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환상과 투병 현실의 경계에서 성장하기 – 발작 [기획회의 339호]

!@#… 투병물과 성장물의 뛰어난 합체.

 

죽음의 환상과 투병 현실의 경계에서 성장하기 – [발작]

김낙호(만화연구가)

만성적 불치병은 환자는 물론이고 주변 모든 사람들의 삶을 좀먹는다. 완전히 병원에서 오늘 내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한 것 같은데 갑자기 한 번씩 발병하는 식이라면 치료에 대한 희망만큼이나 더욱 절망스러워진다. 이런저런 치료법을 찾아 사람들은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그 안에서 서서히 지쳐가며 물질적 여유든 서로의 관계든 소진되어간다. 그렇기에 병환을 소재로 작품을 그려낸다면, 서서히 사람들이 고생하다가 그 안에서도 어떻게든 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희망을 찾는 이야기 정도가 적당하다.

하지만 병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라면 어떨까. 사람들 사이의 관계 맺음을 고민하는 자아 찾기 성장물의 틀과, 함께 성장하는 소중한 타인의 병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진행한다면 말이다. 성장과정의 티격태격거림을 맡아줄 친구이자 라이벌은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가는데, 자아 찾기는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한 상상력 속에서 차곡차곡 발달해나간다. 병 치료에 몰두하며 지쳐가는 가족의 모습도, 그 병에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특정한 시대적 사회상도, 병과 죽음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 – 그리고 결국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 자기 자신에게 묻는 성찰의 꿈을 채워 넣는 재료가 된다.

[발작](다비드 베 / 이세진 옮김 / 세미콜론)은 한 프랑스 만화가가 “간질병”이(작품에서 의도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임) 있는 자신의 형과 함께 성장해온 이야기다. 기적적 치료를 발견하거나 하다못해 병마와 함께 싸울 것을 다짐하는 감동 스토리도 아니고 아련한 사별의 낭만담도 아닌 이 작품이, 발표 이래로 평단의 일방적인 호평을 받고 세계 각지에서 큰 상들을 휩쓸도록 해준 매력은 무엇일까.

이야기는 작가 다비드 베(당시의 본명은 피에르-프랑수아)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전쟁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5살 어린이였던 64년, 그의 형 장-크리스토프가 첫 발작 증세를 보이면서 시작된다. 전혀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는 불치병을 해결하기 위해, 그 후 온 가족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경으로 당시에 성행하던 각종 신비주의 처방을 따라서 온 유럽을 헤매고 다닌다. 중세의 신비든 동방의 신비든 유사과학으로 수놓은 마사지 치료사든, 용하다는 소문이 들리면 온 가족은 그쪽에 몰두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어떤 것도 효과가 없고 형의 상태는 점점 악화된다. 주인공은 이런 모습들을 보며 성장하고, 그 현실을 어떻게 소화해낼지에 대해 자신의 활로를 찾는다. 각종 전쟁의 풍경을 머리 속과 종이 위에 그려나가며, 그런 병과 죽음의 의미가 무엇일지 판타지 속 싸움의 이야기로 되새김질한다. 그 속에는 자신에게도 발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함께 섞이고, 사이비 치료술사 등 현실의 여러 상황들이 이야기의 새로운 캐릭터로 합쳐지며 점점 큰 서사시가 되어간다. 그런 상상의 세계에 몰두하며, 그리고 잦은 이사로 인하여 점차 현실세계의 인간관계에서 소외되는 부작용도 주인공의 성장담이다. 그리고 결국 이 작품을 그리면서, 환상으로 치환한 상상 속 이야기와 현실의 생활을 함께 긍정하고 형의 병 속에서 자신의 삶을 재발견한다.

이렇듯 이 작품은 주인공의 형을 치료하는 가족의 따뜻함을 재발견하자는 인간드라마로 스스로를 한정시키지 않는다. 한쪽으로는 세밀한 시대 묘사를 통해서, 아픔으로 약해진 이들이 신빙성은 약하지만 희망을 약속하는 위안에 현혹되는 내용도 그려낸다. 하지만 가장 큰 축을 차지하는 것은, 치료의 희망과 결과적 절망의 반복 속에서 점점 온 가족의 생활이 형의 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흐름과 주인공의 성장 시기가 정확하게 겹치면서 그가 상상과 현실, 세상과 자신에 대해 생각을 정립해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다보니 사춘기의 방황과 첫사랑의 낭만 같은 성장물 코드와는 거리가 먼, 자신만의 상상 속 세계에서 검은 부리를 한 새 모습인 죽은 할아버지와 함께 간질병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둘러싼 전쟁을 치루는 식의 이야기다. 그런데 마치 현실도피 같은 이런 상상이, 오히려 감정의 섬세한 기복과 성찰의 무게감이 넘친다.

[발작]은 사연의 기막힘이나 줄거리의 정교함 이상으로, 주인공이 상상의 세계로 현실을 해석해내는 방식이 점차 성장하는 그 모습 자체가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현실의 상황과 역사책 속 전쟁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현실의 모습과 각종 추상적 사고들이 상상 속에 형상화되는 정교한 상상력으로 발달한다. 형의 병은 어느 순간부터 악어의 입이 달린 무한히 긴 뱀으로 표현되며 불어에서 그 병을 가리키는 표현 그대로 ‘거대한 악’이 된다. 거꾸로 현실 속의 형과 가족을 그려낼 때도 점차 상상력 속의 어떤 모습들이 섞여나갔다가 분리되기를 반복한다.

다비드 베의 그림체는 죽음을 모티브로 하는 멕시코 민속화, 중세 유럽의 전쟁 서사 그림, 근대 목판화 등의 느낌을 고루 섞어놓고 그 위에 만화의 해학적 표현들마저 합쳐놓는다. 거대하고 기이한 괴물들은 정말 기이하고, 가늘고 깨끗한 선부터 판화의 긁어낸 듯한 선과 붓선까지 다양한 선의 질감이 이야기 순간순간의 감정을 표현해낸다. 페이지 상의 칸 배분에 대한 장악력 역시 어떤 새로운 심상의 순간을 가득 표현해내야할지 면밀하게 호흡을 조절한다. 무엇보다 이것을 단순히 그림솜씨 자랑이나 실험성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자신과 가족을 힘들게 한 형에 대한 갖은 감정이 교차하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한다. 가족의 중심이 되어 있는 아픈 형의 그늘에 가려진 상태에서 자아를 찾아가기 위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던 작가의 성장과정이 그림 자체로 표현이 되는 셈이기도 하다.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적 형상화를 통해 자라난 사람의 성장담 줄거리와 그 안에 담긴 정서를 온전히 표현하는 것은, 이렇듯 이 작품이 만화이기에 가장 효과적이다. 글만으로는 전달하지 못하는 강렬하고 구체적인 심상, 하나의 그림만으로는 설명할 길이 부족한 현실세계에서의 사연, 흘러가는 영상으로 표현하기에는 제대로 흡수하기 힘든 어떤 상상된 풍경들의 정적인 디테일들이 가득하다.

결말에 이르면, 작가의 꿈 속에서 형의 얼굴이 수많은 모습으로 계속 변한 칸들이 병렬되어 있고 작가의 성찰이 그 위로 나레이션처럼 흐른다. 그리고 그 수많은 얼굴 가운데에는 자신의 얼굴조차 포함되어 있다. 그 얼굴을 바꾸는 것은 그러나 병이라는 거악이 아니라, 성장하면서 형을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본 자기 자신이었다. 형의 병을 받아들이는 것이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작가가 경험하게 된 ‘성장’이다.

발작 1
다비드 베 지음, 이세진 옮김/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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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그러니까 지금 발간호): 우주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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