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 줄로 충분한 독자문화 – 공수 커플링 [네남자만화방 / 한겨레21 897호]

!@#… 탈고 제목은 평범한데, 게재 제목은 “‘이건희x이명박’에서 무엇이 상상되나요?“다. 지난번 슈퍼맨 팬티 제목도 그렇고, 글의 본심을 그냥 확 뽑아주시는 카피작성 센스가 마음에 쏙 든다!(핫핫) …아니 그보다, 마지막 문단에서는 뭔가 저질러버린 듯한 느낌이;;

 

제목 한 줄로 이야기를 새로 만드는 독자문화 – 공수 커플링

김낙호(만화연구가)

만화애호가들이 그들의 매체공간에 남기는 내용들을 보다보면, 이름 두 개를 x로 결합시킨 표기를 종종 볼 수 있다. 오징어소녀x케로로 같이 주로 작품 속 캐릭터들인 경우가 많지만, 가끔은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얼추 분위기를 보자면 두 사람을 함께 묶는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는 좀 더 정교한 장르법칙들을 한 무더기 장착하여 이야기를 함축해 넣는 절묘한 독자문화다.

x로 표기되는 소위 커플링은 소비와 창작을 겸한 독자문화, 즉 동인문화의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다. 작품 또는 현실 속에서 실제로는 어떤 관계를 맺는 등장인물들이든 간에, 독자의 상상 속에서 그들 사이에 관계를 새로 설정한다. x보다 앞에 나오는 이는 ‘공’으로, 관계에서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역할이다. 뒤에 오는 이는 ‘수’로, 소극적 또는 수동적이지만 결국 그 관계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맡는다. 이 쯤 되면 쉽게 눈치챌 수 있듯, 이들이 맺는 관계는 바로 애정관계다. 동료나 라이벌인 두 남자 주인공들의 관계를 독자의 상상 속에서 끈끈한 동성애로 묶는 것은 흔해 빠졌고, 공수라는 설정을 통해서 캐릭터 성격을 완전히 재해석하는 향유 행위가 널렸다. 공에 해당하는 이는 내심 공격적, 적극적인 쪽이 강조되는 쪽으로 다시 읽히고, 수에 해당되는 이는 원래 작품 줄거리에서는 어땠든 간에 사실은 수동적으로 애정을 기다리는 섬세한 측면을 품고 있다는 식으로 재창조된다.

x로 묶이는 공수 커플링은 일본 동인계, 특히 의미 없는 패러디에서 시작하여 현재는 남성 동성애물이 대부분이 된 ‘야오이’ 장르에서 발전시킨 방식이다. 하지만 원류는 지금도 번성중인 영미권 팬픽문화인 슬래시 픽션에서 찾을 수 있다. 70년대 스타트렉팬들 사이에서, 커크 선장과 스폭 부관의 동성애 로맨스 동인 창작글을 쓰며 ‘커크/스폭’으로 표기한 것이 대표적이다. 즉 생각보다 이런 식의 재창조 접근법은 대중문화가 발달한 곳이라면 여러 문화권에서 보편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공수커플링은 오늘날 만화 및 만화 중심 콘텐츠를 중심으로 가장 흔하다. 아무래도 그런 상상력을 그럴듯한 일러스트나 창작서사물로 풀어내기가 상대적으로 쉽고, 특히 일본과 한국은 만화 동인지의 저변이 상당히 넓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런 식이 커플링은 금기의 관습에 대한 전복적 재미와 작품에 대한 능동적 참여의 즐거움을 준다. 게다가 그것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라서, 캐릭터간 관계를 간단하게 기호화해내어 제목 자체에 이미 내용과 상당한 양의 장르법칙들을 내포함으로써 상상력을 전달한다. 즉 전복의 재미와 장르 서사에 꼭 필요한 예상 가능함을 제목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셈이다. 덕분에 주어진 단서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사소한 망상을 붙여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재미를 느끼도록 해주는 중요한 팬덤 현상이다. 동인 패러디로서의 향유활동임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기에,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모욕을 느낄 이유도 없다.

다만 아무래도 기존 장르 규칙들, 특히 캐릭터 중심의 장르만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그 절묘함을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단점이다. ‘이건희x이명박’이라는 제목을 볼 때 곧바로 현실 사건들과 장르 클리셰가 뒤섞인 망상스토리가 연상되며 오한과 폭소를 동시에 터트릴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하지만 그 쪽에 익숙한 이들에게 만큼은, 확실한 재미를 보장해줄 수 있다. 총공인지 다정공인지 약공인지 문외한들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내용으로 논쟁하며 더욱 상상에 몰입할 수도 있다(굳이 말하자면, 필자는 이 경우 총공이라고 생각한다). 만화팬이라서 누릴 수 있는 확실한 즐거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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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의 격주 칼럼 ‘네남자의 만화방’. 4명의 필자들이 만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코너인데, c모의 경우는 만화의 어떤 코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은근슬쩍 세상이야기로 유도하는 것이 의도.)

PS. 나름 자극적 소재 덕에(이게 자극적이란걸 안다면) 은근히 여러 덕스런 공간에도 퍼졌는데, 흔하게 나오는 리플인 “요즘 기자 아무나 하네” 같은 경우 기자와 외부기고도 구분 못하는걸 보면 “요즘 독자 아무나 하네”라는 말 밖에는(핫핫). 여튼 정경유착의 끈적함, 그리고 건희제는 한국사회 어떤 권력자 캐릭터를 대상으로 하든 ‘공’이라는게 뽀인뜨.

Copyleft 2012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불가/영리뿔가 — [부디 이것까지 같이 퍼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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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oughts on “제목 한 줄로 충분한 독자문화 – 공수 커플링 [네남자만화방 / 한겨레21 8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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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쁘띠거니와 가카를 엮는 상상력이라니, 진심으로 충격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게다가 쁘띠거니는 누구에게나 ‘공’이라는 멘트에 다시 충격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게다가 쁘띠거니는 누구에게나 ‘공’이라는 멘트에 다시 충격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중요한 건 2번 말하기)
    마침 적절하게도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리셨더군요?
    “capcold: [나와 어울리는 초능력] Capcold님과 어울리는 초능력은 (괴심력)이며, 이 능력은 (상대의 마음을 붕괴시켜 공포감이나 괴로운 기억을 심어 정신을 붕괴) 입니다.”
    …지금 위 칼럼의 글과 그림을 보고 충격으로 정신이 붕괴된 사람들이 속출(심지어 몇몇 코멘트에서는 “완전 혐짤테러 수준”이라는 말까지 나오더군요)하고 있지 말입니다. 책임지세요. (징징징)

    각설하고, 안 그래도 이 글의 링크가 올라온 곳에 댓글을 달면서 “그나저나 요즘은 왜 기사랑 사설이랑 칼럼 따위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진 겁니까?”라고 했습니다만, 아니나다를까 역시 말미에 그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나중에 “요즘은 독자도 아무나 하네.” 이 말을 저도 나중에 써먹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여기에 삽입된 그림은 12년 전에 한겨레21에서 이미 써먹은 바가 있더군요. 이 그림 혹시 한겨레 DB에 있는 건가요? …제목을 자극적으로 뽑는 센스도 그렇고, 한겨레도 뭔가 비범하군요.
    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0/021015000200008160322054.html

  2. !@#… April_fool님/ 뭐랄까, 저는 눈찢어진아이니 하는 식으로 현실/구라 섞어 통쾌하게 속여먹는 “농담”보다는, 누가봐도 농담인 것에 현실의 뼈저린 일면들을 녹여내어 찜찜하게 만드는 쪽이 1024배쯤 더 낫다고 보다보니까요. 아예 한 발짝 더 나아가, 제 의도는 여기에 자극받아 실제로 이걸 동인만화로 그리는 괴인께서 어디선가 나서도록 자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핫핫). // 옙, 한겨레는 필자가 따로 지정하지 않으면 필요한 도판을 일종의 ‘이미지DB’에서 뽑아씁니다. 제가 좀처럼 신경 안쓰는 부분이 하필 제목과 도판인데, 저보다 더 과감하신 담당자님 덕에 썩 비범하게 나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