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게 거대한 존재의 평범함 – 거인의 역사 [기획회의 361호]

!@#… 작가의 의도인지는 알 방법이 없으나, 읽는 내내 거인은 미국사회 그 자체의 비유 같은 느낌이 물씬.

 

특별하게 거대한 존재의 평범함 – [거인의 역사]

김낙호(만화연구가)

특별하게 살고 싶은 꿈이 있으나 평범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이 우리들의 흔한 현실이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평범하게 살고 싶으나 특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기에는 벌써 두 가지 꽤 미묘한 개념이 들어가는데, 하나는 평범함이란 무엇이며 다른 하나는 특별함이란 또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어떤 식의 가장 흔하고 표준적인 가치들이 도대체 ‘평범함’을 이루는 것이며, 또 그저 평범하지 않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어떤 동경을 불러일으킬만한 특별함이란 또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바깥에서 볼 때 특별함으로 보이는 어떤 속성에는 무엇이 문제가 되기에 당사자에게는 문제가 되어 버리고 싶어지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결국 그 특별함을 어떻게 스스로도 하지 못할 때, 그는 어떻게 대처해야할 것인가.

[거인의 역사] (맷 킨트 /세미콜론)는 크레이그라는 무척 키가 큰 남자의 일대기다. 그는 평범하게 태어났으나 평생동안 계속 키가 커서, 어릴 때는 좀 큰 정도, 청소년 때는 농구선수 같이 크게, 대학생이 되어서는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기 시작하고, 청년이 되어서는 건물보다 커지고, 장년이 되어서는 거대한 자연현상에 가까워진다. 이 작품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의미가 있던 세 명의 여성이 각각 그와 함께 살며 바라보는 모습들을 통해서 일생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펼쳐진다(원래 부제인 ‘3 story’는 3층 높이나 될 정도로 거대한 높이라는 뜻, 그리고 세 개의 이야기라는 뜻을 함께 담아낸다). 첫째는 2차대전 군인인 남편을 전쟁통에 잃고 크레이그를 낳은 어머니의 이야기고, 둘째는 성장한 크레이그가 사귀며 그의 반려자가 된 한 예술가의 이야기고, 셋째는 대자연이 되어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추적하는 그의 딸의 이야기다. 세 이야기 모두 외로움, 관계를 맺는 것의 어려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크레이그의 특별함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천태만상, 그리고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 담긴 인간성에 손을 내밀어 보고 때로는 포기하는 이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50년대의 미국에서 그저 평범하고 성실한 소년의 마음을 지녔으나 성장을 멈추지 않아 키 하나만으로 가장 유명한 스타가 되어버린 크레이그의 모습은 마치 미국인들 자체에 대한 우화 같은 느낌마저 든다. 어머니는 아이를 그럭저럭 잘 키웠으나 전쟁에서 사망한 남편에 대한 향수와 깊은 외로움에 얽매여 점점 인간을 넘어서는 키로 자라나는 아들의 특별함에 대해 조언도 원망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도 그만큼 외로울까에 대한 호기심만 커갈 뿐이고, 결국 쓸쓸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집을 나와 대학에 진학한 크레이그를 만난 연인, 이후 부인이 되는 예술가는 그의 특별함에서 매력을 느끼고 평범하듯 연애를 한다. 건축을 전공하는 그녀는 소축적 모형으로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일이고, 자신이 창조하는 그 작은 세계에서는 자신도 거인이다. 자신이 작은 모형 세상을 내려보듯, 크레이그가 그에게는 작은 인간 세상을 내려보는 것을 이해해주는 반려자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것도 작은 집 크기 까지는 어떻게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유지되지만 그 이상으로 거대해지면서 점차 한계가 온다. 커진다는 것은 그저 높이가 높은 정도가 아니라, 신체와 관련된 모든 물리적 조건이 바뀐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경 전달 속도, 대화를 나눌 때의 목소리, 정상적 움직임을 위한 모든 것이 점점 버거워진다.

그 와중에서도 나머지 세상은 크레이그의 특별함을 이용하고자 한다. 어릴 적 성장하던 마을에서는 동네의 화제거리, 농구 대회 우승의 견인차 역할이다. 성장하고 나서는 정보기관의 사람이 와서 생활에 필요한 여러 특수한 편의를 해결해주는 대신, 당대 냉전 상황에서 스파이 역할을 하기를 요구한다. 그 모든 것을 승락하며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자 한 크레이그이지만, 더욱 커지면서 도저히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가장 눈에 잘 띄기에 역으로 스파이 역할을 맡겼으나 건강하게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어려워질 따름이다. 그렇게 점점 그는 사회속의 평범한 인간 크레이그를 점차 버려나가고 자연의 거대한 일부가 되어간다.

이렇듯 첫번째 이야기는 어머니의 사연과 시선을 통해서 크레이그의 탄생을 매개로 고독과 상실의 기원을 말하고, 두번째 이야기는 부인의 시선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적응하고자 하지만 더욱 특별해지면서 다시금 고독해질 수 밖에 없는 관계와 정체성의 인생을 말한다. 그리고 세번째 이야기에 이르러, 크레이그의 딸은 한때 인간이었고 지금은 무엇인지 모를 현상이 되어 있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스스로의 고독에서 허우적대던 거인의 어머니, 대등한 관계를 맺다가 결국 떨어져 나왔으나 다시금 강한 자의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부인 등과 달리 딸은 아버지라는 거인을 인간세상의 별종으로 범주화시켜서 강제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탐구하고자 한다. 그는 나에게, 세상에 있어서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자연현상 또는 전설에 가까워진 그를 지금은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할 것인가. 마치 좀 더 평온한 시대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가 좀 더 대놓고 파란만장했던 시절의 부모 세대의 기원과 현실을 탐구하는 듯한 느낌이다. 여기에는 정해진 답, 뻔한 훈계는 없다. 그저 탐구하는 것 그 자체의 반추작용,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좀 더 윤곽이 뚜렷해지는 한 거인의 일대기가 있을 뿐이다.

[거인의 역사]는 환상적 소재,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은 흐름을 통해서, 사람들의 고독과 관계 맺음, 공동체의 평범함과 특별함에 대한 인식과정을 그려낸다. 이를 효과적으로 해내기 위한 방식이 바로 작품의 형식 전반을 다양한 사람들이 거인의 일생의 일부분을 각각 목격한 기록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목격담이기에 목격 대상이 되는 거인을 그려내는 듯 하면서도 실제로는 바로 그 목격자들의 이야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거인이 되어가는 꼬마가 있던 동네의 사람들이 있고, CIA요원들이 있으며, 미국사회가 있다. 세 여인이 각각 하나씩 이야기의 화자가 되어있는 것 뿐만 아니라, 시각연출 상으로도 당시 신문이나 광고전단 모습을 합성한 것, 증언 기록문서 같은 모습, 갑작스런 증인 인터뷰 등 다양한 기법들이 시도되고 있다. 나아가 그림체 전반도 낮은 채도로 마치 빛 바래고 종이가 누렇게 뜬 옛날 대중잡지 같은 모습을 고수한다. 시대의 섬세한 디테일을 살리면서도,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흥미성 사연 같은 느낌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셈이다.

덕분에 [거인의 역사]는 슬프고 고독하고 애써 괜찮은척하지만 한쪽으로 늘 결핍된 듯한 사람들의 모습, 즉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을 세속적으로 와닿게 만드는 흥미로운 작품으로 완성된다. 산 만한 거인이 실제로 있었다는 황당한 허풍 위에 서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거인의 역사
맷 킨트 지음, 소민영 옮김/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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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계간 이미지앤노블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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