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 이벤트 [네남자만화방 / 한겨레21 905호]

!@#… 이번 회에는 나름 평온한 소재로 갔다. 다음 회에는 또다시 뭔가 시사주간지의 한계를 실험하는(…그럴리가) 내용으로 가보겠다 다짐 중. 게재본(“익숙하거나 구태의연하거나”)은 여기로.

 

뻔한, 너무 뻔한 – 클리셰 이벤트

김낙호(만화연구가)

기본적으로 장르물이라는 것은 익숙한 것의 향연이다. 90%의 익숙함 위에 10%의 변주를 올려서, 지나치게 방대한 새로움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기 보다는 좀 더 가벼운 방식으로 즐기는 것에 최적화된 양식이다. 그런 익숙함의 요소인 ‘장르 코드’이면서 줄거리 상의 사건요소인 것을 흔히 이벤트라고 부른다. 이런 이벤트들은 해당 작품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전개 속에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코드로서의 익숙한 기대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별다른 고민 없이 그냥 기본적으로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활용되는 것을 통칭하는 용어가 ‘클리셰’다.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릴 지경으로 계속 생각 없이 반복되고 있는 요소를 칭하는데, 원래는 활판인쇄 시절에 자주 반복되어 등장하는 문구를 아예 그냥 미리 조판으로 맞추어놓고 그대로 찍어버린 것에서 유래한다. 클리셰 이벤트는 구태의연하다고 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으나, 또 그 장르의 작품을 읽는데 빠져 있다면 어딘가 어색하고 심심해지기 쉽다. 거의 전부 클리셰 이벤트 만으로 짜여진 줄거리로 진행되는 작품이라도 나름의 익숙한 매력이 있다. 하지만 좀 더 신선한 재미를 표방했는데도 장기 연재가 지속되며 결국 그런 것에 의존하며 망가지기 시작하는 안타까운 작품들도 있기 마련이다.

클리셰 이벤트가 특히 잘 발달한 장르라면 역시 일본 주류 소년만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남발되는 것은 주인공급 캐릭터들의 관계발전 요소로서의 해변 이벤트, 야시장 불꽃놀이 이벤트 같은 것들이다. 여성캐릭터들에게 수영복과 유카타라는 이색 코스츔을 입혀서 소년독자들의 눈요기를 충족시킴은 물론, 별로 섬세하게 설계하지 않고도 적당히 연애요소를 슬쩍 충족시킬 수 있는 방식이다. 특히 판타지 격투 같이 섬세한 감성이 주가 되지 않는 작품일수록, 대충 밀린 숙제하듯 캐릭터 관계 진전을 위해 밀어넣기에 적합하다.

혹은 한국 순정만화에서 두드러지게 자주 활용되는 것으로 ‘알고 보니 멋진 남자/여자’ 이벤트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나쁘거나 무뚝뚝한 남자/여자로 인식되는 사람인데, 주인공 혼자만 보고 있는 어떤 순간에 갑자기 두근거리게 만드는 멋짐을 발휘하여 감정 흐름의 전환점을 준다. 서서히 정들어가는 방식보다는, 뚜렷한 이벤트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훨씬 간단한 것이다.

기타 온갖 장르마다 그런 것은 넘친다. 무협물의 경우 가장 뻔한 클리셰 이벤트는 바로 ‘기연’이다. 허름한 상대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고수고, 그를 스승으로 삼아 배움을 얻어서 무공에 큰 진전을 이룬다. 남성향 성인 현대물 극화의 경우, 적진의 고위직 여성과 연애를 하는 클리셰 이벤트도 참 흔하다. 강대한 적을 이기기 위한 중간 과정이며, 성인독자들의 정복/출세 판타지를 정확하게 건드린다(그 이벤트로 온 시리즈를 가득 채우고 일본에서 거의 국민적 사랑을 받은 [시마 과장]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런 것을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기반은 물론 우리 현실 또한 적잖이 이와 닮은 덕분이다. 서서히 디테일을 축적하고 적절한 성찰을 이루며 파격을 실험하기보다는, 자동화되어 있으며 뚜렷하게 보이는 사건과 조치의 반복이 훨씬 익숙하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본연의 사회적 보수성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그렇듯, 현실 세상에도 클리셰 이벤트는 널렸다. 학교폭력 같은 사회적 교육 문제가 발생하면 보수 언론과 정부 부처들이 손잡고 벌이는, “만화/게임 등 청소년 선호 대중문화 비난 이벤트”라든지 말이다. 너무나 아무런 생각도 없고 적잖이 유치하고 조건반사적 반복이라서 식상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나오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질 지경이다. 선거철마다 돌아오는 “사표를 방지하자” 캠페인 같은 것들도 클리셰 이벤트 속성이 넘치지만, 지면관계상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한겨레21의 격주 칼럼 ‘네남자의 만화방’. 4명의 필자들이 만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코너인데, c모의 경우는 만화의 어떤 코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은근슬쩍 세상이야기로 유도하는 것이 의도.)

Copyleft 2012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불가/영리뿔가 — [부디 이것까지 같이 퍼가시길]

Trackback URL for this post: https://capcold.net/blog/8377/trackback
4 thoughts on “클리셰 이벤트 [네남자만화방 / 한겨레21 905호]

Trackbacks/Pings

  1. Pingback by Nakho Kim

    "클리셰 이벤트" [네남자만화방 / 한겨레21] http://t.co/y5fhXzQf | 지난번의 '커플링'글에 비하면 너무 점잖은 내용으로 썼기에 반성(?)중. 다음번에는 다시 뭔가 저질러봐야지.

  2. Pingback by 가우디알렌포우쥰 드 미썅 aka 희선

    "클리셰 이벤트" [네남자만화방 / 한겨레21] http://t.co/y5fhXzQf | 지난번의 '커플링'글에 비하면 너무 점잖은 내용으로 썼기에 반성(?)중. 다음번에는 다시 뭔가 저질러봐야지.

  3. Pingback by Joonho Bang

    …미괄식 구성이었군요; – 클리셰 이벤트 [네남자만화방 / 한겨레21 905호] http://t.co/qgsfhsWs

  4. Pingback by Joonho Bang

    …미괄식 구성이었군요; – 클리셰 이벤트 [네남자만화방 / 한겨레21 905호] http://t.co/dfi0no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