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modem님의 질문, “왜 로저래빗이 아니라 인어공주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르네상스 신호탄인가?” 에 대한 답변이 좀 길어져서, 따로 포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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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지적입니다 :-) 뭐 제가 그쪽으로 현재 공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관련분야 연구자로서의 가락이 있으니, 이왕 이야기 나온 김에 제가 아는 바를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1) ‘누가 로저래빗을 모함했나‘(이하 ‘로저래빗’)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인이 아닌, 실사 가족영화 라인을 부활시킨 공로자입니다. 우리가 흔히 디즈니 극장 애니메이션으로 이야기하는 ‘디즈니 클래식’ 라인과는 별개의 경로로, 로저래빗의 성공은 이후 ‘애들이 줄었어요’ 같은 라인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디즈니 극장용 영상 콘텐츠 분야 전체의 부활을 이끌었다는 리더스다이제스트의 지적 역시 틀리지는 않습니다.
2) 솔직히 로저래빗은 디즈니 전통의 힘보다는 스필버그 사단의 힘입니다. 제작자, 감독 뭐 하나 스필버그 계열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애니메이션 파트의 제작과 영화 배급에 있어서 디즈니가 관여되었을 뿐이지, 작품의 색은 전혀 디즈니 계통과 맞지 않습니다. 심지어 애니메이션의 슬랩스틱 성향마저도 전형적인 워너브라더즈 ‘루니툰스’ 계통의 말썽장이들이지, 디즈니식 활극이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디즈니 계열에서는 그런 색의 작품이 단 하나도 나온 적이 없는 문자 그대로 전무후무한 작품. (하기야 그런 식으로 보자면 ‘크리스마스 전야의 악몽’도 비슷한 경우입니다만, 최소한 명절과 활극과 뮤지컬 등 당시 히트치던 디즈니 클래식스러운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해서 비틀었죠. 즉 디즈니 입장으로서는 전통의 히트요소를 이어가면서도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하는 분위기였고, 그래서 십수년전 내팽개친 팀버튼의 기획을 다시 받아들인 것입니다)
3) 로저래빗은 88년 개봉, 인어공주는 89년 개봉입니다(한국에서는 91년에 개봉했지만). 보통 2-3년씩 걸리는 디즈니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제작기간을 놓고 고려할 때, 로저래빗의 성공이 인어공주의 제작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힘듭니다. 일례로, 제작시기상 인어공주의 성공의 영향을 받지 못한 – 즉 뮤지컬도 낭만도 없는 – 90년에 개봉한 ‘코디와 생쥐구조대’는 80년대 후반의 여타 흥행실패 디즈니 클래식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묻혀져버렸습니다(라고 해도 수입 2800만불).
즉 카첸버그가 디즈니의 총체적 부활을 위해서 실사라인에서 로저래빗 프로젝트를, 디즈니 클래식 애니메이션 라인에서 인어공주를 추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어공주에서 시도한 뮤지컬+스펙타클+낭만+모험의 요소의 성공은 91년 ‘미녀와 야수’로 완전히 굳히기 모드에 들어갔고, 93년 ‘알라딘’부터는 뭐 공식이 되어버렸죠. 그리고 결국 94년의 라이온킹에서 피크를 이룹니다. 디즈니의 3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번갈아가면서 1년에 하나씩 폭발시킨, 거칠 것 없는 시절이었죠. 카첸버그가 디즈니를 나가고, 무능한(…) 아이스너가 적당히 히트공식을 계속 우려먹는 걸로 현상유지를 하려고 발악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여튼 결론은: 90년대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르네상스 신호탄은 ‘인어공주’가 맞습니다. :-)
!@#… 뭐, 이왕 로저래빗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글을 보면 로저래빗의 제작이 얼마나 이질적이었고, 그 결과 엄청난 흥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프랜차이즈가 더 전개되지 않았는지 꽤 자세한 설명이 나와있습니다. 그냥 간단히 요점만 뽑자면,
(1) 캐릭터 저작권 문제: 루니툰과 디즈니 가족을 한 자리에 모아놓는 꿈의 경연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2) 기술적 난이도: 모든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효과가 아날로그 장인정신이었으니까요. 메이킹 다큐를 보면, 절로 기립박수가 나옵니다. 물론 작품 자체도 사실 기립박수감이지만.
(3) 스필버그 사단과 디즈니의 충돌: 이게 좀 재미있습니다. 원래는 로저래빗 단편을 몇편 계속 제작해서 프랜차이즈의 생명력을 유지하다가 극장판 속편 등으로 갈 계획이었는데… 로저래빗 단편을 붙여준 덕에 여차저차 성과를 올린 디즈니의 ‘딕트레이시’와 그 때문에 단편을 못넣어서 겨우 턱걸이한 앰블린의 ‘아라크네의 비밀’을 계기로 틀어지기 시작. 결국 스필버그가 이후 단편들에 계속 몽니를 놨습니다. 게다가 ‘쉰들러리스트’로 기억과 관용의 힘에 눈떠버리면서, 이후에는 나치를 악역으로 내세우는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라이언 일병 구하기’만 봐도, 나치가 악의 화신이 아닌 단지 상대편 군인들로 묘사되죠). 그런데 하필이면 극장판 로저래빗2의 스토리가 젊은 로저래빗이 1940년대에 헐리웃에 진출하는 내용의 프리퀄이고 당시의 처녀 제시카는 나치의 스파이-_-; 그래서, 퇴짜. 브로드웨이를 무대로 하는 새 각본이 나온 97년에는 이미 카첸버그가 디즈니를 떠나 스필버그의 품으로. 우여곡절 끝에 그래도 제작이 될 뻔 했으나, 이번에는 디즈니의 아이스너 사장이 예산 과다를 이유로 퇴짜. 그이후로 하필이면 애니-실사 합성영화들이 다 허접하게 만들어져서 죽을 쑤는 바람에 더욱 더 부활의 가능성 소멸. -_-;
!@#… 멋진 작품, 게다가 성공한 작품이라고 해도 꼭 강력한 프랜차이즈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죠. 사람들 사이의 알력이 시간을 지연시키고, 시간의 지연 속에 시장성은 불확실해지고(떨어지고), 그 결과 묻혀버립니다. 이런 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딱 그 반대방향이죠. 작품이 묻히지 않게 계속 팬들의 담론 속에 유통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장성을 증명해주고(즉 열심히 관련 상품을 소비하고), 그 결과 제작자들에게 알력이고 자시고 간에 다 극복할 만한 시간과 이권의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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