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라는 소재를 다루기 [도서관저널 1212]

!@#… 선거 결과를 보고 나니, 새로운 개화기의 혼란(안 좋은 의미로)인 것 같지만.

 

개화기라는 소재를 다루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오늘날은 나름대로 세계 표준처럼 되어 버린 서구식 사회 환경은, 백수십년전까지만 해도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닌 그냥 서구의 모습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쩌다보니 그쪽이 가장 생산력이 뛰어났으며 과학기술의 발전에 친화적이었고 그 결과 무력이 출중했기에, 빠르게 퍼져나간 것이 바로 현대사의 모습이다. 서구식 사회 환경에 자발적으로 빨리 올라타거나, 아니면 식민 지배를 받으며 강제당하거나 말이다. 이미 서구 사회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과학 기술 뿐만 아니라 산업혁명 후의 근대적 생산양식이나 관료화된 사회관리, 명시적 계급사회의 폐지 같은 여러 제도들이 패키지로 묶이며 어느 시기에 갑자기 던져졌다. 그 결과 전통적 사회의 모습과 새로운 자극 사이에 큰 갈등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우리는 흔히 ‘개화기’라고 부른다.

개화기는 서구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일 필요성을 부르짖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 외세의 이해관계와 내부의 엇갈림, 가상적 민족의식과 무시당한 계급의식들이 한데 뒤섞인 일촉즉발의 시대다. 단순한 선악을 넘어 각자의 정의의 충돌이라는 측면이 등장하기도 하고, 그 이전에 당장 정말로 자기 이익을 위해 수많은 인민들을 비탄으로 몰아넣는 악인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런 풍부한 갈등과 더불어, 다양한 이질적 문화들이 함께하며 만들어지면 흥미로운 모습들 또한 가득하다. 그렇기에 당시를 살아가던 이들에게는 치열한 혼란과 희망의 시대고, 그것을 지나온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끝없이 풍부한 대중서사 소재의 보물섬이다.

개화기를 무대로 하는 작품들이 주는 가장 선 굵은 재미는 역시 혼돈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주인공들의 인간드라마다. 아예 가상역사물을 만들지 않는 한, 보통은 굵직한 실제 사건을 중심에 놓고, 실존 인물들이 일으킨 커다란 족적들 사이에서 휘말려 들었든 배후에서 함께 했든 움직인 가상의 주인공들이 바라보는 개화기의 어떤 모습들을 그려내곤 한다. 이런 주인공들은 이 진영 저 진영의 모습들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각자 나름의 정의가 어떤 식으로 충돌하고 어떤 식으로 그 중 대부분은 좌절되는지를 관찰자의 시점에서 독자들과 함께 나눈다.

[용](무라카미 모토카)은 20세기초중반 동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펼쳐지는 대하서사극이다. 이 시기 일본은 재빠른 서구화에 성공하여 서구열강들이 그랬듯 조선, 중국 등을 대상으로 하는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을 펼쳤고, 특히 조선을 삼킨 후 중국에 손을 뻗치기 위해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만든 바 있다. 이 작품은 그 시기를 살아가던 일본인 류, 혹은 중국이름으로 론으로서 살아가던 주인공이 당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던 동아시아 각 세력들과 얽히면서 벌어지는 활극이다. 피식민자들의 처지는 관심 없는 야심찬 군국주의자들, 만주국을 정말로 나름의 대동아 이념의 낙원으로 만들고 싶었던 턱없는 이상주의자들, 민족이 아니라 계급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한 공산주의자 게릴라들, 일본 사회의 이등국민으로 차별받는 조선인들 등 여러 처지의 사람들이 있고, 주인공은 가장 순박한 인본주의적 관점으로 그들 사이에서 해결을 꿈꾼다.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용]의 줄거리들이 딱히 무르지는 않지만, 더 격렬하고 차가운 사상의 충돌과 이상향에 목숨 거는 모습들이 보고 싶다면 [왕도의 개](야스히코 요시카즈)를 추천할만 하다. 조선이 개항을 했으나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의 과도기적 세기초를 무대로 하는 이 작품은, 동아시아 모두에게 가장 정의로운 ‘왕도’를 꿈꾸며 그것을 실현해줄 지도자를 찾아나서는 두 청년의 이야기다. 그 중 한 명은 동아시아 화합을 목표로 하며 조선에서 새로운 근대혁명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일본에 은거중인 김옥균을 추종하게 되고, 당대 일본 지도자들의 군국주의적 팽창주의를 비판한다. 일본의 근대화사상에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전무함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작품으로, 각국 리더들의 복잡한 사정과 역학, 그 안에서 핍박받는 민초들의 모습이 유려하면서도 디테일 넘치게 펼쳐진다. 특히 동학혁명을 이끈 전봉준에 대한 묘사가 필견이다.

개화기의 혼란에서 정의를 묻는다고 해서, 꼭 묵직하고 선 굵은 이야기만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다소 더 강한 상상력 요소를 넣어서 장르적 재미와 개화기 특유의 주제들을 다룰 수도 있다. [풍장의 시대](가리, 이성규)는 어느날 신기가 내려서 십이지신의 수호를 받고 영령을 볼 수 있게 된 크지 않은 양반댁 도련님을 주인공으로 한다. 그는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영적인 지배를 하고자 하는 일본의 무속 세력들에 맞서고, 근대화와 함께 영령의 영역 자체가 사라져가는 상황에 대처하며 혼란스러운 개화기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든지 영적 존재들의 대결 같은 부분에서 살아나는 장르적 재미가, 발달한 도구들로 인해 얻은 큰 힘을 타인들에 대한 수탈을 위해 쓰려는 인간사회의 이기적 우매함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어우러진다.

이보다도 한층 상상력의 자유를 허용하면, 개화기를 현실의 사건이 아닌 가상의 새로운 모습으로 바꿀 수도 있다. 코미디 활극 [은혼](소라치 히데아키)에서 ‘사무라이들의 나라’를 강제로 개화시킨 세력은 서구열강이 아니라 외계인들이다. 메이지 유신 무렵과 비슷한 개화기를 살아가는 해결사 긴토키는 막부말기와 비슷한 칼부림 피바람의 혼란기를 지사로서 뚫고나갔던 은퇴 검객이다. 하지만 이미 개화해서 바뀌어 나가는 세상은 이미 정착해버렸고, 이전의 이념들은 이미 구식이 되어버렸다. 그 속에서 그래도 인간에 대한 의리 같은 나름의 곧은 심지를 지켜나가는 것이 긴토키와 그 동료들이 추구하는 미덕이다(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척 진지한 작품 같지만, 엉망진창 코미디의 비중이 훨씬 높다). 개화기에 충돌하는 각자의 정의만큼이나, 결국 만들어진 세상에서 얼마나 천연덕스럽게 그럭저럭 잘 살아나가는지가 중요한 것이라는 메시지다. 다만 그 안에서 나름의 흔들리지 않는 가치는 끝까지 지켜나가면서 말이다.

가상의 개화기라는 시대착오를 허용한다면, 현대사회에 대한 풍자라는 요소가 한층 자유롭다. 각종 현대 대중문화를 소재에 포함하는 [은혼]도 여기 해당되기는 하지만, 시대착오 개화기를 통한 현대 풍자라는 개그 코드가 핵심을 이루고 있는 [자유부인](데니코)은 훨씬 본격적이다. 주인공격인 마님과 시종인 점년이가 개화기의 신문물을 접하며 벌이는 일상의 에피소드들을 그려내는 작품인데, 개화기가 지난 세기의 실제 개화기이기에는 전자 렌지, 스마트폰 등 수상쩍은 현대 물품들이 많다. 그런데 정작 시각적 스타일은 신문물에 탐닉함과 동시에 근엄한 개탄을 던지던 100년전 대중잡지들의 삽화들을 연상시키며, 말투 역시 마치 이인직의 신소설마냥 고풍스럽다. 이런 괴리를 바탕으로 슬랩스틱, 부조리, 막말 등의 개그코드들이 작품을 이끌며 묘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런 가상의 고풍스러움을 통해서 결국 현대사회의 모습들을 풍자하는데, 노동착취나 청년실업 같은 은근히 무거운 이야기도 경쾌한 개그 속에 녹아들어간다. [자유부인]의 레트로 스타일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얼만큼 원래부터 ‘레트로’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생각해보면, 개화기라는 소재가 매력적인 것은 결국 현대사회가 매일매일 새로운 무언가를 앞에 놓고 갈등해야 하기에 마치 매일매일이 새로운 개화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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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학교도서관저널. 특정 컨셉 아래 청소년들에게 추천하는 책들을 묶는 내용으로, 만화를 진득하게 즐기는 것의 즐거움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배합해보자는 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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