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복합적 풍경 – 에식스 카운티 [기획회의 290호]

!@#… 왜 이런 수작이, 이렇게 관련글이 안보이는걸까. 하기야 그게 어디 이 작품만의 경우일리가;;

 

외로움의 복합적 풍경 – [에식스 카운티]

김낙호(만화연구가)

외로움이라는 정서를 떠올릴 때 흔히 생각하는 것은 텅 빈 세상에 혼자 있다거나 하는 심상이다. 하지만 인간사회 자체로부터 유리되는 로빈슨 크루소 식의 소수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실제로 세상에서 외롭다고 하는 것은 더 복잡한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있는데 그들과 교류하지 못하는 것에 가깝다. 운명이 어느 한 명을 점찍어서 외로운 이로 만들겠다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정이 엮인 결과 그 누군가가 소외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는 정작 본인 자신의 역할도 결코 적지 않은 경우가 많다(특히 사연 있는 상실감과 겹쳐질 때 말이다). 게다가 외로움은 하나의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종종 점점 더 악화되기도 하는 것이, 외로움이 과도한 절실함으로 바뀌거나 반대로 사회적 소통 의지의 퇴화로 이어지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더욱 사회와 원활하게 교류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빈 풍경이 아니라, 지극히 복합적인 풍경이다.

그렇다면,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깊숙하게 파고들고자 할 때는 무작정 공허함을 온갖 표현으로 늘어놓기보다, 섬세한 디테일과 사람들 사이의 복합적 상호개입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정론이다. 그것이 바로 [에식스 카운티](제프 르미어 / 미메시스)가 추구하는 핵심적인 매력이다. 이 작품은 캐나다 온타리오의 농촌 지역을 무대로 벌어지는 몇 가지 서로 연결된 독립적 스토리들의 묶음이다. 중심이 되는 3가지 장편 중 첫 번째는 레스터라는 소년이 주인공이다. 그가 어머니와의 사별과 삼촌과 농장에서 함께 살게 된 현실을 마주하며 슈퍼히어로에 심취하고, 그 동네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인연들과 마주치는 이야기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젊은 날 형제가 함께 아이스하키를 하던 추억, 그리고 서로 갈라섰던 아픔, 그리고 결국 다시 에식스 카운티로 돌아오게 한 비극을 회상하는 나이 지긋한 르보프씨의 이야기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는 갖은 삶의 비극과 슬픔을 겪어온 간호사의 이야기로, 사람들을 좋아하기에 어떻게든 개입하고 싶어한 사람의 사연이 펼쳐진다. 세 이야기와 단편들은 모두 에식스 카운티의 황량한 공간 자체 이상으로, 그 안에 살고 있는 그 사람들의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계속 키워내는 관계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아끼던 이와 사별, 그리고 그 상실감에 스스로 외로움의 벽을 쌓은 과거다. 외로움에 짓눌려 미치기보다는 나름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것도 공통된다. 즐거웠던 시절에 대한 기억, 현재 남아있는 후회, 그리고 현재는 외로움에 대한 회피를 통해서 오히려 더 외로움을 스스로 공고히 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년은 슈퍼히어로 만화라는 오락을 통해서, 노인은 과거에 대한 끝없는 회상을 통해서, 간호사는 타인들에 대한 다소 일방적 오지랖을 통해서 스스로의 외로움을 잊으려 하며 더욱 증폭시킨다. 하지만 몇 가지 추가적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그런 모습이 결코 이들만의 것이 아닌 훨씬 보편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슬픔으로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이들의 모습을 어리석기보다는 안타깝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작가의 세밀한 디테일이다. 일상 속의 대처, 사고과정의 매 단계, 독백으로 드러나는 속마음 등은 비장한 시적인 멋보다는 현실적 지지부진함이 넘친다. 모든 사연을 하나의 덩어리로 던져주기보다는 지금의 모습 속에 슬쩍 파편적으로 조금씩 드러나게 만드는 이야기 전개 역시 효과적이다. 일상에서 조금씩 사람들과의 관계를 갈망하는 것은 정작 자신들이 그런 관계를 두려워하는 속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을 만들어낸 과거의 어떤 모습들과 순간순간 연결되어 제시된다. 외로움에 대한 설명이 아닌, 외로운 현실에 대한 공감을 노리는 셈이다.

[에식스 카운티]가 단순히 우울한 자화상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상실감과 외로움에 빠진 각 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는 각각 갈망하는 바가 있고 그것을 어쩌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희망만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릴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이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망가지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가면서도 바라는 바를 계속 간직할 수 있다면 언젠가는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해피엔딩이 아닌, 희망의 조각을 보여주는 식이다. 소년에게는 아버지상이 필요하고, 노인에게는 후회를 정리할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고, 간호사에게는 그런 상실과 외로움이 생각보다 보편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상실과 외로움은 간직하더라도, 살다보면 결국 그 목표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보기보다 그 외로운 사람들도 여러 인연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조금씩 우연과 필연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 받다보면 분명히 그렇게 될 것 같은 여운으로 작품은 끝을 맺는다. 작가가 이야기로서 희망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기보다는, 독자들 스스로가 그 캐릭터들이 결국 극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품도록 만드는 감정선 연출의 힘이다.

[에식스 카운티]의 그림체는 황량한 풍경과 찌든 얼굴 표정을 능숙하게 잡아낸다. 마치 뭉크의 ‘절규’가 그랬듯 큰 표정을 담아낼 수 있는 얼굴과 흐느적거리는 모습의 팔다리는 단독 일러스트로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의 이야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거친 직선들로 잡아낸 순간들은 여러 인물들이 언제라도 서로 섞여 들어갈 듯 단순하면서도 공간감이 뚜렷하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들은 인물들의 표정과 배경의 몇 가지 연출에 의해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노인이 자신의 과거를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퀀스, 간호사의 이야기와 한 세기 전 고아원의 이야기가 수평적으로 교차하는 시퀀스 등은 그 중 특히 백미다. 시각적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감정의 흐름 조율이야말로 만화라는 표현양식이 갖추고 있는 최고의 무기이며, 그것을 제대로 자각하고 있는 작가들만이 이런 것을 보여줄 수 있다.

말끔한 조형미나 귀여운 매력의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필체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보는 주류 오락만화의 독자들에게는 다소의 진입장벽이 있을 수 있다. 나아가 화면 연출에서 지나치게 느린 페이스로 감정을 짜냄에 있어서 과욕을 보이는 시퀀스도 없지 않다. 하지만 [에식스 카운티]는 지나치게 자학적인 괴로움으로 빠지지 않으면서도 외로움의 복합적 모습들을 겹겹이 펼쳐내 보이며 다소의 희망적 결말까지 암시할 줄 아는 매력적 이야기인 만큼, 첫 몇 장을 무사히 넘기고 나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손에서 놓지 못할 작품 중 하나다.

에식스 카운티
제프 르미어 글 그림, 박중서 옮김/미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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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즉 현 발간호 게재중인 글): 이말년시리즈. 소재가 고갈되면 쉬었다가 돌아올 줄 아는 영민한 개그만화이기에 더 훌륭.

Copyleft 2011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가 —    [ <--부디 이것까지 같이 퍼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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