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밥이 쌓여가는 일상 -『짬』
김낙호(만화연구가)
한국에서, 세대를 초월해서 애용되어온 궁극의 격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군대 가면 사람 된다”라는 말이다. 사람도 아니었다가 사람이 되어 나온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분명히 아닐 것이고, 군인으로서 배웠다고 표방하는 각종 살인기술이 인간 본연의 조건이거니 하는 말도 물론 아닐 터이다. 물론 말이야 조국의 소중함을 알게 되며 책임감을 지니고 사회성을 기른다느니 하고 적당히 멋진 말들을 붙여놓고는 하지만, 굳이 맥락으로 보자면 군대 생활을 경험하고 나면 한국의 주류 아저씨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 나갈 만큼 닳고 닳은 생활 요령이 쌓인다는 정도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요령이란 무엇일까. 뭐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사는 것은 어디든 다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 합리성을 표방할수록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바보짓이 늘어난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회에서 짬밥만큼 막강한 것은 없다는 사실 등이다. 특히 그 중 군대에서 배급되는 식사를 뜻하는 용어이자 군대에서 생활한 시간을 나타내는 척도로 쓰이는 ‘짬밥’이란 것이 참 중요한 개념이다. 경험이나 경력이나 요령 같은 정형화된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관록의 이미지가 있으며, 이해 안가는 도깨비소굴 같은 괴상한 환경 속에서도 (군대 생활이란 문자 그대로 ‘삽질’ 투성이 아니던가) 요령껏 잘 사람 살듯 살아나가는 경탄스러운 능숙함의 평가척도다. 그리고 짬밥은 무슨 엄청난 훈련을 함으로써 쌓이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심각한 적응문제가 있는 경우가 아닌 한, 군대생활을 하는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쌓여나간다. 짬밥이 쌓인다는 것은 군대라는 특이한 환경 속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일상을 살아나간다는 증거다.
『짬』(주호민 / 동양문고)은 군대만화다. 징병된 평범한 육군 사병의 군대 체험을 에피소드 방식으로 그려내는 흔한 형식의 군대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군대만화는 물론, 군대를 다룬 드라마나 코미디프로들이 한결 같이 빠지곤 했던 결정적인 함정인 조국 만세, 군대는 보람찬 것이라는 애국 감성 과잉이 거짓말같이 쏙 빠져있다. 그렇다고 해서 군대는 모순 덩어리 지옥이라는 식의 사회파 분노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 모든 것의 자리를 채워주는 것은 오직 한가지, 사람 틈바구니에서 여하튼 웃기도 하고 황당한 일도 당하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평범한 모습들이다. 군인에게 있어서 군대란 일상이고,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결격사유 없는 남성이 군대를 가야한다는 것 또한 일상이다. 일상은 평범함으로 차있고, 평범함 자체를 절묘하게 꼬집어내는 과정에서 오는 공감대의 재미란 원래 만만치 않은 것이다. 다행히도 사병들의 군대생활이라는 것은 일상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한 황당함이 넘치기 마련이라서 소재가 떨어질 걱정도 없다.
공감의 코드는 이 만화가 원래 온라인 만화였기에 더욱 강렬하게 작용했다. ‘디씨인사이드’의 만화연재 갤러리 게시판은 물론, 여러 온라인 지면에서 50회에 걸쳐서 연재되면서 군 복무를 마친 수많은 이들과 주변에 군 복무를 한 사람이 있거나 스스로 군에 징집될 처지에 있는 사람들(한마디로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냈다. 대한민국 만세나 뜨거운 전우애와 감동의 눈물 같은 오버질을 배제하고 일상 자체의 에피소드들을 다루었기에 인터넷에서 그 흔하디 흔한 악플도 거의 달리지 않고 고른 지지를 받을 정도로 깊은 공감대의 폭을 이루었던 특이한 경우다. 어렵지 않게, 무겁지 않게, 지나친 사색에 잠기지 않고, 딱 보고 경험하는 정도까지만 그대로 다시 기억을 되짚어보는 느낌이랄까. 축구하다가 열 골을 넣었다느니 수색 나가서 간첩을 10명 잡아왔다느니 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수영장 만들며 하루 종일 페인트칠하고 사회에서 애니메이션했다고 간판 작업에 동원되는 생생한 일상 그 자체가 독자들의 눈높이와 딱 맞게 만난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이 짬밥이 쌓이고 그 결과 행동 방식이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이 압권이다. 상병을 달았을 시점에 동생이 입소훈련 중이라는 편지를 받고 답장에 “나같으면 자살한다”라고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는 1화에서 훈련소에서 잔뜩 위축되어 벌벌 떨던 모습과 묘하게 겹치면서 박장대소를 하게 만든다. 훈련병은 이병이 되고, 선임 병장은 전역을 하고, 일병은 상병이 된다. 사람들은 2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복무를 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생활의 과정을 방해받는 당사자 자신들에게는 엄청난 기간이지만, 솔직히 바깥 사람들에게는 그냥 그저 그런 정도의 기간에 불과하다) 권력의 비인간적인 밑바닥부터 온 세상에 건드릴 자가 없는 정점인 말년병장까지 빠르게,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위치에 맞추어 적응해나간다. 비합리적인 업무가 떨어질 때 그것에 황당해하며 고생을 하는 낮은 짬밥에서, 두루뭉실 뭉게거나 눈치껏 도망치는 높은 짬밥으로 업그레이드한다. 아주 일상적으로.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는 만기제대에 의한 전역을 하고, 어느덧 ‘아저씨’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슬픈 일도 우스운 일도 아닌, 그냥 그런 일이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공감이 간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중간쯤에 있는 듯 허술하면서도 이야기를 제대로 채워 넣는 그림과 연출 역시 그러한 평범함의 공감대를 더욱 배가시킨다. 미소년 미소녀가 난무하는 환타지스러운 군대도 아니고, 극화체 마초들이 격정적 드라마를 펼치는 현장은 더욱 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위성을 위하여 작위적으로 못그리거나 다른 강한 작가주의적 자의식이 넘쳐나서 부담감을 주지도 않는다. 『짬』의 시각스타일은 고등학교에서 한 반에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인, 이야기 솜씨 좋은 친구가 연습장에 습작을 그려서 돌려보는 듯한 정도의 감각이다. 실제로 작가는 입대 이전에 ‘3류만화패밀리’라는 아마추어 만화그룹에서 활동하면서 스타크래프트를 소재로 한 연습장체 만화 작품으로 온라인에서 유명세를 탔던 적도 있는 등 그림 이야기꾼으로서의 기질이 뚜렷했던 바 있다.
『짬』은 군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게다가 군 조직의 모순과 문제를 꼬집기 위한 작품도, 군 복무의 신성함을 건전한 미소로 부르짖는 뻔한 작품도 아니다. 그렇기에 그 쪽을 바라고 선호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따지고 보면 비판의 대상이 될만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극명하다. 사실 그런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별로 없거나, 아니면 이 작품이 보여주는 군 생활의 일상의 힘이 너무나 강하기에 모든 것을 압도하거나. 혹은 양쪽 모두 정답일 듯 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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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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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주호민 지음/상상공방(동양문고) |
모든걸 압도해버리는 공감의 힘. 이라는 선생님 요약말씀에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