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형식실험은 내용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구조가 지배하는 세상 – [꿈의 포로 아크파크]
김낙호(만화연구가)
관료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공무원들이 복잡한 서류더미에 휩싸이고, 복잡한 행정 절차 속에서 도저히 아무것도 마음대로 진전시킬 수 없는 광경이 그려질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 이전에, 원래 관료주의는 그 사회에서 무언가가 진행되는 것들에 대해 철저하게 파악하고 체계적으로 조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단계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각 절차를 검토하며,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만한 여지를 최대한 배제하고자 한다. 즉 기록과 절차라는 강력한 구조를 만들고, 그 안에서 개별 행위들은 예상과 통제가 가능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다만 구조에 대한 집행 의지는 과도한데 자연스러운 집행 기술이 부족할 때, 사회는 활력을 잃으며 신경증적 일상이 모두에게 강요된다. 구조는 사회를 수월하게 움직이게 하는 힘이되, 사람들 각자 삶의 이야기가 나아갈 수 있는 자유도를 속박하는 틀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강고한 관료주의적 구조가 주는 꽉 막힌 답답함과 공포 속에서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헤매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소설에서 카프카가 일찍이 일가를 이뤘다. 후세에 여러 장르에서 그의 영향을 받은 명작들이 등장했는데, 영화에서는 테리 길리엄 감독의 SF물 [브라질]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만화에는 바로 이 작품, [꿈의 포로 아크파크] 연작이 있다.
최근 한국어판이 출간된 [꿈의 포로 아크파크](마르크-앙투안 마티외/ 이세진 역/ 세미콜론/ 전5권) 연작은 주인공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구조에 관한 이야기다. 줄거리는 가상사회에서, 유머 수집을 업무로 하고 있는 정부 산하 ‘유머부’ 공무원인 주인공 아크파크(음운 단위로 뒤집어 읽으면 ‘카프카’가 된다)가 겪는 기이한 사연들이다. 주인공이 좁은 방에서 지내며 꿈을 꿀 때 혹은 업무상 낯선 곳에서 새로운 이들과 이상한 현상을 발견할 때, 독자들은 구조에 속박된 사람들과 그 구조가 예상외로 어긋날 때 발생하는 일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들이 사는 세계란 바로 만화 속 세계이며, 이상 현상으로 인해서 어긋나게 되는 구조는 단지 작품 속 사회의 고도화된 관료주의 뿐만 아니라, 만화의 표현 구조 그 자체까지 포괄한다. 그리고 그런 기이한 모험의 끝에, 매 연작마다 주인공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다. 석연치 않은 구조 파괴의 경험을 하면서도, 결국 독자가 마지막에 책장을 덮을 때는 다시 구조의 세상으로 돌아온다. 기이한 꿈이 지나간 것 같은, 석연치 않은 느낌과 의외의 유머감각이 아른거리는 채로 다음 권을 궁금하게 만든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은 카프카적 관료주의가 한층 더 공간적인 상상력으로 구현된 세상이다. 끝없이 펼쳐진 직각의 건물들, 그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어나가고자 하지만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 보이는 연결통로들, 같은 양복차림으로 기계적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로 넘친다. 그 구조를 당연시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이고, 실제로 이야기 역시 주인공의 적극적인 선택과 행동보다는 구조 자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어긋나고 그 어긋남조차 다시 관료적으로 통제하려는 또다른 기관과 조직원들에 의하여 전개된다. 다만 지나치게 암울한 메시지를 던지기는 사회파 작품을 추구하기보다는, 유머부라는 직장이나 어떻게든 태연하게 상황을 넘기려는 주인공의 무심한 대처를 통해서 일말의 유머감각을 선보인다. 관료주의 지옥도를 선명하게 보여주면서도, 가장 당연하다고 생각할 법한 구조라도 얼마든지 뒤집어볼 수 있다는 식의 낙천성이 살짝 버무려진 것이다.
이 작품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역시 만화라는 표현형식을 철저하게 자각하면서, 만화의 “당연한” 구조를 태연하게 뒤집어버리는 시도에 있다. 각 권마다 다른 부분을 하나씩 시도하는데, 첫 권인 ‘기원’에서는 병렬된 칸의 흐름이 사건의 경과라는 만화 서사 구조를 슬그머니 깨트린다. 페이지에 뚫린 칸을 넣어서, 앞뒤 페이지에서 같은 장면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보게 만드는 표현이 그 중 하나다. 나아가 형식적 실험은 담아내는 내용과도 결합한다. 가려졌던 다른 과정들을 칸의 공백을 통해 동시에 보여준다는 형식은, 건물의 바닥 판자를 드러냈더니 그 밑에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생활을 하는 것을 엿보는 내용과 맞물린다. 나아가 자신이 담겨있는 그 만화 페이지가 만화 속에 등장하며 구조를 만드는 이와 구조 속에 있는 이의 경계를 살짝 무너트린다. 다른 권에서는 만화에서 흔히 쓰이는 흑백의 선화, 그리고 4도 컬러 인쇄라는 요소가 또다시 작품 속의 안정적인 관료주의 세계구조를 살짝 흔든다. 선형적 이야기 진행이라는 흔한 구조 역시, 시각적 대칭과 뫼비우스의 띠같이 중간에 맞물리는 기이한 이야기를 통해서 “뒤집는다”. 더욱 대담한 실험에서는, 전개 흐름의 방향도 틀어놓는다. 나선구조를 사용해서 만화의 칸을 이어가며 읽는 방식을 뒤집고, 책 속 두 장의 종이 페이지마저 나선을 통해 물리적으로 이어버린다. 그리고 5권에 도달하면 2차원의 한계와 투시도법까지도 이야기한다. 2차원으로 표현되었으나 3차원을 가정한 만화라는 형식의 안에서 움직이는 이들이, 그것을 표현하는 투시도법을 자각하고 논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입체안경을 끼고 봐야하는 3차원(혹은 작품의 제목처럼, 2.333차원) 입체장면까지 이어진다. 기발하되 난해하지 않은 형식적 실험을 통해서, 내용 속에서 벌어지는 세상의 구조 파괴와 그것을 표현하는 만화 형식의 구조 파괴가 동시에 일어난다.
사실 이야기와 결합한 공간적 표현의 실험이라는 것은, 만화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장점 가운데 하나다. 칸 안에서 이야기 속 장면이 선보이고, 칸 사이에서 연상의 방향을 주무르는데, 칸 속과 칸 사이는 하나의 페이지 공간에서 함께 펼쳐진다. 칸 배치에 의한 연출은 원래 80년대 박흥용 단편작들이나 심지어 고우영 성인극화에서도 적극적으로 여러 실험을 했으나, 역설적으로 현재는 무한캔버스를 지닌 웹공간이 주어졌음에도 그저 그림칸 던져놓기에만 급급해서 너무 자주 방치된 연출요소다. 이럴 때 칸 간 연출의 재미를 이야기와 완전히 결합시켜 최대한도까지 구사해본 이 작품은 다른 작가들에게도 더욱 소중한 영감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어판이 5권 박스세트로 한꺼번에 출시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각 권이 페이지 숫자가 많지 않고, 작품에 한번 반했을 때 한꺼번에 구비하는 것이 나은 작품이기 때문이다(물론 한꺼번에 지불해야 할 가격은 논외로 하자면 말이다). 줄거리에 드라마틱한 인간사의 즐거움이 없다는 이유로 작품에 재미를 붙이지 못할 독자에게는 다소 추천하기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구조에 종속된 이야기와 형식을 차갑고 부조리한 관료주의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듯 하가다도 결국 살짝 유쾌하게 뒤집는, 대단히 잘 조율된 총체적 만화독서의 쾌감을 느껴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강력하게 추천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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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포로 아크파크 세트 – 전5권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이세진 옮김/세미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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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본격 중년 목욕탕 모험기 ‘테르마이 로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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