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서 추상을 즐겨보기 [루엘 / 201703]

!@#… 만화와 추상, 장르범주로 분류하려는 것이 아니라 추상성이라는 ‘요소’를 즐기는 방법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 남성 라이프스타일 잡지 루엘 게재.

 

만화에서 추상을 즐겨보기

김낙호(만화연구가)

“다섯 살 짜리가 이것보다는 잘 그리겠다.” 추상미술을 보며 흔히 주고받곤 하는 말이다. 현실감을 재현하는 정교함이 대단한 경지라는 것, 즉 내가 따라할 수 없는 기술적 숙련이 예술이라는 생각의 결과다. 하지만 늦어도 19세기 중반부터 예술은 이미 차고 넘쳐나는 숙련도 속에서, 그 너머를 궁리하게 되었다. 그 중 한 가지 접근이 바로 추상, 즉 현실의 무언가를 모사하여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미적 형태요소의 작용 그 자체를 포착하고 전달하는 시도다. 느슨하게 비유하자면, 사과와 최대한 비슷한 맛을 따라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단 맛과 신 맛의 본질과 균형 자체를 찾아보는 셈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기에 이상해도 무언가 대단한 의미가 있기는 하겠거니 기대를 하는 것이 익숙한 일반 미술도 아니라, 대중서사물이라는 틀 바깥에서는 좀처럼 생각되지 않는 만화라는 예술 양식에서 추상을 즐겨보는 것이 가능할까. 몇몇 흥미로운 경향을 통해서, 추상성과 만화의 만남의 재미를 짚어본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만화의 표현 방식은 이미 시각화한 추상성으로 가득하다. 흔한 달려가는 캐릭터의 뒤에 붙어있는 “동작선”은, 현실에서는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아닌 방향과 속도라는 척도가 눈으로 보이도록 그려진 것이다. 충격 받은 주인공의 뒷 배경에는 불안한 선과 무늬가 어지럽게 교차하여 감정을 전달한다. 칸의 크기, 길이, 분절의 자잘함이 시간 흐름의 이완과 긴박함을 해석해준다. 그저 칸과 칸이 병렬되어있는 것으로, 감상자가 어떤 연속성을 연상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일반적인 현실감 재현으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과정을 더 효과적으로 해내기 위한 보조적 기법로 활용되는 선에 머문다.

그렇다면 만화에서 추상을 보조재가 아니라 핵심에 가깝게 부각시키는 일련의 조류 내지 장르는 어떤 모습인가. 한 가지는 회화 미술에서 이미 오래 전에 개척했듯 현실에 있는 형상의 재현을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바탕으로 이입할 서사의 재현을 버리는 것이다. 엄밀하게 추상만화라고 규정하려면 두 요소 모두가 필요하지만(예를 들어 만화연구자 김주하는 구상적 형태를 지녔지만 미적 요소로서만 쓰면서 서사는 배제한 만화를 ‘추상적 형식만화’로 세분화한다),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좀 더 느슨하게 접근해도 좋다.

추상성을 추구하기 위해 서사를 제거하는 재미있는 시도로는 니클라우스 뤽(Niklaus Rüegg)의 [귀신들림 Spuk]이 좋은 사례다. 이 작품은 흔한 디즈니 모험만화의 페이지 구성을 그대로 가져오되, 캐릭터와 말풍선, 문자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 결과로 구체적 또는 추상적인 배경이나 소품만 고스란히 남아있는, 부재의 을씨년스러움과 서사를 암시하는 번잡함이 묘하게 공존하는 기이한 감각을 던진다. 만화에서 기대하는 일반적인 서사 장치들이 없는 상태에서 독자는 실제 서사가 아니라 서사의 느낌만을 감상자 스스로 상상해내도록 유도당한다.

이런 시도는 너무 일반적 만화의 모습과 달라서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 사사키 마키의 단편 [해변의 거리]부터 도전해보는 것도 좋다. 작품이 발표되었던 당대에 ‘넌센스 만화’로 통칭되었던 이런 전위적 시도는,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는 모순 가득하고 복잡한 세상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한탄 내지 조롱하는 하는 접근에 가깝다. 과밀한 도시, 미국대중문화 아이콘, 전쟁, 산업만능 물신화, 비인격화된 인간 등 일본 현대 사회의 단면들이 어지럽게 서로 충돌하고 반복되며 묘한 리듬감을 만들어내되, 그 어떤 것도 실제로 이야기로 완성되지 않는다. 각각의 칸을 보면 익숙한 카툰화법의 그림이고 전체 페이지를 얼핏 보면 화려한 액션이나 진지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느낌이지만, 자세히 볼수록 의미가 없다. 즉 당대의 시각적 상징을 가득 모아내되, 오로지 칸과 칸의 충돌에서 생기는 이질감과 충격에 집중시키는 경우다.

한편, 현실을 옮긴 형상의 해체라는 측면은 좀 더 감상의 장벽이 높다. 무늬와 형체, 색상 자체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정서적 반응 요소라니, 전달의 과정이 너무 열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상의 매력으로 인도하는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점진적으로 형상 너머의 감성을 강조하는 것인데, 뱅상 포르땅(Vincent Fortemps)의 [정상(Cîmes)]이 좋은 사례다. 이 작품은 느슨하게나마 구체적인 서사의 흐름이 있고 그림 또한 현실의 무언가를 재현하고 있기에 본격적인 추상의 범주로 보기는 어렵겠지만, 흑백의 크레용을 뭉개는 기법을 통해서 형상 자체보다는 회색의 풍경이 자아내는 불안하고 경계선적인 심상만이 끊임없이 부각된다.

좀 더 본격적으로 추상의 형상에 빠지고 싶다면, 벨기에 작가인 앙투안 오랑드(Antoine Orand)의 작품들이 제격이다. 일종의 모음집인 [상대적인 것 Relatives]에서 그는 기하학적 면, 선, 여러 밝은 색의 배치로 장면을 만들고, 장면이 칸을 거듭하며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어 시간의 흐름이나 움직임의 느낌을 만들어낸다. 그림이 산이나 태양 같은 것을 연상시킬 때도 있지만, 그 경우조차 도형을 최대한 단순화하여 그것이 현실의 모사가 아니라 감상자의 연상이라는 거리감을 준다. 거리에서 흔히 볼만한 물건들의 모습을 칸 안에 넣기도 하지만, 그 물건이 만드는 어떤 서사성이나 상징보다는 반복과 배치의 변화를 통해서 그저 형태에 집중하게 유도한다.

그러다보면 당연히 글과 그림의 영역 구분도 해체될 수 있다. 우유각소녀의 [hakpage]에서, 작가는 무의미한 아이콘으로 만든 유사 상형문자를 의미를 뚜렷하게 특정할 수 없는 그림 형상과 함께 배치했다. 얼핏 보면 외계버전의 이집트 벽화 같기도 하고, 어쩌면 작가가 정말로 정교한 언어체계를 고안했을 수도 있지만, 감상의 즐거움은 그보다 훨씬 즉각적이다. 글과 그림의 병렬이 주는 흔한 만화적 서사의 느낌에서, 실제로는 언어적 의미가 배제되었기에 다가오는 가벼운 당혹감 같은 것이다. 소소한 낙서체 그림을 통해 일상적 소소한 즐거움의 정서를 연상하든, 혼란 그 자체를 즐기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상자의 몫이다.

이렇듯 추상을 강조하는 일련의 예술만화들은, 캐릭터와 이야기를 읽어내려는 독자와 그것을 의도적으로 제거하여 폭을 열어놓는 작품 사이의 긴장을 만든다. 그저 간략화한 선과 면의 연속인데 우리는 이입할 만한 형상과 감정을 찾아낸다. 격리된 형상들이 반복되는데 그것을 굳이 움직임으로, 시간의 흐름으로 읽으며 그 안에서 서사의 인과를 만들고야 만다. 결국 서사의 측면이든 형상의 측면이든, 추상을 추구하는 만화 조류의 가장 강력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가 만화를 볼 때 얼마나 강력하게 상상력을 발휘하며 적극적으로 해석에 참여하는지를 직면시켜주는 것이다.

덤으로, 관심이 동하여 그쪽 방향의 더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싶다면 안드레이 몰로티우(Andrei Molotiu)가 여러 북미지역과 유럽 작가들의 추상적 작업을 엮은 2009년 모음집 [추상적 만화 Abstract Comics]를 권장한다. 추상만화의 모태를 스타인버그나 크럼의 초기 형식실험에서 발견하고는 개리 팬터 같은 북미 전위만화의 스타급 작가까지 자연스레 연결해내는데, 추상적 요소를 가볍게 강조한 작품부터 좁은 의미의 본격적 추상만화에 가까운 작품까지 넓은 범위를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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