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저널 올해 설특집호에 기고한 글. 주간지 문화면의 의례적인 연휴 특집, 연휴 문화 가이드…의 하나가 될 줄 알았는데, 여차저차 만화만 들어간 특이한 케이스. 항상 그렇듯이 여기 올리는 것은 원래 보낸 오리지널 버젼, 잡지에 실리는 것은 그쪽 편집부를 거친 버젼 (특히 도판 설명 같은 것은 대부분 완전히 편집부의 창작인 경우가 대부분… 본문 내용과 미묘하게 어긋나서 이상하게 생각된다면 100% 여기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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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와 만화책의 행복한 상관관계
명절이다. 연휴다. 그리고 우리들은 굳이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오랜 경험을 통해서, 이런 시기에 최고의 동반자가 만화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귀경귀성길의 차량 행렬 속에서, 분주한 순간들이 정신없이 끝나버리고 나면 사실 별로 다른 할 일이 없는 고향집에서, 남들은 다 어딘가 놀러갔다고 하는데 별다른 계획 없이 집에서 굴러다니는 행복한 게으름 속에서, 만화책은 필수 아이템이다. 시각적 성찬을 주면서도 텔레비전처럼 강제적이지 않고, 들고 다니며 자유롭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활자서적처럼 딱딱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유쾌한 경박함이든 깊은 감동이든, 잘 고른 몇 권의 만화책은 연휴의 주인공인 당신에게 충직한 파트너가 되어줄 것이다.
우선, 시간이 좀 생겼으니 선 굵은 이야기들의 세계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격정적인 시대 속의 다양한 주인공들이 펼치는 그보다도 더욱 격정적인 삶을 지켜보다보면 어느 틈에 다음 권, 그 다음권을 펼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다. 오랜 연재 끝에 최근 마지막 권이 발간된 <불의검>(김혜린/대원 CI)부터 한번 시작해보자. 종교와 정치, 청동과 철, 주술과 전쟁이 공존하던 고대 부족사회에서 벌어지는 장대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커다란 세상의 흐름 속에 던져진 사람들의 만남과 엇갈림이 일품이다. “순정만화는 **해서 도저히 못보겠어”라는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한 특효약이기도 하다. 작년 영화로도 제작된 <바람의 파이터>(방학기/길찾기)는 강함의 진리를 찾아나선 한 구도자의 이야기다. 최배달, 또는 오오야마 마츠다쓰, 또는 실전 극진가라데의 창시자가 걸어온 길을 자서전처럼 독백하는 작품으로, 굵고 간결한 화풍 속에 역동적으로 녹아들어가 있다. 좀 더 고전적인 느낌을 원하는 분들에게는 <일지매>(고우영/애니북스)가 있다. 구수한 민담을 늘어놓듯이 해학과 모험이 자연스럽게 섞여들어간 고우영 특유의 만화연출만으로도 이미 확실한 재미보증수표인데, 작가 스스로도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자신할 정도면 굳이 다른 말이 필요 없으리라 본다.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서 힘보다 화합과 실용주의를 펼친 특이한 영웅을 다룬 작품 <어이, 료마!>(타케다 테츠야,코야마 유우/삼양출판사)도 필견이다. 일본근대화의 분기점이었던 메이지 유신을 만들어낸 명 정치가 사카모토 료마의 일대기다. 안타깝게도 아직 정식 한글판이 완간 되지 않았다는 것이 약점인데, 성미 급한 사람들은 십여년 전 조악한 번역으로 완간된 바 있는 해적판이라도 찾아나서리라.
굵은 모험담보다는 성찰의 시간을 원하는 성격의 소유자라도, 만화책을 펼쳐들 필요가 있다. 가장 스트레이트한 이야기라도 가장 친근한 형태로 전달해 줄 수 있는 매체가 달리 또 있겠는가. <너 좋아한 적 없어>(체스터 브라운/열린책들)은 한 평범한 소년의 사춘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중에 어떻게 미화하든지간에, 사실 사춘기는 바깥으로 터트리는 격정보다는 변화 와중에서 생겨나는 외로움의 시간에 더 가깝다. 담백한 그림체와 기복 없는 여백이 그 정서를 극대화해주는 작품. 좀 더 직접적인 성찰을 원한다면, 패권주의와 폭력의 본질을 파헤치는 <십자군 이야기>(김태권/길찾기)가 어떨까. 십자군 전쟁의 형성과 진행과정을 통해서 무지와 폭력 위에 세워진 우리들의 현대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대단히 해학적인 재미가 넘친다. 성찰이라면 자고로 뭔가 커다란 스케일의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아예 우주를 바라보시면 될 듯 하다. <플라네테스>(유키무라 마코토/삼양출판사)가 제격이다. 달에는 사람이 살고, 화성이 개발 중인 과학적인 근미래 세계, 우주 쓰레기 청소부인 주인공이 목성이라는 신세계를 개척할 탐사선 승무원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우주란 무엇이고, 그 속에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주인공과 함께 조금씩 느낄 수 있도록 무겁지 않게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하드SF 팬이 아니라도 큰 어려움 없이 즐길 수 있다.
만화라면 역시 유쾌함이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도 당연히 만화책이 있어야 한다. 우선 <르브바하프 왕국 재건설기>(김민희/서울문화사)부터 펼쳐보자. 중세유럽풍의 모험담일듯한 표지를 넘어가면, 왕국을 잃고 전전하는 ‘왕자스러운’ 왕자와 마법으로 꼬마가 되어버린 사상가, 가녀린 외모와 괴력을 겸비한 시녀 등 범상치 않은 인간들의 개그의 향연이 펼쳐진다. 매니아 성향의 고난이도 개그를 바라는 분들에게는 좀 성이 차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얼렁뚱땅 개그 속에서도 미묘하게 성장해 나아가는 캐릭터들에게 정들어버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천진난만한 6살 배기의 생활모험담인 <요츠바랑!>(아즈마 키요히코/대원 CI)도 유쾌함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 위악적인 엽기아동, 또는 어른스러운 고뇌로 어른 독자의 이입을 바라는 껍데기 아동이 아닌, 마냥 모든 것이 궁금하고 또 즐거운 해맑은 아이가 온 동네를 해맑게 물들이는 이야기다. 공원에 그림을 그리러 간다든지 하는 참 시시하고 소소한 생활 속 작은 사건들이 커다란 모험이 되는 즐거움을 되찾아보자. 유머는 유행에 민감하다고들 하지만,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김수정/키딕키딕)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듯 하다. 국민캐릭터라는 명칭으로 포장되기 이전에, 아기공룡 둘리는 무엇보다 재미있고 유쾌한 만화책이었던 것이다. 동네 이야기와 모험여행이라는 명랑만화 특유의 공식이 얼마나 막강한 재미를 주는지 다시한번 기억나게 해 줄 것이다. 오징어와 라면박스로 만든 싼타 썰매가 눈내리는 하늘을 날아다닐 때 그 순박한 상상력, 서민적 즐거움에 미소 짓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자, 그럼 연휴채비를 위해서 서점에 잠시 들려야 할 시간이다. 당연히도 이런 작품들은 가이드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눈앞에 펼쳐진 다양한 작품들을 스스로 골라보는 재미는 이제 시작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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