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 판타지 – 『어둠의 도시 연작』 [기획회의 273호]

!@#… 소식 처음 들은 후 실제 출간까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그 대신 꽤 본격적으로 밀고 있는 듯하여 보기 좋다. 한국어 공식홈은 여기로(클릭).

 

건축물 판타지 – 『어둠의 도시 연작』

김낙호(만화연구가)

00년대초 한국에서 유럽만화가 여러 출판사들을 통해 동시에 출간되는 붐을 이루었을 때 핵심 표어는 “제 9의 예술”이었다. 일본 장르만화 수입 거품 속에서 그들과 다른 고상한 새로운 만화라는 방식으로 규정되어, 대중오락물이라는 속성보다는 작품성 있고 시각예술로서 뛰어나다는 식으로 홍보되었다. 당시 그렇게 고품격 취향문화를 공략하여 결국 시장성을 확보하는 것에 성공했는가 하면 그렇지는 못했지만, 관심있는 독자들은 몇몇 세계만화사에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명작들이 한국어판으로 접할 수 있게 되는 행운을 누렸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교보문고 출판팀에서 출간한 『기울어진 아이』라는 작품이었는데, 공간감이 섬세한 그림체, 쥴 베르느의 고전 SF판타지소설들을 새로운 시대에 다시 만나는 듯한 줄거리, 스팀펑크풍 세계 묘사 등이 돋보였다. 무엇보다 캐릭터 중심이라기보다 공간이 주인공이 되는 듯한 매력적인 이질감이, 색다른 상상력을 즐겨보는 만화 본연의 재미를 재발견하도록 도와주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사실은 더욱 많은 작품들로 구성된 연작 시리즈에 속한 하나의 작품인데, 오래지 않아 해당 출판사가 만화출판을 접어서 간에 기별만 보고 나머지 시리즈에 대해서는 군침만 삼켜야 했다는 것이다(불어를 공부해서 원서를 주문하거나).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 마침내 아쉬움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어둠의 도시』 연작(스퀴텐 그림, 페터스 글/세미콜론/3권 발간중)의 원제는 Les Cités Obscures 로, 어둠 또는 모호함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범죄로 물든 곳이라는 의미의 어둠이 아니라,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하고 실체를 알아보기 힘든 애매함을 의미한다. 이 연작의 기본 설정은 세계가 현대적 도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농촌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각각 독립적이며 도시들의 상위 단위로서의 국가 개념도 선보이지 않는다. 각각의 도시들이 자체적인 사회구조와 스타일을 지니고 내부행정 또는 도시 사이의 마찰구도를 이룬다. 도시들은 20세기초 아르누보/아르데코 양식의 건축물로 가득하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도시는 각각 건축 스타일을 통해 문화가 구분된다. 이들의 세계는 우리들의 지구는 아니지만 지구와 흡사한 대척공간이며(정확히는 지구와 같은 궤도에서 정반대편에 위치하여 결국 서로를 관측할 수 없다는 설정), 간혹 두 세계 사이에 있는 유사한 형태의 특정한 회랑을 통해 오가게 되는 사람도 생긴다. 연작의 각 작품은 이런 도시들 가운데 하나에서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이 모호한 방식으로 해결되는 이야기다. 『우브리캉드의 광기』는 우브리캉드라는 도시의 한 건축가의 사무실에 나타난 육면체가 점차 자라나 도시 전체를 뒤덮으며 사람들이 그 환경에 적응하는 줄거리를 담고, 『기울어진 아이』는 어느날 갑자기 다른 별의 중력장 영향을 받게 되어 도시의 다른 이들과 다른 방향, 즉 기울어진 상태로 살아가게 된 소녀와 그녀에게 이끌려 그 세계로 간 지구의 한 신사의 이야기다. 기이한 사건에 대한 설명은 하드SF라기보다는 물리적 무언가를 기반으로 하되 환상적이어서, 쥘 베르느 소설들의 낭만적 감성이 떠오른다.

작품에 등장하는 상상의 도시들이 지구상의 도시들을 비유적으로 반영하듯(브뤼셀, 파리, 사마리스 등), 다루고 있는 내용들 역시 현실세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비유로 가득하다. 지구상 나라들에서 오늘 벌어지는 정치구도, 사회적 편견, 계급, 도시개발 갈등, 관료주의, 전쟁, 기타 사회모순들이 가상의 도시에서 좀 더 기이한 형태로 선보인다. 특히 그런 문제들이 공간이라는 속성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리고 현실이 그렇듯, 완전히 해결되기보다는 결국 그것에 맞추어 사람들과 사회가 살아가는 모습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 줄거리보다도 먼저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시각적 스타일이다. 장벽이 되었든 도서관이 되었든 관측소가 되었든 건축물 공간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고, 따라서 다양한 건축물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이야기의 감수성을 규정한다. 건축설계사의 투시도를 연상시키는 세밀한 선이 있고, 사람들은 그 공간에 비슷한 선으로 그려져 녹아들어가 있다. 칸 전개는 설계도면을 보듯 반듯하게 배치되며, 마치 미국 고전만화 『꿈나라의 꼬마 니모』를 연상시키듯 극대화된 공간감이 돋보인다. 현실적 형상들이 만들어내는 초현실적 풍경은 마그리뜨의 초현실 풍경화를 연상시키고, 도시의 관료적 일상에 파묻혀 사는 군상들의 모습은 어딘지 카프카적이다. 풍부한 감정이 드러나는 캐릭터들을 선호하거나 인공적인 모습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이가 아니라면, 페이지마다 눈이 호강한다. 단지 그림을 잘 그렸다는 것이 아니라, 칸 내부의 광경과 칸 배치에 빼곡하게 들어간 조형미, 그리고 그것에 어울리는 세계관과 이야기가 펼쳐지기에 만화라는 매체에서 발휘할 수 있는 커다란 장점을 효과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인공적 공간감과 세계관 자체로 승부하는 만큼, 극적인 재미가 돋보이는 액션활극을 기대하는 것은 곤란하다. 흥미진진한 스릴러로 활용할만한 소재는 넘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상한 현상을 탐구하고 그것에 대한 답을 찾거나 포기하는 것이 이야기의 기본 얼개다. 어떤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것보다는 그저 사람들이 어떤 주어진 조건에서 살아나가는 것 자체가 과업이다. 초인적인 능력과 매력적 성격의 주인공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초월적인 구조와 매력적 속성의 건축물들이 넘쳐날 따름이다. 공간의 경이에 감탄할 준비를 하고 책장을 펼칠 생각이 아니라면, 그냥 펼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둠의 도시들』연작은 83년에 첫 연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9편(책으로 11권)의 본편과 다양한 외전 및 세계관 가이드가 있는 대형 시리즈다. 이번 한국어판은 그 중 12권이 순차적으로 출간된다고 한다. 이번 출간 라인업에 가이드책도 포함되고 배경 설명도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에서 이루어고 있으니, 더 많은 독자들이 더욱 깊게 모호하고 흐릿한 어둠의 도시들의 매력에 빠져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르비캉드의 광기
프랑수아 스퀴텐.보누아 페테르스 지음, 양영란 옮김/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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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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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오옷. 업계 관계자로서 꼭 봐야할 책 같네요. 다 읽은 후에 리뷰한번 해봐야겠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