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갑한 사회, 절대적 힘, 그리고 반항 – 아키라 [기획회의 347호]

!@#… 작품 자체에 대한 내용에 한정시킨 서평. 이번 한국어 정식판의 판본과 인쇄 논란 등에 대해서는, 글 송고 당시 아직 그 논란이 없었고 실물종이본을 접하지 못했었기에 서평에 포함시키지 못함. 이후 논란 와중에 따로 단독글은 정리하지 않고 트윗과 페북으로만 따로 남겼음(클릭).

 

갑갑한 사회, 절대적 힘, 그리고 반항 – [아키라]

김낙호(만화연구가)

여러 사정에 의하여, 이미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고전이자 교과서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식으로 출간된 적이 없는 작품들이 간혹 있다. 검열 문제 때문이라면 그런 상황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어쩌다보니 출판 조건이 맞지 않아 그런 것이라면 매우 곤혹스러워진다. 그런데 어떤 출판사가 감히 나서서 그 조건을 채워주고 결국 정식 출간을 해줄 때, 작품의 팬들에게 속된 말로 ‘용자’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키라](오토모 가츠히로 / 세미콜론/ 전6권)이다. 이미 80년대말 이래로 세계적으로 일본만화의(그리고 88년 만들어진 극장용 애니메이션판 덕분에 일본 ‘아니메’에 대해서도) 명실상부한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어온 작품이자, 표현력이라는 측면에서도 이후 일본만화와 그 영향을 받는 한국 및 여러 나라의 작가들에게 큰 족적을 남긴 작품이다. 이미 한국어로 출간된 무수한 해적판본들, 그리고 미술서점과 수입서점들에서 많은 이들이 경탄하며 입수했던 원서만 존재했던 20여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마침내 정식 한국어본이 출간되었다.

일정 세대에 속하는 만화를 전문으로 하는 이들에게, [아키라]는 종종 ‘하나의 작품’이라기보다 만화를 생각하는 방식을 헤집어놓은 이정표에 가깝다. 필자의 경우만 하더라도, 만화에 대해 팬심을 넘어서는 전문적 관심을 기울여볼 가치가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에 우연찮게 만화라는 양식이 도달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봉우리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 결과, 만화를 진지하게 논하기로 결심시킨 가장 중요한 계기 중 하나였을 정도다.

[아키라]는 매력적인 이야기로서도, 만화라는 양식의 표현력을 한쪽 방향으로 극대화한 연출로서도 대단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근미래, 일본 도쿄에서 갑자기 거대한 폭발이 발생하여 상당 부분이 파괴되고, 다시금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번화한 도시로 재건된 시점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번화하지만 인공적이고 갖은 사회 불만이 충돌하는 불안한 안정의 대도시에서, 반항아들은 폭주족이 되어 거리에서 질주하는 세상이다. 폭주족 무리 중 하나의 리더인 카네다가 클라운 갱단과 오토바이 폭주 대결을 하던 어느 밤, 카네다의 친구이자 그를 존경하면서 동시에 질투하던 데츠오가 노인의 얼굴을 한 꼬마아이를 피하려다가 사고를 당한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정부측 군부의 비밀 초능력 인간병기 개발계획, 정부를 반대하고자 그것을 폭로하려는 비밀저항단체, 그 사이에 엮여있는 종교세력 등이 엮여 있는 복합적 사건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군부의 시술을 받고 초능력에 눈뜨게 된 데츠오가 그간 비뚤어진 열등담에 대한 반대급부로 파괴적 폭주를 하고, 카네다와 폭주족 동료들도 소동의 한복판에 뛰어들게 된다.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적 파괴력의 초능력을 둘러싼 음모와 쟁탈전, 폭주와 비극, 이해관계에 따른 여러 이합집산 등이고, 모든 것은 결국 또다른 거대한 파괴를 향해서 달려간다.

[아키라]의 기본 얼개는, 터무니 없는 절대적 힘을 발견하자 남용하고는 그것이 통제에서 벗어나자 황급하게 덮어버리는 어른들의 사정을 한 쪽에 놓고, 다른 쪽에는 거칠고 무모하지만, 그런 겉모습뿐인 질서에 한껏 저항하는 폭주 청년들을 놓는다. 작가의 출세작이었던 [동몽]에서도 이미 충분히 뚜렷하게 나타났던 관심사인데, 안정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불안하고 갑갑하여 언제라도 무너질 것 같은 사회를 놓고, 그 것이 어떤 초월적 힘이 폭주하며 파괴될 지경에 놓인다. 그런데 그것을 저항해내는 것은 전혀 그럴듯하지 않았던 이의 노력이다. 불안한 평화에 동화되지 않았던 불량청소년 폭주족들이 결국 가장 자유롭게 움직이며 결국 자신들의 힘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간다. 이 과정을 교훈적인 내용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충돌과 극복을 서슴치 않는 자유로운 질주로서 그려낸다.

이 작품을 명작으로 만드는 것이 불온하게 질주하면서도 강렬하게 즐거운 내용이라면, 걸작으로 끌어올려주는 것은 압도적인 표현력이다. 단지 줄거리를 술술 전달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요소들을 가장 강력해내는 장인정신으로 가득하다. 많은 서로 다른 소속과 이해 관계의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서로 맞물리게 구성해낼 것인가. 대도시라는 인공적 공간과 초능력이라는 파괴적 초월성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문명 세계와 SF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초월적 시공간을 묘사하는 것은 어떤 식이어야 하는가. 그 안에서, 일관되게 앞으로 질주해 나아가는 정서는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이 모든 것에 대해, [아키라]는 하나의 모범답안 그 자체다. 인물들의 액션을 그려내는 동선 묘사와 칸 분절, 시선 흐름 처리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액션의 와중에서도 혼동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파괴적 힘이 작용하는 대목의 묘사력, 특히 건물 등의 큰 구조물들이 초능력으로 파괴되는 모습은 뛰어난 무게감과 공간감으로 가득하다. 거대한 아스팔트 정글을 매 칸마다 가장 적절한 다양한 구도로 그려내고야 마는 고집은, 이 작품이 어째서 창작자들에게 교과서 취급을 받는지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접근은 당대 일본만화의 주류 흐름이었던 테즈카 오사무식 표현방식과도 뭔가 달랐고, 반-데츠카를 표방한 극화 운동의 전통보다도 야심찼다. 동시에, 이 작품은 물론이고 SF/판타지 만화 전반의 시각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던 프랑스 작가 뫼비우스가 그려낸 공간들보다도 격렬했다.

이런 표현력을 바탕으로 폭력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해 나아가면서, 추상화되거나 과장된 정서 연출이 완전히 배제된 3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파괴적 질주의 과정을 독자들도 함께 냉철하게 목격하게 만든다. 도시 문명의 요지경을 그려내는 최고의 공간감 및 질주하는 충돌을 담아내는 절정의 연출력으로 묘사된, 일본만화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활력 넘치는 불온함의 만화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물론 어떤 작품도 모든 측면이 완벽할 수는 없기에, [아키라] 역시 이야기의 후반 일부에서 전개의 긴박감이 다소 느슨해지는 내용적 측면이 있고, ‘대동경제국’ 같은 용어가 실세계의 제국주의를 연상시키며 거부감을 부를 수도 있으며(물론 작품 내적으로는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워낙 다양한 이야기요소들이 사회의 여러 측면들을 반영하는 만큼 이 줄거리에서 좀 더 현실정치적 맥락을 – 예를 들어, 자위대 상설화라든지 – 읽어내는 평자들도 있었을 정도다. 그리고 [아키라]의 충격을 직접 느껴보지 못했던 오늘날의 좀 더 젊은 독자들에게는, 이 작품에 대해서 만화 관련인들이 다들 서로 짜기라도 했듯 칭송하고 교과서라고 부르는 모습이 어색할 수도 있다. 어쨌든 고작 80년대에 연재된 옛 SF활극일 뿐인데 과연 그렇게 대단한 작품인가.

그런데, 정말 그렇게 대단한 작품이다. 그것이 [아키라]다.

아키라 AKIRA 박스세트 – 전6권
오토모 가츠히로 지음, 김완 옮김/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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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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