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대학교 교지 ‘고대문화’ 2013봄호(PDF본 클릭)에 기고한 글. 그냥 작품 추천 몇 개 하는 것보다, 결국 만화독서에 대한 나름대로의 조언.
이왕이면 만화를 더 잘 읽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어떤 의미에서, 세상에서 가장 허망한 작업이 대중문화 분야의 평론이다. 대중문화는 별다른 설명이나 배경 학습 없이도 대중들이 곧바로 몰입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기에 바로 “대중”문화다. 누가 훈수를 두지 않아도 대중은 알아서 즐기고 있으며, 나아가 무엇이 옳다고 가르치려 드는 것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 같은 거창한 말을 꺼내려는 것이 아니다. 누가 무언가를 훈계하는 순간, 스스로 알아서 즐기는 재미가 떨어지기에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기에 작품의 의미를 탐구하는 평론보다는 작품을 골라주는 평론이 많고, 재미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재미있다며 공감을 구하는 소개 위주로 가곤 한다. 그냥 많이 읽어본 사람이 대충 자기 재미있는 것을 골라줄 따름이며, 읽는 것부터는 각자의 몫일 따름이다.
어쩌면 대중문화에 대한 감상능력이란, 마치 누가 심층 학습을 시켜 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몇 번쯤 넘어지면 알아서 잘만 깨우치는 걸음마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냥 걷고 뛰는 것이 아니라 “잘” 달리고 싶다면, 이왕이면 당연해 보이던 그 과정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깅인지 마라톤인지 어떤 식으로 달릴 것인가에 따라서 자세도 교정하고, 호흡법도 가다듬고, 식이 조절도 한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수련하는 부분도 있고 전문가에게 배우는 부분도 있고 뭐 그런 식이다.
만화라는 대중문화의 꽃을 (밀도마저 마음대로 조종하는 그림과 글을 총동원해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어떻게든 많은 이들에게 작품의 내용과 정서를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읽는 것 또한 같은 비유를 적용해볼 수 있다. 만화를 재미있게 읽는 것은 알아서 할 줄 알고, 취향에 맞는 만화를 소개받는 것은 그냥 친구들이 요새 뭘 읽었는지 직접 묻든 페이스북을 스토킹하든 정보를 모아보면 된다. 하지만 이왕이면 좀 더 깊숙한 재미를 얻고 싶다는 호기심이 있다면, 즉 즐기는 김에 뼈와 살로 흡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났다면, 그러니까 시간과 주의력 할애하는데 이왕이면 만화를 통해서 세상을 알고 싶어졌다는 기분이 들었다면, 혹은 기타 어떤 거창한 욕망이 생겨났다면, 약간의 가이드를 참조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짧은 지면에서 무슨 ‘만화 깊게 읽기’ 세미나를 열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런 관심들이 허무한 막다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줄 만한 첫 단추 쯤으로, 즐김의 몇 가지 유형과 방법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장거리 조깅을 할 때는 처음부터 전력질주하면 쥐나니까 천천히 시작하고, 들숨 날숨 좀 내쉬라는 수준의 팁 정도다.
공감대
만화를 잘 읽기 위한 첫 번째 질문은, 내가 이 만화를 왜 읽는지 자문하는 것이다. 누가 숙제로 내준 것이 아니라면, 답은 거의 항상 “재미있으려고 읽는다” 정도다. 그런데 그 재미는 아주 거칠게 나눠도 크게 두 가지 초점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작품 안에서 자신에게 전달되는 무언가에 즐거워하는 내적 동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작품을 지렛대로 하는 사회적 효용이다. 예를 들자면 전자는 [마음의 소리]의 성공적 개그를 보고 웃음이 터지는 것이다. 후자는 “이번 화 빵터짐”이라고 트위터에 올려서, 나는 이런 것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이고 여러분은 이런 센스 있는 사람을 팔로우하고 있는 것이라며 자기 위치를 정립하는 것이다.
내적 동조라는 즐거움은 문학 교육에서 늘상 배워온 재미의 규칙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을 담아낸다. 결국 독자와 이야기 사이에 공감대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작품은 캐릭터에 대한 감정이입을 유도하거나, 아니면 상황에 대한 직관적 납득을 시키거나 기타 여러 방식을 시도하게 된다. 이런 부분은 가장 원초적으로는 소소한 일상 상황에 대한 묘사를 온라인 게시판에 올려놓는 소위 ‘공감툰’, 가장 복합적으로는 현실사회의 어떤 복잡한 정치적 일면을 은유적으로 녹여낸 대하SF서사 만화 같은 것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내적 동조라는 측면에 대해서 더욱 깊숙하게 즐거움을 파고들 수 있는, 즉 ‘더 잘 즐기는’ 필살 팁은 무엇일까. 이런 비급을 아무렇게나 노출하면 곤란하겠지만, 특별서비스로 만천하에 공개하도록 하겠다. 바로… “이 작품, 나한테 왜 이렇게 즐거움을 주는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허망해도 어쩔 수 없이, 이것이 정석이다. 즐김의 순서는 이유를 먼저 알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느끼고 이유를 생각한 후 그것이 더 큰 즐거움으로 피드백되는 구조다.
왜 어떤 작품들은 내용이 공감이 가는가. 보통은, 소재가 딱 내 인생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일면이 있는 줄도 잊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 작품이 그런 부분을 정확히 건져 올려주기에 공감을 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여러 방향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주인공들을 다루고 있는 만화 [무한동력](주호민)은 소재로만 봐도 충분히 오늘날 청년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끌기 좋은 내용이다. 하지만 소재 뿐이라면 누구든 취직 소재만 다루면 공감대를 사고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을텐데, 현실은 최근 인기 주류 만화 가운데 이 작품만큼 그 소재를 공감대 넘치는 재미로 다뤄낸 경우가 드물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자신이 갖추지 못한 스펙에 대한 말 그대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불안, 처지는 급박한데 오히려 스타크래프트 한 판으로 도피하는 심경들, 이왕이면 번듯한 직장(=사회적 편견에 의하면, 연봉 높은 사무직)에 들어가겠다는 현실적 소망, 그리고 그 안에서 한번 변변히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았던 꿈의 이야기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런 일면을 품고 있을 법한데 잊고 있었던 것을, 작품을 통해서 자극받는다.
공감대는 개인의 처지를 넘어서기도 한다. 용산 재개발 과정에서 반대시위에 대한 과잉진압으로 숨진 철거민들의 사연을 그려낸 [내가 살던 용산](김홍모 외)을 읽을 때, 소재로서 자신도 철거민이기에 공감대를 느끼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반사회적 파괴분자들이 아니라 그저 자리 잡고 장사 좀 해보려던 평범한 이들이 어쩌다가 망루에 올라가게 된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모습으로서의 사회적 공감대를 서서히 느낄 수 있게 된다. 각각의 이해관계나 세부적 처지 등을 넘어, 한 사회를 살아가는 대등한 구성원들로서 사람들의 사연을 바라보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안을 조금씩 고민하게 되는 마음, 즉 연대의식을 싹틔우는 것이다.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도, 심지어 사람이 아니라도 좋다. [야옹이와 흰둥이](윤필)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개와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표현하는데, 많은 대사와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장치들 없이 담담하게 노동 현장의 여러 수탈들과 서로에 대한 조그마한 호의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효과적이다.
물론 공감대는 은유적일 수도 있다. 현실세계와 매우 다른 모습이 설정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독자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기에 계속 읽도록 붙들어 놓는다. [안되는건 안되는거다](홍작가)는 현대의 한국을 무대로 하면서도, 마법과 주술이 난무하며 인간과 동물의 영혼이 바뀌고 사람들이 미이라화되어 죽어나간다. 실없는 코미디와 조폭 액션, 환각마법에 대한 대처 같은 이질적 요소들이 마구 섞이며, 특정 캐릭터에 대한 감정이입을 하기에는 각자 조금씩 나사가 빠져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뛰어난 즐거움을 주는 공감대의 끈은, 욕심과 멍청함, 충직함과 콩가루 관계가 고루 섞인 시끌법적한 부대낌에 있다. 개성 강한 이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어쩌다가 한 팀으로 묶이고, 그 안에서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비록 방식은 다르다할지라도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한 어떤 공감대를 울린다.
내 이야기의 어떤 일면을 어떤 작품이 함께 알아주고 나아가 내게 재발견하게 만들어줄 때, 공감대의 즐거움이 생긴다. 내가 이 작품의 어떤 부분에서 공감대를 느꼈는지 되짚어보는 것만으로도, 즐김은 크게 늘어난다. 한층 업그레이드해서 그것을 체계적으로 살펴보다보면 그때는 슬슬 깊숙한 독자로 발을 딛게 되고, 더욱 레벨을 올려서 그런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고자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하면 최고의 즐김이 시작된다. “이것 짱 재밌음”에서 “이런 부분에서 내가 겪는 이런 현상들을 다시 바라보게 됨”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뽐내기
작품의 내적 공감대만큼이나 중요한 즐김은 바로 사회적 효용이다. 내가 이런 작품을 읽는 사람이라고 주변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널리 인식시키는 것이 바로 즐거움이다.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미디어 연구에서 이야기하는 ‘이용과 충족’* 이론에서도 정체성 확인 및 사회적 연계가 매체 이용 동기의 주요 범주에 늘 포함되어 있다 (*주: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특정 미디어를 선택하여 향유하는 이유, 즉 그들이 어떤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가를 탐구하는 미디어학 이론). 만화로 치자면, 나는 이런 만화를 좀 읽는 센스쟁이라고 으스대는 것이다. 강도에 따라서 자기만족이든 극강의 허세든 양상이 달라지겠지만, 중요한 즐김의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회적 즐거움도 몇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장르* 팬들 사이에서의 어울림이다.(*주: SF, 판타지 등 특정한 내용 분류(‘장르’)에서 전형적으로 기대되는 소재 및 전개 패턴을 최대한 따라가는 접근법의 대중예술 창작물.) 내가 이 작품의 장르적 재미를 이만큼이나 자세히 즐기고 있다고 과시하며,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고 즐긴다. 물론 장르물이라는 것은 내적 재미의 측면들을 충분히 갈고 닦았기에 인기를 끌지만, 종종 그 과정에서 재미의 코드가 지나치게 기성품화되어 세부적 공감대의 폭은 마모되어 없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개별 작품으로서 즐기는 것을 넘어 장르의 일부로서 즐기는 팬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더 큰 즐거움이 만들어질 수 있다. 세계관 설정에 대해서 서로 이견을 다투기도 하고, 작품에서 다뤄지지 않은 방식으로 캐릭터들 사이의 또다른 관계 맺음 가능성을 상상력으로 채워넣기도 한다(‘팬 픽션’, ‘동인지’ 등이 그런 상상력을 2차 창작물로 만들어낸 것이다).
기본적 오락성은 당연히 전제되어야 하고, 그 중 세계관 설정이 크고 세밀한 작품들이 아무래도 이런 즐거움이 크다. 우주규모로 칼싸움을 벌이는 SF [나이트런](김성민)이나 몇 개 시대와 여러 세계와 신들을 체계적으로 짜놓고 풀어가는 판타지 [쿠베라](카레곰) 같은 장르물들이 좋은 사례다. 이런 작품들이 어떤 측면에서 장르적 코드들을 잘 풀어나가고 세계 설정을 절묘하게 다듬었기에 팬들로 하여금 서로 대화를 나누게 만드는가. 절묘하게 심어놓은 복선을 발견하여 이후를 예측하는 것이 주는 즐거움은 어떤 식인가. 계속 깊게 파다보면 팬들이 서로의 애증을 견주며 작품을 함께 즐기는 것을 넘어, 팬 커뮤니티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혹은 지난 십 수년간 만화의 문화예술 지위 확보를 하겠다는 일환으로 좁은 평론계에서 계속 추진해왔던 방향인, 사회적 책임감이나 예술적 무게감이 전면에 드러나는 만화들에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최소한 “교양 있는 사람”으로 허세를 부리기에 매우 적합하며, 그러다보면 오락성의 코드가 약해서 단번에 잡아내지는 못했으나 사실은 고이 심어져있던 공감대의 내적 즐거움도 함께 발견해낼 수 있다. 게다가 많은 경우, 책을 고급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서가에 꼽아놓았을 때 책등이 예쁘다.
사회적 책임감을 내세우는 만화라면 역시, 세상의 모순과 갈등들에 대한 직시를 담아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작품들을 열심히 접하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과시하고, 운이 좋으면 정말로 관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나는 99%다](박순찬) 같은 날카로운 시사만평 모음부터 [먼지 없는 방](김성희) 같은 특정한 비극적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문제 요소들을 파고 드는 작품들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작품들이다. 당장 그 안에서 다루는 내용을 즐겨보기 위해서는 사건 자체를 알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껍데기 시사 상식이 아닌 그 안에 들어 있는 논점들에 대한 시각을 키울 수 있다.
비단 구체적 사건이 아니라도, 이스라엘 점령하의 팔레스타인 시민들의 갑갑한 생활을 담은 [팔레스타인](조 사코) 같이 어떤 ‘상태’를 전하는 작품을 보는 것도 좋고, [브이 포 벤데타](앨런 무어, 데이브 로이드) 같이 파시즘의 문제과 그것에 대한 저항이라는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그려내는 작품도 괜찮다. 그저 기억해 둬야할 점은, 남에게든 자신에게든 무언가를 제대로 과시하여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결국 그런 작품들이 담아내는 내용들도 온전히 즐기고자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 정도다.
예술적 무게감의 측면은 한층 사회적 효용으로 소화하기 좋다. 즉 미학적 완성도를 뽐내는 작품들, 또는 문예적 가치를 논할 수 있는 대표적 고전 만화들 말이다. 오락성에 가장 강세를 두기 마련인 대중문화에서 기대하는 그저 그런 수준의 무게감을 크게 상회하는 명작들을 읊으며, 작품의 어떤 지점들이 미학적 완성도가 뛰어난 것인지 설명하는 모습이야말로 과시의 극치다. 과하면 “재수 없어” 보이는 것이 부작용일 따름이다.
[지미코리건] (크리스웨어)을 펼치며 하이퍼텍스트적 비주얼 내러티브와 현대인의 고독이라는 주제를 조화시키는 솜씨를 운운한다든지, [샌드맨 연작](닐 게이먼 외)을 펼치며 그리스신화, 셰익스피어, 현대 대중문화, 기타 모든 서사들을 이야기라는 큰 주제로 합쳐내는 진정한 현대 판타지의 걸작이라고 칭송하면 아마도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좌중을 제압할 것이다. 어쨌든, 이런 것도 만화를 좀 더 깊숙하게 즐기는 방법이다.
간략히 살펴본 과정에서 이미 눈치를 채신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각 작품은 각각의 특정에 맞는 방식으로 즐기는 것이 적합하다. 사회적 무게감을 강조한 것을 장르팬으로 즐기려면 좀 더 어려우며, 공감대를 최대한 강조했는데 예술적 무게감으로만 접근하면 당장의 오락적 재미부터 상쇄된다. 어떤 부분에 초점을 두어 즐거움을 해석할 것인가, 그것부터가 이미 즐김의 과정이다.
이런저런 화두를 꺼냈지만, 결국 모든 것은 처음에 나왔던 하나의 팁으로 압축된다. 즐거웠으니, 왜 즐거웠는지 스스로 질문해보시길. 스스로 만족할만큼 찾아내면 훌륭하고, 그렇지 못하면 다른 이들의 생각, 특히 전문적으로 평론을 하는 이들의 글도 참조하면 된다. 남들이 좋다고 추천하는 작품을 모두 즐거워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즐거운 작품에 대해서 좀 더 파고드는 것이 바로 만화를 더 “잘” 읽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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