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에도 다른 글로 지적한 바 있고 이번 본문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한국어판의 번역 품질은 좀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이 작품 특유의 일상성과 유머러스함이 상당히 많이 뭉개지니까. “Russians are not like us” 라는 대사를 “러시아인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단다”(불어판이 아닌, 영어판에서 중역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라고 쓴 것은 그나마 아예 명백한 오역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여튼 전문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주는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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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통찰하는 유머 – <페르세폴리스>
김낙호(만화연구가)
사회라는 생물은 복잡하고 거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번에 사회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특히 사회를 읽어내고자 하는 사람이 그 사회 속에 들어있다면 더욱 더 시야와 세계관이 한정되기 마련이다. 사회학자들이든 작가든 혹은 단순히 일상을 영위하는 일반인이든 누구나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거꾸로, 시각이 제한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애초부터 당당하게 내세우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소설 등으로 대표되는 서사극에서 그것은 ‘1인칭 작가 시점’이라는 것으로 구현된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는 그 상황 속에 처해있는 어떤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담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를 읽어냄에 있어서 전모는 커녕 일반인 수준의 파악도 되지 않는 사람의 주관적 시각이라면 어떨까. 우매한 자의 눈, 즉 일반적인 남성 성인 주도의 사회 속에서는 사회적 역할이나 지식이 한정되어 있는 주부, 아이, 바보 등의 시점 말이다. 비록 이야기 속 상황을 읽어냄에 있어서 대단히 답답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우매한 자의 눈’은 매력적이다. 우매한 자의 눈으로 보면 사회 속 우리가 일상적으로 영위하면서 살아나가는 과정이란 참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것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일반인’인 독자들은 처음에는 그 괴리를 보면서 유머와 아이러니의 재미를 느낀다. 그런데 사실 약간만 생각해보면, 우매한 자의 눈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이 사회는 말도 안되는 것들 투성이인 것이다! 약자의 입장에서 사회적 통찰로 이르는 이 과정 속에 독자들은 거부감 없이 쉽게 녹아들어간다. <포레스트 검프>, <케빈은 열두살>, <양철북>,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등 많은 이야기 작품들이 우매한 자의 눈을 성공적으로 활용해왔다.
일상과 커다란 사회적 흐름이 맞닿아 있는 이야기에서, 이 기법은 더욱 빛을 발한다. <페르세폴리스>(마르잔 사트라피 / 새만화책 / 1권 발매중)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 놓여있는 수작이다. 현대 이란이라는 사회가 있다. 물론, 서울에서 가장 땅값 비싼 곳 가운데 하나가 무려 테헤란로라고 이름 붙인 것과는 달리, 이란에 대해서 한국에 알려진 바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작품을 보면서 파악할 수 있듯 독재정권과 민주화 운동, 짧은 해방감과 근본주의 진영의 반동에 의한 독재 재개, 이웃나라와의 전쟁, 미국의 개입… 순서와 패턴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유사한 현대사의 재료들을 가지고 만들어진 곳이다. <페르세폴리스> 1권은 이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꼬마 마르지, 즉 작가 자신의 자전적 체험담이다. 여자 아이의 우매한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현대사의 격변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여러 모순과 함의, 그리고 희망들이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게, 그냥 일상적으로 펼쳐진다.
주인공 마르지는 비록 진보적 성향의 집안의 딸이지만 여하튼 꼬마인 덕분에 사회주의, 종교근본주의, 민주주의 같은 담론 덩어리들도 고뇌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일상 속의 피상적 표어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삶은 직접적으로 영향 받는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그러했듯, 정작 감동적인 것은 실제로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인 것이다. 그 삶 속에는 사회운동가 아누쉬 삼촌의 이야기, 폭격으로 사라진 친구 이야기 같은 무거운 순간들이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의 인기 여성 락커 킴 와일드의 포스터를 밀수해 들여오고 이웃끼리 술파티를 벌이는 즐거움의 순간들도 있다. 조숙하고 활달한 꼬마 마르지의 행동들, 그리고 그 순간을 지금 자신의 눈보다는 어린 시절의 우매한 눈으로 회상하는 작가 사트라피의 유머감각이 함께 녹아들어가면서 작품은 유머와 진지함, 품격과 발랄함을 얻어낸다. 그 속에서 자유와 억압, 생활과 이념, 격변기 이슬람 세계 속 여성의 위치, 중동과 서방세계의 문화적 관계 등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틀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만화로서의 연출 효과 역시 큰 매력이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 그리고 프랑스 만화가 다비드 베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간결한 흑백 그림체는 아이의 눈과 사회의 복잡함이라는 추상적 느낌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가끔 칸 내에서 화려한 미장센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칸 간 연출의 기본은 쉬운 독서가 가능한 명료한 스타일을 따른다. 많은 부분에서 아이의 언어를 바탕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서구만화 특유의 장황한 대사와 나레이션의 압박 역시 상대적으로 덜하다. 사회적 텍스트로서,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효과적인 만화 표현으로서 모두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인 셈이다.
확실히 이런 우수한 만화가 소개되어 들어오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에는 번역 문제에서 다소 만족스럽지 못하다. 물론 1권의 부제인 ‘어떤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내 어린 시절 이야기’로 번역되어서 한 사회를 바라보는 이야기인 이 작품의 의미를 한 개인의 특이한 경험담으로 축소하는 등의 미묘한 차원의 실수는 그냥 아쉬움으로 남길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품의 핵심적인 매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모스크바’ 에피소드의 첫 대목이 대표적이다. 원래는 마르지가 데모하다가 잡혀가서 고문을 당한 경험이 없는 아빠를 둔 자격지심 때문에, 학교 친구들에게 자기 아빠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허풍을 떨고 아이들은 그 허풍이 너무 심해서 기가 질리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진짜로 운동하다가 투옥되고 고문당한 삼촌 야누쉬를 알게 된 후 그것을 자랑해도 친구들이 여전히 허풍이라고 생각하는 부분과 댓구를 이루며 훌륭한 유머감각을 발휘한다. 하지만 번역판에서는 오역으로 인하여 이런 내용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에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매한 자의 눈으로 만들어지는 역설과 유머를 통해서 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이 작품의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사례다. 만화라는 장르가 꼭 유머라는 고정관념에 매몰될 필요는 없지만, 반대로 작품성 있는 만화라는 이유만으로 유머라는 큰 매력이 억지로 거부당해야 할 이유도 없을 터인데 말이다. 2판부터는 이러한 지점들이 잘 수정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또한 이란 사회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무지를 고려할 때, 역사 문화적 맥락을 설명해주는 해설이 첨부되었더라면 하는 바람 역시 간절하다.
<페르세폴리스> 1권의 결말에서 사춘기의 나이로 프랑스로 유학을 간 마르지는, 2권에서 서구 생활의 풍파를 겪은 후 다시 이란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선 그녀는 이미 더 이상 아이의 우매한 눈이 아니라 성숙한 성인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이번 출간된 1권의 매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세폴리스>는 ‘사회성과 작품성이 있는 서구만화’의 왕좌를 오랫동안 지켜온 <쥐>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멋진 작품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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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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