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을 위한 교훈 – 지슬 [기획회의 367호]

!@#… 무의미한 배제에 관하여.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한 교훈 – [지슬]

김낙호(만화연구가)

한 사회가 큰 파괴적 갈등을 겪은 뒤 여차저차 좀 더 발전적 방향으로 정상성을 되찾는다는 것은, 보통은 그 내홍의 계기가 되었던 요인에 대하여 사회적 통합의 방향으로 관용과 포용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딱히 관념적인 이야기는 아니고, 흑백 갈등이 인권운동으로 크게 폭발한 미국에서는 그 후 다인종의 동등한 포용이 기본 규범이 되었다(비록 오랜 차별의 잔재, 그리고 인종문제가 계급문제와 결합한 양상들은 상당히 남았을지라도). 유태인, 동성애자, 로마니 등에 대한 학살이 자행된 어두운 과거를 극복하며, 독일 사회에서는 나치즘 같은 극우민족주의에 대한 규제에 큰 신경을 쓴다. 위험한 갈등을 관리하여 성원들을 보듬는 것은 더불어 사는 인간집단, 즉 사회를 지속시키기 위한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소위 ‘이념’으로 큰 사단을 겪어온 사회 치고는 이념의 꼬리표를 붙여가며 상대를 해코지하는 것에 여전히 무척 무심하다. ‘반동분자’와 ‘빨갱이’로 딱지 붙여 자행된 상호 파괴의 역사를 지니고도, ‘반공’의 기치를 걸고 온갖 권력형 폭력과 인권침해가 자행되었음에도, 이념 꼬리표에 의한 차별은 여전히 실질적으로는 물론이고 규범적으로조차 금기시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북한이라는 깡패국가가 현존한다는 명목 하나만으로, 그런 이념꼬리표를 붙여 차별하는 것이 그저 계속 자행되었다. 이념의 스펙트럼을 받아들여 통합하는 사회가 아니라 외부의 적에 억지로 대입시키며 특정 부류를 그저 솎아내는 사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곤란한 상태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적의 역할을 맡고 있는 북한과 통일되어 합쳐진다고 한들 저절로 바뀌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사회를 이루어 더불어 살기도 바쁜데 그 안에서 실속 없는 구분으로 상대를 배제하고 심지어 학살해온 역사를 뼈아프게 성찰하는 것이다. 지금 와서 보자면 왜 그러는지도 모를 이유를 붙여가며 그저 상대 그룹을 증오하고 지배하고 학살하는 모습을 되새기고, 그리고 그런 것을 자행한 것이 대단히 신기한 괴물들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돌아보는 것 말이다.

[지슬](김금숙 만화 / 오멸 원작 / 서해문집)은 한국현대사 최악의 이념 핑계 학살극인 제주 4.3 사건을 다루는 만화다. ‘끝나지 않은 세월 2’라는 부제를 달고 각종 독립영화제를 휩쓴 동명 영화를 만화로 옮긴 작품으로, 온전히 흑백 수채화 기법만으로 그려졌다. 이념을 핑계로 평범한 사람들이 미쳐서 평범한 사람들을 잡아 죽인 기억들을 회피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제주 4.3 사건을 무대로 그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바로 [지슬]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피난 소재 작품의 정석을 따르고 있다. 터전을 짓밟히고 피난 나오는 일군의 주민들이 있고, 그들을 추적하는 조직화된 세력이 있고, 도망치는 와중에서 주민들, 추적자들 등 여러 사람들의 사연이 드러난다. 단지 특정 지역에 있는 마을이기에 모두 남부군과 내통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억지를 붙여 주민들을 몰살하는 국가권력 앞에서, 마을 사람들은 함께 큰 동굴로 피신한다. 각자 소중한 사람들과 꾸는 꿈이 있고, 감자(제주어로, 지슬)를 나눠 먹으며 마을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반대측에서 공권력은 빈 마을에 눌러앉아 주민들을 색출하고자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죽이는 것에만 혈안이 된 이도 있지만,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명령이기에 따르는 이도 있다. 그런 기이한 일상의 상황 속에서 결국 사람이 잡히고 충돌이 일어나고 역사의 비극적 기록을 거스르지 않는 파국으로 이어진다.

비록 역사적 소재 자체가 무거운 작품이기는 하지만, [지슬]은 줄거리와 사건이 가장 중심적인 매력이 아니다. 그보다는 극한 상황에서도 나름의 일상을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평범한 이들의 묘사, 소중한 사람을 잃는 이들의 감정, 비인간적 명령 속에서 아무리 무의미해보여도 조금은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자 하는 작은 모습들 같은, 다양한 사람의 모습이 매력이다. 제목이기도 한 감자의 비유가 절묘하게 복합적인 것이, 감자처럼 대충 버려지지만 알아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사람이다. 또한 감자를 나눠먹으며 가족이든 마을 이웃이든 그저 대등한 인간이든 사람들의 공동체가 이어진다. 군인들이 불태운 마을, 불타버린 가족들의 와중에 구워진 감자지만 그 감자를 산 사람들은 먹으며 조금 더 살아갈 수 있다. 진짜 감자 또는 상징으로서의 감자를 매개로, 그렇게 함께 살아가고자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한 단면씩 드러난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4.3이라는 소재는 당연하게도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극중에 등장하는 다양한 폭력과 잔인한 죽음들을 너머, 작품의 기본 구성이 일종의 위령제와도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반복하여 등장하는 제사상의 시각적 모티브와 함께, 줄거리의 전개는 신위에서 음복까지 제사 과정을 나타내는 소챕터로 나누어진다. 해당 제의식에 상응하는 내용들이 펼쳐지기에, 마지막은 필연적으로 모든 죽음을 굽어보고 새로운 삶을 엿보다가 제사상과 묵념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에는 죽음을 외면하는 억지 희망이 없으며, 울분 자체에만 매몰되는 막막함도 없다. 지방을 날리며 죽은 이들을 위로하고 산 사람들의 세상에서 그 죽음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도록 여운을 남기는, 제사상의 이치 그대로다.

이런 이야기를 위해 수채화라는 형식을 취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흑백 수묵화가 동양적 풍경의 맛을 살린다는 식의 기계적 장점이 아니라, 수묵으로 묘사된 흐릿한 풍경들이 바로 어둡고 흐릿한 세상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는 쪽이다. 실제로 이야기의 태반이 어두운 동굴, 빼곡한 숲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이상으로, 야만과도 같은 사회상의 분위기가 배경으로 묻어난다. 다양한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세상 속에 묻어있다시피 해서, 흐릿한 풍경 속에서 사람을 발견하는 느낌이 작품이 전달하는 이야기와 은근히 조화가 좋다. 특히 한 대목에서 사람들이 뛰어가는 언덕의 모습이 죽은 사람의 모습이 되는 시각적 은유는 이런 감성의 백미다. 반면, 이런 일관된 시각적 분위기로는 아쉽게도 마을 주민들의 평범한 대화 속에서 원래 보여주고자 했을 해학적 감성만큼은 상대적으로 전달이 잘 되지 않는 편이다. 또한 개별 사건 진행의 완급 리듬감 역시 명쾌하게 강조하기 쉽지 않은 표현방식이기도 하다.

[지슬]은 제주 4.3사건에 대한 학습교과서가 아니다. 즉, 섬의 특수성 속에서 한국전쟁 후 남부군의 암약, 그것을 빌미로 한 경찰의 발포, 민중 봉기, 진압이라는 명목의 무차별 학살, 그리고 아직도 몇 집 건너 제삿날이 같다는 지속적 상처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아니다. 그저 그런 어두운 시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죽이고 죽었는가에 대한 단면일 따름이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고, 너무나 무의미한 배제며, 너무나 안타까운 희생들이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무엇인가 뒤늦은 직면이 필요한 오늘날이기에, 더욱 적절한 작품이다.

지슬
김금숙, 오멸 원작/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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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피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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