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천 만화정보센터 만화규장각(http://www.kcomics.net) 웹진 커버스토리용으로 기고한 글. 기고 버젼은 밑의 주소 (로그인 필요). 당연히 다른 꼭지들과 맞물려서 좋은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에 (게다가 도판도 있고) 가서 읽기를 추천함.
!@#… 보통 그렇듯이, 여기 올리는 건 애초에 기고한 버젼. 사실 벌써 일이년전에 했어야 할 이야기인데 자꾸 미루고 미루다보니 이제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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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만화, 한국을 방문한 이후의 이야기들
“유럽에서, 만화는 제9의 예술이라고도 불리우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단하다는 예술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는지, 서구만화라는 ‘장르’는 90년대 말 이래로 한국에서 적지 않게 출판되어 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 시점에 이르러서는, 나름대로의 비평적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정도로 한국에서 나름의 인지도를 지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 역시 지금 자판을 펼쳐들고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하지만 굳이 이 지면에서 또다시 무슨 ‘만화는 서양에서는…’ 어쩌고 하는 방정맞은 소리를 할 생각은 없다. 한국만화가 유럽에서 잘나가고 있다느니, 그러니까 우리도 그들을 좀 더 잘 알아야 한다느니 하는 천박한 등가교환을 주장할 생각에서 꺼내는 이야기 역시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단지 ‘그들의 나라에는 이런 만화도 있다’고 보따리 짐을 풀어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더 이상 별로 안 신기하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서구만화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서구만화를 논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서구만화”를 논할 시간이다.
문화 충격의 진상
사실 서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그 넓디 넓은 영역을 한꺼번에 묶어내는 대단한 법칙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얼추 프랑스/벨기에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럽 및 그 영향권 하의 만화경향들, 그리고 미국/캐나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어모국어 세계의 만화경향들을 거칠게 묶어볼 뿐이다. 한마디로, 낮선 것들이기 때문에 적당히 묶은 편의적인 발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분명히, 한국 만화만 읽던 독자들이 일본 만화를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이질감보다는 A4보다 큰 사이즈의 얇은 컬러 책자(‘알붐’)으로 이루어진 책을 처음 펼쳐들었을 때 느낀 감정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대본소 무협만화만 보는 사람이 오타쿠틱한 안경미소녀 모에 SM물을 만날 때 느끼는 진입장벽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한마디로, 우리가 서구 만화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낀다고 생각하는 격심한 충격이나 진입장벽은 그것이 특별히 서구의 것이어서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생활 방식 전반에서 서구 문화에 익숙할 대로 익숙하고, 영화니 드라마니 하는 것들은 위화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 않던가. 다만 말하는 내용이나 표현하는 방식 – 다시 말해서 아직 충분히 익숙하지 않은 다른 장르의 만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느낄 정도의 차이를, 여러 이유에 의하여 일부러 과대 포장했기 때문이다. 꼬마악동을 주인공으로 하는 <띠떼프>가 80년대의 한국 명랑만화와 비슷한 감수성을 공유한다는 사실보다는, <니코폴>이 고밀도 화풍과 난해한 철학적 주제로 ‘지금껏 만화에서 접해보지 못한’ 심오한 경지를 이룩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서양 만화들이 한국에 들어온 이야기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래된 만남
사실 서구만화의 유입이 90년대 말에 촉발되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원래 서양만화와의 조우는 훨씬 오래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5-60년대 <라이파이> 같은 작품들에는 분명히 미국의 골든에이지 슈퍼히어로 만화들의 영향관계를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으며, 신기한 세계를 다루는 모험물/SF물은 유럽의 극화체 모험물들의 모습과 분명히 닮아 있다. 비록 정식 번역출판은 아니더라도, 창작의 차원에서의 조우는 이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60년대 대본소 체제의 타락과 함께 장르적 다양성이나 깊이가 위축되면서, 한동안 서구만화는 시야 밖으로 물러나는 듯 했다.
본격적인 ‘유럽만화 연재’는 70년대부터였다. 당시 <소년중앙>은 프랑스의 국민만화 <아스테릭스>의 연재를 시도했는데, <피너츠>류의 4칸 만화가 아닌, 보다 긴 호흡의 스토리만화를 직접 번역 개재한 첫 사례였다. 어린이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모험만화 장르는 당시에 분명한 수요가 있었고, 적절한 유머와 참신한 소재들으로 중무장한 유럽의 히트작들은 좋은 소스였던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스테릭스>는 유럽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구석이 많은 작품이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고 단명했다(애초에 정식 라이센스 계약은 맺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굳이 따지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리고 82년 창간된 만화 전문 아동잡지 <보물섬>에 벨기에 만화 <땡땡>이 연재되었다. 2도 인쇄로 인하여 색이 뭉개지기는 했지만, 명료한 그림체와 신기한 모험담으로 인하여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 가거나, 단행본 출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서 94년, ‘코스모스’라는 소규모 출판사에서 이들을 알붐 형식으로 출간하기 시작했으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낮은 번역품질이나 마케팅의 부재로 인하여 별다른 인지도를 확보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외에도 환타지/SF 만화 전문잡지인 <헤비메탈>의 한국어판 출간시도가 있었으나, 거의 창간과 동시에 폐간되고 말았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만화책의 영역’에서 보았을 경우일 뿐이다. 유럽식 만화가 가장 널리, 오래전부터 유입되어 온 부분은, 소위 ‘만화시장’이 아니라, ‘아동’ 코너다. 많은 아동도서의 동화체 삽화 그림 등으로 유럽의 만화(식 글그림) 들이 일부 유입되어 있었다. 그 이름은 항상 ‘그림책’이었지만, 심지어 빌헬름 부쉬의 ‘막스&모리츠’ 같은 만화의 모태로 불리우는 고전들 마저도 태연히 이미 들어와 있던 것이다. 레이몬드 브릭스, 모리스 센닥 같은 동화책과 만화의 영역을 아우르는 작가들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 또한 아동 학습 서적, 특히 어린이 영어 교재에 미국의 슈퍼히어로 만화나 디즈니표 만화들의 영한 대역본이 실리는 것 역시 크게 낮선 경우가 아니었다. <피너츠>, <블론디>등 신문연재 코믹스트립은 영어교재로서 단행본화되거나, 아니면 아예 그냥 선물용 시집처럼 묶여나왔다. 인문 코너와 에세이 코너 역시 어느 틈에 서구만화가 비집고 들어온 경우였다. 장 자크 상페의 만화들은 에세이 코너의 부동의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으며, 슈피겔만의 <쥐>는 퓰리처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만화 코너가 아닌 인문/논픽션 서가에 비치되도록 해주었다. 99년의 ‘서구만화 붐’ 이전에,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서구만화는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고상함의 발명
1999년, 한국에서는 교보문고, B&B, 현실문화연구 등 여러 출판사들이 한꺼번에 유럽만화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만화 출판 러시를 이루었다. 이 중 가장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은 교보문고 출판부였는데, 대학 교재, 또는 인문학 서적 등을 내고 있던 경력답게 실제 작품의 출시보다 먼저 서구만화를 제대로 소개하면서 붐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만화를 보러갔다>(이동훈 저)의 출간을 필두로 시사주간지 <뉴스플러스>에서 연재된 바 있는 <세계만화탐사>(성완경 저)의 출간을 기획했으며(아쉽게도 원고 스케쥴 지연으로 인하여 결국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여기에서 중점적으로 소개된 바 있는 작품들 – 즉 ‘서양만화사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명작’ 위주의 라인업으로 출판을 시작했다. <잉칼>, <기울어진 아이>, <흑란>, <제롬 무슈로의 모험> 등이 이들의 행보였다. 현문코믹스라는 레이블을 만든 현실문화연구 역시 기본적으로는 <니코폴> 등으로 명작노선을 따랐지만, <임몽디스>, <이비쿠스>, <벼룩만화 총서>등 재능 있는 90년대 작가들의 다양한 표현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노선을 택했다. 이에 비해서 B&B(현재 아트나인)는 다른 접근방식을 시도했다. 즉 <피터팬>, <상브르>,
이미 이쯤이면 알아차리셨으리라. 서구만화가 제9의 예술이니, 예술만화라는 식으로 인식되도록 한 것은 이 시기의 ‘발명품’이었다. 한창 문화콘텐츠라는 용어가 도입되어 끝발을 날리기 시작하며, 만화 시장의 거품이 극에 달하고, 대중문화의 향유와 취향문화가 중요하게 부각될 시기에 하나의 새로운 브랜드를 정착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꽃피고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 인식은 아직도 그리 높지 않은 만화라는 분야에서, 고품격 문화취향이라는 영역을 점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재료가 필요했다. 츠게 요시하루의 아무리 고상하고 난해한 작품이라도, 일본만화라는 매우 오락적인 이미지(즉 편견)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산호는 <대쥬신제국사>를 그리며 회화극본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만화’라는 용어를 피해갔다. 누가 봐도 자명한 ‘만화’인데, 만화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다고 마음 놓고 주장할 수 있는 낯선 존재들이 요구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이 서구만화라는 개념이었다. 서양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만화 가운데 조형 미술적 견지에서의 명작들이라든지, 우리가 알고 있는 흔한 만화들과는 최대한 다른 느낌의 만화들이 중심적으로 선정되었다. 출판사에서 작품 선정 기획의 핵심역할을 한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성이나 (한국 대중에게 곧바로 다가갈 수 있는) 오락성보다는 이미지의 예술성이나 표현의 참신함에 더 큰 비중을 부여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미국의 주류 슈퍼히어로물은 재미나 작품성, 또는 캐릭터의 인지도(물론 인지도 높은 캐릭터의 경우는 라이센스 비용문제도 있다)와는 별개로 실질적으로 완전 배재되었으며, 유럽에서도 <스피루>나 <스머프> 같이 오락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성향의 작품들 역시 고려의 대상에서 일차적으로 벗어났다. 그리고 심지어 이미 다른 방식으로 소개된 바 있던 작품들도 더욱 고상한 것으로 새로 포장되어 나왔다. 그 결과 2000년대에 다시 출간된 <아스테릭스>는 오락물이기 이전에 ‘유럽의 역사를 재미있고 품위 있게 배우는 최고의 교과서’이며, <땡땡>은 최고의 모험활극이 아닌 ‘최고의 교양만화’로 소개되었다. 서구만화는 예술적인 만화, 고상한 교양서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면서 시장에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현실의 냉엄함, 그래도 희망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만화를 둘러싼 거품은 2000년대에 들어서 급속하게 꺼지기 시작했다. 비단 90년대를 풍미했던 주류 만화 제작방식의 쇠락 뿐만 아니라, 문화 향유자들이 한 층 더 정직해지기 시작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에 무려 8만 관객을 들게 하었던 기이한 문화적 허영심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것은 특히 영화를 중심으로 일어난 웰메이드 대중오락에 대한 수요, 또는 매우 특정적인 세부(‘매니악한’) 취향 수요로 전환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온 서구만화는 전자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대중성/오락성의 이미지를 스스로 파괴해버렸으며, 후자가 되기에는 일본만화의 집착적인 소재주의를 따라갈 수 없었다. 심지어 아동용 학습만화 시장에서도 한층 더 전문화되고 오락성을 강화한 우수한 국산 히트작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즉 서구만화는 ‘예술만화’로서도, ‘우수한 품질의 교양만화’라는 이미지로서도 충분한 판매량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이 더 이상 아니었다는 말이다.
안 그래도 서구만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일본식의 독법이나 연출, 혹은 관심사 면에서 다소 다른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익숙해지기까지 나름의 적응과정이 필요한데, 심지어 애초에 확실히 낯설 수 밖에 없는 작품들 위주로 접하게 되었으니 기존 만화독자들에게 외면받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기대를 걸었던 새로운 독자층도 형성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개방적 성향을 지닌 일부 만화 전문가 및 작가들에게만 환영 받는 상황이 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99년도부터 새로 시작한 이미지메이킹이 실패한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구만화는 역시 한국에서는 안돼!”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대단히 성급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실 그 브랜드 이미지에 합류하지 않았던 영역의 서구만화들은 여전히 원래의 지분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 자끄 상페의 만화들은 2002년 이후 에세이툰의 범람과 함께 다시 각광받고 있으며, 동화책 코너의 강자들은 여전히 잘 나간다. <땡땡>의 오락성은 한국에서도 나름대로 통했기에 그 분야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고, <쥐>, <팔레스타인> 등은 인문사회 서적으로서 상당한 지명도를 확보했다. 애초에 서구만화의 넓은 세계 중 한 부분을 가지고 하나의 브랜드 전략을 시도한 것이고, 단지 그 것이 실패했을 뿐이다. 부작용으로 아직도 일반 대중의 서구만화에 대한 이미지가 그쪽으로 많이 고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전략으로 뒤집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아예 잊어버릴 수도 있는 노릇이다. 서구만화는 한국에 오면서 엄청난 붐을 일으키는 데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쫄딱 망한 적도 없다.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앞선 글은 한국에 들어온 서구만화의 이미지가 지극히 한정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구만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인가? 서구만화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여야 하는 것인가? 사실 모든 힌트는 사이사이에 이미 제시했지만 필자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첫째 서구만화라는 애매한 범주에 속박당하지 말고, 둘째로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방법을 익히라는 것이다.
서구만화라는 범주는, 익숙한 것과 낯선 것 – 아니, 나와 내가 아닌 모든 것을 억지로 나누기 위한 편의상의 개념에 불과하다. 애초에 유럽만화와 미국만화가 섞여서 불리운다는 것 자체를 정작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유럽 만화들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공통된 연출이나 화법을 묶어내는 것이라든지, 유럽만화와 미국만화의 공통점이자 한국만화와의 차이점이 되는 그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구분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띠떼프>는 스위스계 작가의 프랑스어 만화이기 이전에, 재미있는 명랑만화다. <흑란>은 서구식의 이미지 예술 지향 만화이기 이전에, ‘블랙 오키드’라는 슈퍼 히어로의 모험담을 다루는 슈퍼 히어로 액션물이다. 다소 다른 연출이나 표현법은, 그 장르와 내용을 즐기는 데에 있어서 효과적인지 아닌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의 ‘이야기성’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화가 단순한 회화나 조형물과 다른 지점, 또는 절대적인 장점은 바로 이야기의 서술이다. 덕분에 보통 만화작품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것이 바로 메시지의 구현이다. 그리고 이미지의 시각적 우수함이나 연출의 특이함이라는 것은 결국 그 구현된 메시지, 즉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반적인 만화독자라면 멋진 그림이나 화려한 연출보다는, 이야기 자체의 재미나 공감 가는 부분이 더 매력적이고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이미지나 연출 자체가 이야기, 즉 메시지 자체와 완전히 혼연일체가 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만화라는 이야기 매체를 선택한 이상 그 주종관계는 명확하다. 서구 만화를 한국으로 들여오는 출판사나 기획자들의 입장에서도 ‘그림이 너무 멋있어서 첫눈에 반한’ 작품, 또는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작품’보다는, ‘한국인 독자로서 작품 전체를 주욱 읽어보니 너무나 훌륭한 이야기’를 선정해서 출판하는 것이 훨씬 상식적이다(언어문제는… 알아서 극복해야 하는 과제다).
서구만화는 이미지 중심이고, 이야기가 약하다고? 분명히 그런 만화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만화들도 무진장 많다. 혹은 같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이미지 자체에 집중해서 감상하기보다,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그 과정으로서 흡수하는 방식의 독서를 해보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미지에 압도되어 이야기를 잊어버리면, 당연히 그 만화작품의 진수를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서구만화가 재미없다는 신념에 사로잡혀서 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작품들을 찾아서 읽어보는 것이다. 서구만화로서가 아니라, ‘만화’로서 말이다.
물론 이런 당부를 유념한다고 해서 낯선 화법이 갑자기 친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서양에서 만화가 진화해온 방식은 우리와는 다른 부분이 많고, 그 결과 같은 방식으로 즐기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바깥’ 세계에서는 수천 수억의 사람들이 그 작품을 문제없이 재밌게 잘 즐기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자면, 굳이 심각할 정도로 어려울 것도 없다. 관건은 새로운 독법을 배워나가는 것 자체가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기억해낼 수 있는가, 라는 문제다.
그것은 아주 어릴 때 책을 읽는 것을 처음 배우는 것과도 같다. 아이는 문자로 적혀있는 일련의 부호들을 보면서 자신의 머리 속에서 온갖 세계와 모험담을 그려내는 훈련을 한다. 그것을 독해능력이라고 부르는데, 아이에게는 책의 내용 만큼이나,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과 성취감이 있다. 당연히 만화에도 독해능력이 필요하다. 특별히 누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독해능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만화장르에 대한 독해능력만 지금까지 습득했다면, 이 기회에 다른 장르들을 즐기는 방법을 배우는 것 역시 좋은 생각이다. 아주 기술적으로 구분한다면 한 칸에 눈을 머물게 하는 시간, 한 페이지를 훑어나갈 때의 시선처리, 한 장면과 다음 장면 사이에 상상해야 하는 사건들의 질과 양… 등등 딱딱한 이야기들이 난무하겠지만, 실제로는 ‘이 작품을 정말로 재밌게 즐겨보겠다’는 의지와 자연스러운 독서과정이 반복되면서 총체적으로 습득해나가는 과정이다.
나아가, 작품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는 것 역시 한층 더 큰 즐거움을 향한 지름길이다. 예를 들어서 <아스테릭스> 같이 풍자로 가득한 작품을 읽을 때는 유럽 각국의 민족성이나 지역적 특징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천지차이다. 물론 모르고 보더라도 주인공들의 화끈한 활극과 모험을 즐기기에는 충분할 수 있지만, 그것은 마치 축구 경기를 보면서 골인 장면만 즐기는 상태와도 같다. 규칙과 맥락을 알아나가면서 스타들의 움직임, 전략전술, 치열한 미드필드의 머리싸움이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적 맥락을 파악해나가다 보면 미묘한 차이와 함께 보편적 감성까지도 발견해 내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입장에서 즐기자
우리는 여전히 서구만화를 타자화 하는 것에 익숙하다. 타자화하기 때문에, 가깝게 받아들이며 즐기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정말로 우리에게 낯설거나 거리가 멀어서라기보다는, ‘서구만화는 고상한 것’ 브랜드 전략의 약발에서 해방되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서구만화 전시회를 한다고 하면, 그냥 낯선 나라의 낯선 작품의 낯선 원화들을 몇 장 붙여놓고는, 어차피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작품명으로 가득한 작가 연보를 곁들이는 식으로 구성하는 식이다. 하지만 에르제의 예술적 업적을 기리기 이전에 <땡땡>의 즐거움을 논하는 자리가 정작 필요한 것이 아닐까. <땡땡>이 한국에서 어떻게 소개되었고, 어떻게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는지 말이다.
서구만화를 즐겨라. 창작자의 입장에서 즐긴다는 말은, 개방적인 교류를 하고, 그것에 함몰되기 보다는 오히려 창조적으로 영향 받고 활용해내는 것이다. 기획자나 출판사의 입장에서 즐긴다는 말은, 좋은 작품을 내고 대중적 공감대를 이끌어내면서 성공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자의 입장에서 즐긴다는 것… 그것은 만화를 보는 관점, 그리고 만화를 통해서 세상을 읽어내는 시각을 한층 더 넓고 깊게 확장한다는 것이다. 수 십년 동안의 서구만화와의 만남, 그리고 최근 수년간의 일대 붐과 거품 붕괴라는 일련의 과정이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바로, 서구만화라는 포장 이전에, 만화 자체를 즐겨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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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예슬 – 안녕하세요, capcold님! 오랜만이네요^^ 땡땡의 모험 팬 차예슬입니다. 정말 저도 절대적으로 동의합니다!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유럽만화의 존재도 모르고 다 일본 미국만화만 추종하고…진짜 외롭습니다…ㅠ_ㅠ 때마침 이 글을 발견하게돼서 정말 반갑군요^^ 옳소! 유럽만화를 즐깁시다! 2004/11/16 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