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취향 중 하나.
세계정복을 시시하게 추구하는 만화들
김낙호(만화연구가)
만화, 소설, 영화 등 온갖 대중서사양식에서 가장 사랑받아온 모티브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세계 정복이다. 투철한 히어로가 무찔러야만 하는 궁극적인 악의 세력이, 관념적으로 난해한 의미에서의 악이라기보다는 뚜렷하게 눈으로 보이는 악행을 해야 할 때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명쾌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이권 다툼과 계급적 오해 같은 섬세한 갈등이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보다 스케일 크며 무엇보다 단순한 오락을 원할 때는 역시 악당의 세계정복을 저지하는 것만큼 매력적인 구도가 별로 없다.
그런데 세계정복이라는 사랑받는 소재는 가져오되, 악의 세력들에게서 호쾌한 폭력과 광기를 제거하고 평범하다 못해 시시하게 만들면 어떨까. 시시한 듯한 설정들을 바탕으로 거대하게 세계정복을 획책하는 [20세기 소년](우라사와 나오키)같은 작품도 있지만, 그보다는 세계정복을 한다는 거대한 세력이 사실은 꽤 현실적인 소소한 문제들을 늘 직면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관점의 전환이나 권력의 의미 같은 조금씩 더 생각할 거리를 슬쩍 던져준다. 하지만 그것은 교조적인 교훈이 아니라, 거창함과 소소함 사이의 격차에서 발생하는 유머 속에서 그냥 슬그머니 전달되도록 만든다. 시시한 세계정복만화들을 몇 가지 살펴보자.
정복자의 일상
시시한 이야기로 치자면, 매일의 일상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힘든 노동을 해야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꿔야 하는 등 하나도 시시하지 않지만, 풍부한 상상력으로 만드는 가상 서사물의 세계에서는 아무래도 그렇다. 시시한 세계정복물의 왕도는 그런 의미에서 바로 세계정복자들의 일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세계정복을 꿈꾸는 거대한 악의 조직, 그리고 그들에게 대항하는 정의의 영웅들도 사실은 집에서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존재들인 것이다. 슈퍼에서 먹을 것도 사고 동네에서 이웃들과 대화도 하고 그런 평범한 삶도 있다. 지구의 운명을 건 거창한 싸움을 해야할 존재들이 그런 평범한 생활세계에서의 일상을 보내는 모습은 묘한 즐거움을 준다.
[천체전사 선레드](쿠보타 마코토)는 ‘파워레인저’류의 아동용 히어로 특수촬영 드라마의 전형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붉은 가면을 쓰고 괴인들을 무찌르는 정의의 용사 선레드가 있고, 그런 괴인들을 보내서 세계정복을 노리는 악의 조직 프로샤임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용사인 선레드가 동네 백수고, 프로샤임 조직과 그 우두머리 뱀프 장군이 성실한 주민들이다. 일단 세계정복을 노리는 악의 조직은 맞고 괴인들의 능력치도 꽤 출중한데, 세금도 제대로 내고 법의 보호도 받는다. 괴인들은 세계정복 자금과 자신들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뛴다. 동네에서 그럭저럭 착하게 잘 지내는 악의 세력이 껄렁한 백수 히어로에게 늘 구박받는 일상이 펼쳐진다. 이런 코믹한 구도 속에서, 묘하게 삶의 긍정적 자세와 성실한 인생에 대한 잔잔한 감성이 흘러나온다.
이미지 역전을 노린다는 명목 하에 그래도 세계정복을 노리는 악의 세력이 너무 약하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악당의 사연](랑또)이 적격이다. 주인공이 취직한 대기업이 알고보니 세계정복을 노리는 ‘홍어단’이고, 디자인실에 배속되고 보니 거대 괴수를 디자인하는 일이다. 하지만 연봉도 높고 나름 안정적인 번듯한 사무직 직장이다. 그런데 소개팅으로 만난 여자 친구가, 홍어단의 세계정복을 저지하고자 하는 5인조 히어로 러브레인저의 일원이다. 그렇다고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비극적 드라마를 펼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인 것은 전혀 아니고, 잘나가는 기업 같은 악의 세력 안에서 나름 평범하게 직장생활과 일상을 보내려는 이들의 고군분투를 중심으로 한다. 회사에서 지급한 휴대폰이 홍어 모양이고 피를 토하고 디자인실에서 만든 시안을 실제 괴수로 제작해내는 공방이 수상쩍은 마법진이라도 어쨌든 현실적인 생활을 누리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어찌 보면 적잖은 불합리와 모순을 안고도 돌아가는 실제 사무직 일터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았다.
정복의 목표
세계정복을 노리는 악의 세력에 대해서 약간만 머리가 굵어지면 누구나 한번 생각해보는 질문이 바로 도대체 왜 세계를 정복하려고 하는가다. 단지 재물이나 복종이 필요하다면, 정복할 필요 없이 그냥 부유한 권력자가 되면 대체로 충분하다. 오히려 세계정복을 하고 이 복잡하고 커다란 세계를 어떤 식으로 통치를 해야 금방 자멸하지 않을 것인가.
때로는 정복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드래곤볼](토리야마 아키라)의 ‘레드 리본군’편에서, 세계정복을 노리는 악의 조직 레드 리본군은, 세계 각지에 숨겨진 여의주 일곱 개를 모으면 용신이 하나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수색에 나선다. 그런데 알고보니 조직의 수장인 레드 장군이 신의 힘으로 이루려고 했던 소원은 세계정복이 아니라 자신의 작은 키를 키워달라는 지극히 소소한 것이었다.
세계정복 자체가 그래도 목표라고 한다면, 무엇을 이루고 싶은 것인가. [몬스터즈](김규삼)은 천재 과학자 오메가 박사와 그가 만든 천재 사이보그 요한이 서로 세계정복을 하겠다고 대립하며 일상을 보내는 코미디다. 본격적 공세에 나선 오메가 박사는 광화문을 점거하고는 시민들에게 생중계로 우화 한편을 들려준다. 옛날 어떤 노인이 원숭이들에게 팔찌를 주고 그 개수로 먹을 것을 배분했더니 원숭이가 서로 싸우고 인간에게 복종했다는 이야기다. 그런 인간의 우매한 탐욕을 비판하며 우월한 자신이 통치하는 이상사회를 주장할 대목이지만, 장르가 장르라서 오메가 박사는 인류를 퇴화시켜 원시 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하지만 말이다.
세계정복을 통해서 이뤄내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좀 더 확장하다보면, 애초에 세계정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나름대로 근본적인 화두에 도달하게 된다. 나는 왕좌에 앉아있고 세계 모든 인구가 사슬에 묶인 노예처럼 복종하는 것이 세계정복인가. 세계가 하나의 국가로 묶이고 그 대통령이 나인 것이 세계정복인가. [개구리하사 케로로](요시자키 미네)는 개구리 모양을 한 케론성 외계인 특공대가 지구 정복을 위해 내려와서, 어느 가정집에 식객으로 눌러 앉아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대장인 케로로와 그 동료들은 지구의 방어망 따위는 한 순간에 제압할 만한 출중한 과학 장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집안 일을 돌보고 프라모델을 만들고 맛있는 과자를 까먹으며 정착해버린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다시 자신들의 목표를 상기하고는 기상천외한 방식의 세계정복을 시도하고, 대체로 실패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정복이란 무척 애매해서, 모든 지구인들이 가구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을 부딪히게 한다든지, 라디오 방송으로 모두를 케론성의 팬층으로 만든다든지, 그저 모든 지구인에게 피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쪽이다. 그리고 종종 그런 소동 끝에 오는 교훈은, 강제로 남에게 무언가를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무언가를 가꾸는 것이 마음을 얻는 것이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노골적인 정복자들이 (개구리 외계인들의 복장조차 2차대전 일본군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패러디했다) 벌이는 소소한 생활을 통해서, 오히려 정복의 사전적 의미인 무력 제압의 정반대 의미를 추구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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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학교도서관저널. 특정 컨셉 아래 청소년들에게 추천하는 책들을 묶는 내용으로, 만화를 진득하게 즐기는 것의 즐거움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배합해보자는 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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