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특집으로 선정했던 지난 호 소재.
만화로 생존을 돌아보다
김낙호(만화연구가)
흔히 삶의 본질이라며 인용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약육강식’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것이 정글의 법칙이며, 원래 생물이란 그렇게 약한 쪽을 해치도록 되어있다는 자못 비장한 진리라고 주장하기 위해 동원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그러니까 너도 억울하면 강자가 되고 그 전까지는 네가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참으라고 억압하는 장치일 뿐, 딱히 인간 사회의 발전방향과는(그리고 사실 생물의 진화론과도) 거리가 멀다. 오히려 훨씬 적합한 격언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쪽이다. 무엇보다,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강함이란 생각만큼 간단한 것이 아닐 정도로 인간 사회에서 생활하기 위한 조건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주먹질을 잘한다는 것은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용한 강함이 아니고, 고등학교 성적이 좋은 것은 연애를 잘하기 위해 유용한 강함이 아니다(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또 어떨지 모른다).
그냥 죽지 않는다는 소극적 의미를 넘는, 인간사회를 무대로 하는 적극적 의미의 생존이란 무엇일까. 우선 기본적인 생활 조건을 지켜내고, 원활하게 일정한 사회적 역할과 자리를 차지하여 인정받으며, 반면 사회적 압박에 지나치게 휘말리지 않고 개인성은 지켜내는 그런 과정이다. 말이야 쉽지, 무엇하나 사실 간단한 것은 없다. 좀 더 발달된 선진 사회라면 덜 고난스럽고, 덜 발달된 곳이라면 첫 번째부터 허덕일 따름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떤 식인지, 그리고 우리가 생존할 방법은 무엇일지 혹 조금이라도 생각해볼 의향이 있다면, 우선 몇가지 만화 작품들을 돌아보며 화두를 자극하면 어떨까.
사회라는 생활 조건
생존이라는 화두를 가장 간편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생활조건의 기본조차 위협받는 상황에 주인공들을 던져넣는 것이다. 전기가 끊기고 상하수도가 나오지 않는다든지 하는 물질적 조건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인간 사회로서의 근간인 신뢰와 역할분담에 초점을 맞춰보는것이 흥미로울 것이다. 현대 사회는 상당히 정교한 기능 분담에 의하여 겨우 움직이고, 개개인의 능력이나 집단에 대한 공헌의 불균형이 비인간적 차별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수많은 역사적 시행착오를 겪어왔다(여전히 겪고 있다). 급작스런 환경변화로 인하여 공권력이든, 공식적 리더십이든 각종 사회 운영 장치들이 파괴되었을 때,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새로 사회를 만들어 인간 생활의 생존을 추구할 것인가.
자살도(모리 코우지 저)는 일본 정부가 반복적 자살 시도자를 더 이상 비용을 들여 재활을 시키는 것보다는, 어차피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이들로 간주하고 무인도에 던져버린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여러 주인공들은 약간의 폐건물이 남아있는 버려진 섬에 어느 날 납치당하듯 떨어져서, 그곳에서 결국 자살하거나 아니면 공공서비스가 전혀 없는 그곳의 맨바닥에서부터 새로 삶의 터전을 만들어 생존해야 한다. 원래 나약했던 주인공 소년 세이와 동료들은, 이런 상황에 떨어진 후에야 서서히 서로의 상황을 직면하며 혼자만의 절망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기 위한 신뢰와 분업을 시작한다. 산 속에서 동물을 사냥하는 법을 시행착오로 익힌다거나 하는 것 이상으로, 서로 돕는 – 혹은 다른 집단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는 – 공동체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보다 훨씬 예전에 나온 고전만화지만 한층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사회 재구축을 그리는 만화가 바로 [표류교실](우메즈 가즈오 저)이다. 초등학교 하나가 통째로 황폐한 이세계, 즉 인류가 멸망한 미래의 세상에 떨어져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멸망의 풍경 앞에 가장 먼저 어른들이 광기로 자멸하지만, 초등학생들은 그 안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학생들을 조직화한다. 정체불명의 외부의 괴물들을 막고, 독으로 가득한 바깥 세상을 탐사하고, 무엇보다 부족한 식량 상황에 대처하며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마치 초등학교 반장을 뽑듯 대통령과 국방장관을 선출하고, 6학년들이 저학년들을 인솔하며 악몽 같은 세계에서 어떻게든 정착하고자 한다.
물론 위의 두 건을 포함, 이런 식의 극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사회 재구성을 시도하는 작품들에서 주로 등장하는 난관은 사람들이 결코 하나로 뭉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목하는 여러 패가 갈리면서, 서로를 굴복시키고 전체의 권력을 쥐고자 하는 충돌이 생긴다. 만인 대 만인의 싸움으로 얼룩지지 않아 당장 살해당할 걱정 없이 밤에 잠을 잘 수 있는, 사회라는 최소한의 생활조건을 지키는 것조차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사회적 역할과 자리
사회라는 기본조건이 흔들릴 정도의 극한 상황이 아닌 나름대로 안정된 사회라면, 그 안에서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자리를 인정받는 것이 바로 그 다음 단계의 생존이다. 화이트칼라 샐러리맨들의 일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박진감 넘치는 연출로 큰 인기를 모은 [미생](윤태호)이 바로 현대 한국이라는 상당히 안정된 사회를 무대로 그런 지점을 살피는 만화다. 평생 프로 바둑 기사가 되고자 훈련했으나 재능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결국 일반 무역회사에 지원하게 된 청년 장그래가 주인공이다. 그는 지금껏 ‘사회 생활’에 대한 연습도 되어 있지 않고, 대학졸업장 같은 너도나도 당연히 갖춰야한다는 듯 들고 다니는 자격증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관료적 사무 체계의 세상을 하나하나 빠르게 배워나가며, 인턴에서 계약직으로 채용되기 위해 전쟁 같은 시험들을 치르고 또 그 다음의 업무에 도전하게 된다. 다만 세상은 그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의 사회적 자리를 인정할 만큼 착하지는 않다.
나름의 이야기적 논리성, 가끔은 사필귀정을 갖추곤 하는 픽션들과 달리, 현실의 사건을 소재로 하는 논픽션에서는 사회적 자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아픔, 안정적 사회에서 생존하는 것에 실패할 때 다가오는 고통이 더욱 뼈저리다. [내가 살던 용산](김홍모 외)은 용산 상업지구 재개발 계획의 틈바구니에서 밀려나 쫒겨나게 된 철거민들이 망루에 올라가서 반대시위를 하다가 진압과정에서 비극적 사상자를 냈던 사건을 소재로 한다. 그 당시 죽었던 철거민들의 사연을 여러 작가들이 하나씩 취재하여 옴니버스 단편으로 합쳐낸 작품이다. 땅의 주인이 아니라서, 다른 어떤 이들만큼 영민하거나 이기적으로 치고 빠지지 못해서, 위협 당할 때 그만두지 않아서, 그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이를 도와야겠다고 그 현장에 들어가서 그들은 이 사회에서 평범한 권리를 누리는 시민으로서의 자리를 잃고 무모한 저항을 하는 철거민이 되어야 했다. 사회가 안정적이라고 해서, 그 안에서 모든 개개인이 손쉽게 생존하는 것은 아니다. 생존을 위협받는 것이 하필 나는 아니겠지 아등바등하거나, 좀 더 많은 이들 내지 모두가 생존 걱정을 안 할 수 있는 사회를 함께 고민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가 있을 따름이다.
그 정도까지도 어느 정도 확보한다면, 마지막으로 나 자신의 개인적 존엄, 개인성의 영역을 살아남게 만드는 차원의 생존이 있다. 누구나 응당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타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친한 척하는 이들, 최악의 경우는 실제로 친한 이들이 가하는 지나친 사적 개입의 압박(‘오지랖’)을 견디고 나라는 개성적 인격이 좀 살아남고자 하는 것 말이다. [결혼해도 똑같네](네온비 저) 같은 만화에서, 부부가 아이를 지금 낳을 생각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조차 주변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주는 세상이라도 꿋꿋하게 자기들만의 재미있는 생활습관들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읽어내면 어떨까. 혹은 남자가 집안 살림을 맡는 것에 이상한 눈길을 주는 생활을 그려내고, 만화에 작가가 추진하는 사업에 대한 홍보를 넣는다고 해서 어떤 독자들이 상업적이라느니 욕하는 엇나간 지적에도 의연하게 그런 내용마저 작품에 새로 녹여내는 [마조와 새디](정철연 저) 같은 작품도 좋겠다. 읽고 공감하다보면, 나 자신의 개성을 지니고 생존하는 작업에도, 남들의 그런 개인성을 존중하여 생존시켜주도록 하는 나 자신의 교양 수준 강화에도 조금씩 도움이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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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학교도서관저널. 특정 컨셉 아래 청소년들에게 추천하는 책들을 묶는 내용으로, 만화를 진득하게 즐기는 것의 즐거움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배합해보자는 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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