 상기시키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그런 불편한 스릴러들을 우수한 연출과 스타일로 완성시켜, 세계 관객들을 열광시킨 것이다. 어째서 그런 장르의 우수작들이 비슷한 시기에 여럿 겹쳤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시대적 맥락과(한국의 00년대만큼 기존 가치관의 뼈대마저 무너트린 무한경쟁을 미덕처럼 받들어 모시고 전력질주하며 다들 피곤해하는 상태가 그리 흔하겠는가) 세대적 문화 경험과 히트작들이 가져온 트렌드 편승 등 여러 요소들이 겹쳤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고(高)스트레스 사회의 무력한 갑갑함 속에서, 이런 식의 충격요법이 주는 재미와 성찰의 여운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살인자ㅇ난감](노마비/애니북스/전3권)은 그런 영화들이 주었던 미덕을 이어가며, 만화로서의 연출력을 극대화하며 한층 더 서늘함을 얹은 작품이다. 귀여운 화풍의 2등신 캐릭터들을 통해서 가장 잔혹한 이야기를 한다. 현실적이지 않은 우연으로 점철된 기막힌 줄거리를 통해,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부조리함 만큼은 더욱 사실감 넘치게 그려내는 기묘한 독서 체험을 시켜준다. 작품의 시작 무렵, 주인공 이탕은 정의 따위 없이 물고 물리는 세상에 적당히 불만이 많지만 딱히 용기도 혜안도 없는 평범한 편의점 알바 젊은이다. 하지만 여러 상황들이 꼬이면서, 우연히 살인을 하게 된다. 그리고 벌벌 떨며 수습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살인을 한다. 딱히 연쇄살인마가 될 이유도 없이, 그저 우발적 살인의 현장이 계속 연속된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매번 모든 현장의 증거는 우연히 사라지고, 살해당한 사람은 알고 보면 그 자신도 큰 죄를 지은 자들이다. 우연이 겹치면 이능력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이탕의 연속 살인, 그를 돕기로 나선 노빈, 살인의 실체를 추적하는 형사 난감, 또다른 연쇄살인마 송촌 등 여러 인물들의 행보가 서로 겹쳐나간다.

이 작품이 그려내는 곳은 사회적 제도에 의한 단죄가 작동하지 않는 세상이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가하는 잔인함은 물고 물려 있고, 사람들은 상대에 따라서 양면적 모습을 지닌다. 누구에게 성실하고 좋은 가족은 다른 누구에게는 누명을 씌워 신세를 망쳐놓는 나쁜 놈이다. 흔하고 평범한 여학생은 사실 존속살해범일 수 있다. 드러나지 않은 죄는 죄가 아닌 적당히 더러운 세상에서, 선악의 틀이 아니라 가해/피해의 관계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그 속에서 이탕은 우연하게도, 죽이는 사람마다 알고 보니 죽어 마땅한 사람이며 살인의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정의의 단죄자처럼 되어버리는 셈이다. 하지만 개인으로 놓고 보면, 역시 살인마가 되어가는 것이고 자신도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살인마 송촌은 단죄를 하겠다는 의지에 따라서 움직이며 뛰어난 실력으로 증거를 없앤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냥 비뚤어진 정의감으로 임의로 살인을 남발하는 연쇄살인마로 머무른다. 그 둘을 추적하는 형사는 기이한 상황의 연속에서 계속 결단을 강요받는다. “죄가 없는 자 돌을 던져라”라고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돌을 던져야 하고, 어떤 이는 돌을 맞을 만하지 않아도 맞고, 돌을 맞아야 할 이들은 돌을 피한다.

결과로서의 이탕의 정의와 무력한 의지로서의 형사 난감의 정의, 여하튼 단죄가 있는 사회를 꿈꾸며 이탕을 돕는 노빈의 정의, 나쁜 놈이라 판단하면 아무나 죽이는 송촌의 정의는 서로 맞물려 있다. 이탕에게서 우연의 힘을 빼면 송촌이 되며, 난감의 정의와 노빈의 정의는 약간의 자제력 차이만 넘어서면 보기보다 가깝다. 노빈의 정의가 송촌을 그 모습으로 일정부분 만들어냈다. 정의, 도덕 같은 잣대는 늘 회색지대에 있으며, 누구나 가해자이자 피해자일 수 있다. 사회의 제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상적 가해 행위의 사연들, 특별하지만 일련의 사회적 관계 – 예를 들어 돈과 권력 등으로 확보한 계급적 특혜 때문에 – 은폐된 사건들이 있을 때 그런 다양한 정의들을 견주어보고, 초월적 단죄를 꿈꾸는 것은 불경할지언정 쾌감을 준다. 하지만 그래도 살인은 여전히 살인이라는 착잡함이 남아있을 때, 그리고 누구나 양면적이라는 것을 끝없이 직면당할 때, 여운은 깊어진다.

먼저 언급했듯, 이 작품의 대부분은 2등신 캐릭터들로 진행된다. 또한 대부분은 4칸만화 에피소드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나갈 때 주로 사용하곤 하는 방식을, 오히려 가장 잔혹한 종류의 내용에 활용하는 셈이다. 그런데 뛰어난 이야기 분절 덕에, 오히려 그 괴리가 내용의 서늘함을 더욱 부각시켜준다. ‘에세이툰’ 마냥 상황을 일상적으로 다가오게 만들며, 몇 개 에피소드마다 말미에 삽입하는 상징적 물품의 묘사 역시 시적 여운으로 가득하다. 그 결과, 잔인한 행위가 이루어질 때 즉각적 거부에 의한 거리감보다는 적당히 몰입해 있을 때 뒤통수를 친다. 대놓고 세밀한 극화체라면 받았을 노골적 긴장감과는 다른 방식으로 깊게 빨려드는 것이다. 그런 괴리에만 의존한다면 몇 화 이내로 신선함이 사라지고 오히려 독서에 방해될 수도 있었을 방식이지만, 글과 그림을 적절하게 섞어 내기, 중반에 주인공들이 서로 길이 엇갈리는 대목에서 보듯 칸 흐름의 조형을 활용하기 등 여러 만화 특유의 기법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강하게 카툰화된 형체들을 더욱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된 세밀한 연출을 성공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원래 개인블로그에 연재하다가 몇몇 유명블로그를 포함해서 강한 입소문을 타고,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웹툰 연재 섹션에서 당시 유일하게 성인인증을 거쳐야 읽을 수 있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만큼 대중적 매력과 함께 격한 내용이 함께 공존하는 만큼, 은근히 현실감 넘치는 살인극의 착잡함을 즐길 준비를 하지 않고 그저 그림의 귀여움에 속아서(!) 읽기 시작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편이 좋다. 회수하지 못한 복선이 꽤 있다거나, 송촌이 등장하고 이탕이 상대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중반부의 이야기 페이스 배분이 고르지 못하다거나 하는 몇 가지 약점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기묘한 현실감 넘치는 부조리, 잔학한 가학/피학으로 엮인 세상, 끝없이 모호한 정의의 경계, 그것을 표현해내는 역설적 그림과 연출이 주는 재미는 모든 것을 가볍게 덮고도 남는다. 그리고 책장을 덮고도 서늘한 여운이 계속된다.

살인자ㅇ난감 – 상.중.하 세트
꼬마비.노마비 지음/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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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어쿠스틱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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