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 연구자로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항상 재미 있는 담론쌩쑈가 끊이지 않는 한국의 온라인. 현재의 핫이슈에 아프간 피랍사건이 돋보이는 것이야 당연한 귀결이지만, 흥미롭게도 그것과 거의 맞먹는 정도로 주목받는 토픽이 있으니 바로 영화 ‘디워’. 특별한 사회적 이슈거리가 들어있지 않은 순수한 장르 오락영화 한 편으로 이렇게 시끌법적한 것을 보고 있다보면 참… 역시 고온다습한 날씨가 고온안습한 쌈박질을 만들어낸다고나.
!@#… capcold는 바로 그 헐리웃식 한국 괴수영화(…) ‘디워’를 아직 보지도 않은 입장에서, 솔직히 사람들이 그 영화를 좋아하든 열광하든 싫어하든 혐오하든 별로 상관없다. 다만 기왕이면 근거있는 사회, 앞뒤 ‘말이 되는’ 대화를 선호하기는 하지만. 뭐 그래도 자기가 좋아서 본다는데, 자기가 싫어서 안본다는데 뭐가 문젠가. 영화적 완성도, 장르적 성취의 기준으로 보는 사람들이 아무리 디워를 싫어하더라도, 당신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좋아했다면 당신의 영화표 값은 한 것이다.
!@#… capcold에게 정작 흥미로운 것은 그저 영화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들이 아니다. 남들도 닥치고 마음에 들어해야 한다고 미친듯이 소리치며 설파를 하는 뉴스 리플러들, 블로거들 쪽이 더 관심이 간다. 황우석 줄기세포 사건이야 뭐 줄기세포 만들면 산업이 쑥쑥 성장하고 옆집 병자가 모두 벌떡 일어선다는 식의 직접적 이익의 느낌이라도 있었지만, 솔직히 장르오락영화 한 편이 잘된다고 해서 그들에게 어떤 이익이 떨어진다고 상상하고 있겠는가. 심지어 종교라 할지라도 선교를 함으로써 자신이 얻는 이익(천국행)이 있다. 즉 정말로 ‘취향’의 문제이고 자기만족 이외에는 별반 동기부여가 없는 것이 정상일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열성을 다 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항상 그렇듯 뻘스럽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도달한 capcold의 가설은 이거다: 자신의 취향에 그저 한없이 자신감이 없어서.
!@#… 좀 더 자세하게 이 가설으로 들어가자면, 문제는 바로 문화 향유자로서의 자신감 결여.
1) 자기가 왜 좋아하는지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2) 각각의 논리에 의하여 낮은 평가를 내리는 이들, 혹은 그저 좋아하지 않는 이들 앞에서 자신의 선택이 흔들릴까봐 불안해지며
3) 방어적 불안은 분노가 되고,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고 결국 싸움을 걸고 싶어지게 되어
4) 비슷한 불안감의 소유자들끼리 똘똘 뭉쳐서 대세를 향해 고고고.
자신이 열광한다는 그 현상 말고 모든 다른 시각들은 , 나의 열광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폄하해버려야 할 것들이다. 그래서 목숨걸고 열심히 비이성적인 악플로 적들을 공격하고, 자신의 ‘빠심’을 간증한다. 이거이거, 얼마나 소모적인가.
예를 들어 80년대부터 핍박받으면서도 만화/애니 등을 진지하게 좋아해온 세대는 대체로 자신의 취향에 어느 정도 확고한 자신감이 있다. 그래서 주변인들(만화책을 버리려는 가족들, 뭔가 괴짜/철없는 인간 취급하는 동료들 등등)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그들을 개종시키겠다며 오버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자신들의 취향을 서로 나누는 방법을 체득하고 있다.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남들이 싫어하는게 죄가 아니라는 것을 좋든 싫든 학습해왔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문화적 취향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향유를 해본 경험이 없는, 문화 향유마저도 그저 적당히 대세만 적당히 쫒아다닌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더욱 방어적, 즉 공격적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처음으로 변호를 해야 하기에, 별로 써본 적 없는 머리를 한꺼번에 너무 격렬하게 굴려서 퓨즈가 나가는 것이다.
!@#… 이런 것은 자연스럽게 자기 취향, 선호를 하나씩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향유하다보면 해결될 문제들이다. 그런데 그건 워낙 시간과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니까 우선 살짝 미뤄두고, 당장의 미봉책을 해보자. 우선 현재 자신의 취향을 스스로 구체적으로 ‘납득’하는 것이다. 취향의 커밍아웃이다!
당신의 문화취향은 어쩌면 다음 중 하나, 또는 여러 개에 해당된다. 스스로 거울이라도 보면서 복기해보면 좋겠다.
A. “노골적인 애국심으로 포장되지 않았지만 순도 높은” 애국주의 정서를 좋아한다. 혹은 최소한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인다. 엔딩에 아리랑이 나오면 기분 좋고.
B. 오락영화를 보고 싶을 때, 세밀한 설정이나 짜임새 있는 이야기는 싫다. 피터 잭슨판 영화 ‘킹콩’에서 캐릭터성을 열심히 구축한 첫 한 시간은 완벽한 시간낭비고,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오크 개떼 전투 이외의 모든 순간은 졸아도 좋다.
C. 영화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마케팅에 빠져드는 것을 즐긴다. ‘심형래의 열정'(이거,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 제작과정을 둘러싼 스토리로 바람을 잡는 전형적인 마케팅이다)과 ‘대한민국'(이것도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한국형 마케팅이다)이라는 단어를 전혀 쓰지 않고도 나름대로 합당하게 이 영화를 호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
D. 그냥 정의가 아니라, 약자의 정의를 꿈꾼다. 영화가 영화적 완성도의 잣대로서 평가받는 식의 차가운 ‘정의’보다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열정으로 모든 것을 극복한 ‘약자’ 영웅 심형래가 평가받는 약자의 정의를 원한다. 약자면 정의고, 정의면 자고로 약자여야 한다. 그 정의로운 논리를 위해서는 ‘악의 강적’도 필요하다. 충무로라든지, 평론가라든지. 아 물론 ‘나’는 그 약자들에 속해야 하고. **
E. 오락영화 자체로 즐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조국을 상상하고 싶어한다. 미국에서 흥행이 잘 될 것이라는 심히 근거없는 예측 기사에 가슴이 벅차다는 것이 그 증거다 (혹시 괴수영화 부흥의 가능성에 두근거렸다면 그냥 오타쿠… 핫핫). 그저 괴수영화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수출역군 세계일류 대한민국의 발전에 감격하는 것이다.***
F. 드넓은 오지랖은 훌륭한 미풍양속이다. 디워의 흥행여부에서 한국영화의 미래를 본다. 한국영화의 산업적 발전이라는 대의에 기여하는 오지랖을 반드시 발휘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디워가 흥행폭발하든 망하든 중간 어디쯤에 있든, 무려 ‘한국영화’가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걱정마시길. 한국영화판, 보기보다 강하다. ‘성냥팔이소녀의 재림’도 견뎌냈다. 혹은 보기보다 건실하지 않다. ‘지구를 지켜라’ 정도 퀄리티로 만들어내도 쫄딱 망하잖아.
!@#… 물론 capcold는 이런 취향을 도저히 좋아할 수 없지만, 굳이 싸워서 바꿔주겠다고 나설 생각도 에너지도 없다. 각종 생활방식과 세계관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만들어진 취향을, 그저 “이봐요 그건 이런저런 논리에 의해서 조낸 말도 안되는 허접한 생각이니까 그냥 때려치우세요”하고 해봤자 바꿀 수 있을리가 없지. 무엇보다 이런 취향들, 그 자체로는 결코 ‘나쁜‘ 것 아니다. 제발 안심하세요. 헐리웃 영화들의 미국 관객들도, 나머지 세계의 관객들도 대다수는 이쪽이고 (E, F는 좀 더 한국적인 현상이지만). 스스로 자각만 잘 하고 있다면 별 문제 없다. 우국충정 빠심을 핑계로 무한 삿대질만 안하면 말이다. 내가 즐기고 주변에 추천해주는 것 이상으로, 반드시 이 작품만은 내가 키워주고 말겠다는 오바질만 안하면 말이다. 인간 심형래와 영화 디워를 착각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정의감만 충만하면 팩트나 근거 따위는 가뿐하게 무시해도 대략 사회정의라는 골때리는 세계관만 좀 자제하면 말이다.
!@#… 그냥 당당해져라. 아 그래 나는 이런 취향이야. 전문 필자들의 평론에는 영화적 완성도라든지 산업적 의미라든지 하는 전문적 평론으로서 갖춰야할 판단 기준이 있기에 당신의 ‘취향’과 어긋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의 취향이 당당하고 뚜렷하다면, “아 그 측면에서는 그렇구나, 참조하겠어. 그런데 난 역시 이 취향이야” 하고 즐겁게 향유할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의 향후 영화 또는 문화 일반, 나아가 정치 선택에 있어서도 참 일관성 있는 나름대로 스트레스 낮고 행복한 삶이 기다릴 것이다. 당신들이 오바성 삿대질을 해대서 어쩔 수 없이 방어하는 것만 빼면, 당신들 스스로 당당하기만 하다면 웬만해선 누가 당신들의 오락영화 취향 하나가지고 이혼서류 들고 쫒아오지도 않고, 직장에서 해고시키지도 않는다. 적당한 커밍아웃은 삶을 행복하게 해준다.
!@#… 그리고 덤으로 capcold 같은 이들의 삶도 행복하게 해준다. 항상 너무나 담론의 패턴과 향방이 예측불가 버럭질이면 도저히 연구를 할 수가 없어요… ㅜㅜ
— Copyleft 2007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뻘 각주]
* 물론 capcold는 그 영화가 취한 마케팅 방식을 두드러기날 정도로 싫어하는 부류에 속한다. 애국심에 호소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아리랑 엔딩에 심형래 인생극장 크레딧롤을 넣었다는 이야기에 뜨악했고, 순수’국산’기술 CG 운운하는 것에 애시당초 뜨악했고, 수년간의 각종 개발비는 물론 마케팅비도 다 포함시켜놔서 제작비를 700억으로 한껏 부풀려 발표해서는 “이거 꼭 성공하지 않으면 큰일나”하는 식의 위기감 조장 마케팅에도 뜨악했다. 심형래가 오만 군데 나와서 수많은 국내외 웰메이드 영화들을 싸잡아 쓰레기 취급함으로써 ‘자신감을 피력’하는 것도 뜨악했고, 그 기조가 온라인의 인터넷 사용자들 사이에서 한층 더 증폭되어 흩뿌려지는 것도 뜨악했다. 사실은, 그런 마케팅이 잘만 먹힌다는 것에서 더욱 뜨악했지만. 아마도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충분히 뻔뻔하게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 무너트려야할 적들에 대한 적개심 없이 영화를 호평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과업인가보다. ‘충무로'(도대체 그들이 이야기하는 ‘충무로’의 실체가 도대체 뭔지도 모르겠지만)가 악이고, ‘평론가’가 악이고, 감히 디워에 애국적으로 열광하지 않는 모든 이들이 다 악이고… 악과의 장렬한 싸움에 나서는 비장한 결의는 너무 피곤하다. 난 재미있는 현실도피성 오락영화 한 편을 보고 싶지, 선악의 장렬한 아마게돈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 미국에서의 흥행이 청신호니 세계수준이니 대박예감이니 하는 일부 언론발 기사들과 수많은 ‘소문’들은 익히 접하고 있는데, 리셉션 자리에서 주연배우의 립서비스나 시사회자리의 주례사 발언 말고 평론가나 전문적 영화광이나 시장분석가나 하다못해 현지배급사의 시장전망 예측 같은 건 도대체 어디에 있냔 말이다. 미국에서 9월 개봉이 어쩌니 하는데, 다른 사전 마케팅은 둘째치고 미국 주류 영화 사이트에서 예고편이라도 올라가 있다면 덜 궁금할텐데. 사실 그보다, 미국에서 히트치든말든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즐기는 것에 조금도 더 득될 것도 실될 것도 없지만. 대한민국 만세도 아름다운 희망도 다 좋은데, 님들하 제발 근거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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