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세상의 꿈을 꾼 적이 있다 –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기획회의 348호]

!@#… ‘위’로부터의 억압과 싸워낸다 한들, 다른 모든 방향에서의 굴레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세상의 꿈을 꾼 적이 있다 –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김낙호(만화연구가)

꽤 보편적으로, 날아오른다는 상징은 자유와 이상의 실현을 나타내는 쪽으로 활용되곤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특수한 운송수단이 없다면 사람은 날아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려가고 뛰어오를 수는 있어도, 날아오르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 상징은 살짝 뒤집어보면 자유와 이상 같은 것은 실현하기 매우 어렵다는 점, 우리 인생은 결국 금방 다시 바닥을 딛게 된다는 세상살이의 무게를 나타내게 된다.

꿈도 이상도 있었으나, 금새 다시 바닥을 직시하게 만드는 세상사의 속박은 무겁다. 특히 정치사회적인 격변기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은, 그런 격변기를 지나고 나자 더욱 그럭저럭 미적지근한 삶을 살아나가는 자신의 모습이다. 원래 꾸던 세상의 꿈과 매우 멀어졌는데도 어쨌든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의 자신을 깨끗하게 부정하거나 망각할 수도 있다. 지금은 이렇지만 언젠가는 결국 이뤄내리라 희망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아니면 두 가지 사이에서 계속 갈등 속에 번민하며 여생을 보낼 수도 있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안토니오 알타리바 글, 킴 만화/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은 세 번째 길을 가다가 생을 마감한 사람의 이야기다. 스페인 20세기 현대사의 격동기, 즉 군부 독재에서 부패한 공화정으로, 프랑코 장군의 침공과 내전으로, 그에 항거한 인민전선의 짧은 승리로, 곧 이어진 쿠데타와 오래 지속된 프랑코 파시스트 독재 정권으로, 독재자의 죽음 후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나 그간 속물적 자본주의가 사회의 근간이 되어있는 세상 말이다.

이야기는 요양원에 있는 한 노인의 추락 자살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자신의 아버지인 그 노인의 마음이 되어, 5층에서 뛰어내려 바닥까지 잠시나마 하늘을 날고 있는 그의 앞을 스치는 인생역정을 따라간다. ‘비행의 예술’이라는 뜻의 원제 그대로, 이 작품은 비행의 상징으로 가득하다. 젊은이들을 전쟁과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맨바닥에 박음질하고 지나가는 재봉틀 비행기처럼 비행을 막아버리는 이들도 있다. 그저 행복감으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느낌을 표현하는 간편한 비유도 있다. 하지만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이면서도 그 동안만큼은 날아오르는 것이 되며, 그 ‘비행’을 인생 그 자체에 대입시키는 방식이야말로 백미다. 각 챕터는 아래를 향해 추락하는, 또는 날아가는 노인이 건물의 한 층을 지나는 모습을 표지로 하여, 스페인이라는 사회의 역사이자 개인이 경험한 삶의 과정이었던 분기점들을 한 덩어리씩 그려낸다. 현대사를 꿰뚫는 삶의 궤적은 스페인 국내에서 큰 호응을 얻어, 각종 관련상을 휩쓴 바 있다.

그 속에서 그저 신기하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고 싶었던 시골 청년, 함께 살기 좋은 세상을 소박하게 꿈꾸며 전장의 우편배달부를 했던 나날들, 목숨을 걸고 전선을 넘어 아나키스트들의 진영에 합류한 시절이 나온다. 그러나 결국 안정적 독재정권이 오고, 그 안에서 사업을 벌이며 새로운 생활로 뛰어든다. 동료를 배신하고, 다른 이들을 착취하는 생활 위에 ‘행복’을 세우는 것이 당연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생활조차 결국 접히고, 한층 그저 그런 노년의 여생이 기다릴 따름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맨 처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나키스트’라는 용어가 주는 거창하게 불온한 느낌과 달리, 스페인 근현대사의 인민전선에서 싸웠던 주인공과 동료들의 이상향은 지극히 소박했다.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보자는 것이다. 모든 국가적 장치들을 해체하여 위계 없는 자유로운 결속체들로 이뤄지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나키즘(‘무정부주의’라는 번역어는 뉘앙스가 지나치게 다르다)인데, 실현가능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무엇에 대한 저항인지는 매우 명확하다. 권력화된 종교의 보수적인 사회문화 지배, 국가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개별적 삶의 희생, ‘주인’으로 상징되는 계급적 불평등을 벗어나 모두들 함께 어우려져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상의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은 무엇을 해내야 가능해지는 것인가. 아니 온 세상이 모두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는 곳이 되지 못해도 최소한 자신의 삶의 공간이나마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군 우체부로 일하며 평화의 소식을 전달하면 그 하늘에 가까워지는가. 독재를 획책하는 눈앞의 적군을 물리치면 되는가. 전쟁 후의 세상에서, 어쨌든 열심히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놓으면 되는가. 매 순간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고 움직였으나, 점점 원래 꿈꾸던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질 따름이다. 다들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 내 가족이라도, 나라도 행복한 세상으로 범위를 좁히지만, 종교의 압박도 받아들이고 조국에도 복무하고 자본가로서 ‘주인’이 되었을 뿐 그것이 행복으로 남지 않았다. 그리고 말년에는 한없이 허무할 따름이다. 한 때 아나키스트의 맹세였던 녹인 납탄 반지는, 희망이 아닌 죄책감이 된다. 결국 일련의 문제로 노년에 공장이 망한 후 안토니오의 한 마디가 이런 부분을 절절하게 잡아낸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 없다는게 아니었다. 아들이 학업을 마치고 집을 떠나자 나와 페트라 둘만 남게 되었다. 일도, 책임져야 할 것도 없이… 함께 공유할 것도 없이..”

정서적으로 무겁고 다루는 사건도 많으며 무엇보다 대사량이 엄청난 작품이지만, 말끔한 선으로 그려진 뚜렷한 형상, 어린 날의 자동차 질주와 노년의 달리는 휠체어를 대비시키는 등 꽉 짜인 구성 등의 표현적 장점들 덕분에 이야기가 목에 걸리지 않는다. 작가는 “누가 이 이야기의 주체가 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결국 아버지를 1인칭으로 만들기 위해 만화라는 매체를 선택했다고 후기에서 밝히는데,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비록 스페인 현대사는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낯선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이 작품에서 울림을 얻기에 부족함은 없을 듯하다. 내전의 역사, 장기 군부독재 등이 한국 현대사와 지니는 공통점들도 물론 상당하다. 하지만 그런 거대한 사회적 흐름이 아니더라도,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는 꿈, 동료들과 그 꿈을 함께 키워내며 열정적으로 행동에 나선 경험, 일부의 성공과 훨씬 많은 좌절, 그 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위해 적응하며 지지부진해지는 모습, 그 과정에서 원래의 꿈과 이상을 깨끗하게 배신하는 반전, 그런데 그렇게 하고도 나중에 보니 조금도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후회 등 보편적 공감대가 가능한 삶의 흐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이미지프레임(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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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옆자리 세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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