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미국의 경우 [YMCA/0410]

!@#… 오랜만에 써낸 애니메이션 일반 관련 글. YMCA의 아동을 둔 부모용 소개책자에 들어간 원고. 뭐 그냥 매우 간략한 미국 애니메이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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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미국의 경우

 

미국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뭐라고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일본이나 한국의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독특한 어떤 정서가 생각날 것이다. 디즈니의 화려한 뮤지컬, 의인화된 귀여운 동물캐릭터들의 정신없는 추격전, 망토 두른 슈퍼히어로들의 권선징악 모험담…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누구나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인데, 그만큼 미국의 애니메이션은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대중문화의 일부분인 셈이다. 이번 지면을 빌어서, 미국 애니메이션이 걸어온 길을 간략하게 소개해보도록 하자.

애니메이션이라는 오락

  정지된 물체에 착시효과를 이용해서 움직임을 부여하는 기술, 즉 애니메이션이라는 기법은 유럽의 재주꾼들이 발명했다. 하지만 그것을 보편적인 영화산업과 결합시켜서 대중문화의 총아로 가꾸어낸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미국의 몫이었다. 출중한 만화가이자 애니메이터였던 윈저 멕케이가 1914년에 <공룡 거티>라는 작품으로 테이프를 끊은 이래로, 미국에서 애니메이션은 효과적인 오락물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움직이는 선화’의 수준이기는 했지만, 움직임 자체가 주는 매력 덕분에 무성영화의 시대에 애니메이션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보고로 여겨졌다. ‘광대 코코’, ‘베티 붑’ 등 둥글둥글한 인간 캐릭터들의 슬랩스틱, ‘벅스 버니’를 수장으로 하는 루니툰 시리즈, 그리고 어느틈에 미국의 상징 자체가 되어버린 ‘미키마우스’의 데뷔까지, 193-40년대는 미국 애니메이션이 자랑하는 천재들이 대거 데뷔한 첫 번째 황금기였다. 슬랩스틱 코미디, 쫒고 쫒기는 추격전, 황당하리만큼 자유로운 발상들… 등의 특징들은 이미 이때 확립된 것들이다.

침체의 늪

50년대에 들어서 TV의 도입으로 극장 영화가 나름대로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 애니메이션은 빠르게 적응했다. UPA 스튜디오에서 개발하고 결국 한나-바바라에서 완성시킨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스타일’(그림의 숫자를 대폭 줄이고, 같은 장면의 반복 활용, 배경의 변화 등을 이용해서 경제적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기법)이 그것이다. 한나-바바라는 <톰과 제리>를 필두로, 80년대까지 수십년간 ‘스쿠비-두’ 같은 모험물, 벨기에 만화가 뻬요 원작의 ‘스머프’  시리즈, ‘마스터즈 오브 더 유니버스’ 같은 히어로 환타지물까지 다방면의 TV 시리즈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보수화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TV 시리즈는 더 이상 악동의 모습을 장려하기보다는 공식화된 권선징악과 어린이들을 위한 교훈을 억지로 담아내면서 점차 창조적인 수명을 소진하고 있었다. 아동층에 맞춘 엄격한 윤리 검열의 잣대, 그리고 1세대 천재작가들의 은퇴 덕분에 발생한 심각한 소재고갈 덕분에, 80년대에 들어서자 아예 6-70년대 인기 시리즈의 재탕이 줄을 이었다.

그 동안 극장에서는 실사영화가 TV와 경쟁하기 위해서 점점 더 스펙타클 위주로 발전하고 있었고, 그 틈바구니에서 유일하게 성공을 거두고 있던 것은 월트 디즈니 정도였다. <백설공주>에서 확립한 동화/어린이 문학에 기반한 권선징악 스토리에 스펙타클한 화면, 양념처럼 들어간 슬랩스틱 개그, 그리고 뮤지컬의 어법을 입힌 이 스타일은 이후 미국식 극장 애니메이션의 가장 주류적인 법칙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전형 이외에도 다른 스타일의 좋은 작품들은 꾸준히 이어졌다. 랄프 박시의 <고양이 프리츠>, <불과 얼음> 등의 성인 지향 애니메이션을 꾸준히 시도했고, 인기 TV시리즈 <트랜스포머>에 기반한 넬슨 신의 <트랜스포머 더 무비> 등 SF모험물도 만들어졌다. 나아가 베이스/랭킨 프로덕션의 <마지막 유니콘>, <용의 비행> 등 정통 환타지물도 나름의 팬층을 확보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대중적 성공은 거의 전적으로 디즈니의 몫이었고, 심지어 그 디즈니도 80년대에는 침체기라고 자인했을 정도였다.

화려한 복귀

이러한 상황은 1989년에 뒤집혔다. 오랜 외도(?) 끝에 결국 다시 가장 고전적인 동화 뮤지컬 스펙타클로 복귀한 디즈니의 <인어공주>가 대형 히트를 기록한 것이다. 극장에서의 히트는 다른 많은 스튜디오를 자극하고, 나아가 TV시리즈의 새로운 붐도 같이 견인했다. 특히 TV 애니메이션의 소비자를 아동층에 한정짓는 고정관념은 80년대 동안 꾸준히 깨져왔고, 새로운 세대가 90년대의 시작과 함께 제작의 전면에 나섰다. 그 결과 직설적인 풍자로뭉친 <심슨 가족>, 실험적 스타일로 젊은 층을 매료시킨 <이언 플럭스>, 아동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러그래츠> 등의 작품들이 등장했다. 나아가 전성기의 캐릭터들을 새롭게 재해석한 <배트맨>등 복고풍의 작품들 역시 큰 인기 얻으며, 미국 애니메이션을 90년대에 새로운 호황으로 이끌었다. 95년에 3D 컴퓨터 그래픽으로 무장한 <토이 스토리>까지 가세하면서, 이러한 바람은 90년대 후반에 절정으로 달아올랐다.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킹>까지 만들기만 하면 성공하는 디즈니, <이집트의 왕자>를 필두로 한 드림웍스의 경쟁, 새로운 디즈니를 꿈꾸며 야심차게 <아나스타샤>를 내민 워너브러더스 등이 극장에서 판을 벌였다.

하지만 2000년대에는 이 거품 역시 다시금 정리된다. 비슷한 스타일의 범람으로 인하여 극장에서 외면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여파로 <아이언 자이언트> 같은 명작마저도 흥행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종가노릇을 하던 디즈니 역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1/3로 줄이는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불황이 이어졌다.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TV 시리즈 역시 이미 세계적으로 힘을 얻은 일본발 작품들에 밀리면서, 한줌의 <심슨 가족>류 풍자물 이외에는 저연령 아동층으로 다시 위축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호황과 불황은 원래 계속 교차하며 오갔던 만큼, 언젠가 다시 호황이 불어올 때 새로운 활력으로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라도 충분하다.

오늘날, 미국에서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것

현재, 미국에서 애니메이션은 대략 3가지 차원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저연령층용 TV애니메이션 (러그래츠 등), 성인 지향 TV 풍자물 (심슨 가족 등), 전 연령층용 극장 개봉작 (디즈니, 픽사 스튜디오의 작품들). 모든 것을 공평하게 다 좋아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각 영역들은 뚜렷한 자기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매니아의 전유물에서 급속하게 일반으로 확대되고 있는 ‘아니메’(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그 질서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사실 7-80년대부터 일본 TV시리즈물 가운데 ‘명작극장’ 시리즈가 미국에서도 소개되었으며, 80년대 중반에 <마크로스> 시리즈를 번안한 <로보테크>가 젊은 층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포케몬>으로 대표되는 본격적인 일본‘색’ 작품들이 2000년대 이래로 미국에 빠르게 정착해 나가면서 아동용/청년용, 일반인/매니아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있는 중이다. 물론 여기에 자극받아서 전통의 디즈니에서조차 <킴 파시블>같은 10대용 모험물을 TV 시리즈로 만드는 등, 어쩌면 다시금 미국에서 애니메이션을 호황으로 이끌어 나갈 자극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고 있다. 물론 아직은 그 결과가 어느 쪽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개방적인 교류, 그리고 그것에 함몰되기 보다는 오히려 창조적으로 영향 받고 활용해내는 건강한 창작 풍토를 장려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경우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함이 아닐까. 그것은 분명히, 비단 먼 나라 미국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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