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슈퍼히어로들 – 젠틀맨 리그 : 비범한 신사 연맹 [기획회의 391호]

!@#… 숀코네리의 은퇴작(…) 영화만으로 기억하는 분들은, 이 책으로 설욕전을 하시길 권장.

 

문학의 슈퍼히어로들 – [젠틀맨 리그 : 비범한 신사 연맹]

김낙호(만화연구가)

각자의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초인적 능력자 주인공들을 하나의 작품에 함께 등장시켜서 활약하게 하는 것은 재미있다. 마치 저잣거리의 구경꾼들이 최강의 창과 최강의 방패의 승부를 기대하듯, 각각 매력적인 이야기를 이미 선보인 이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또다른 조화 또는 충돌이 너무나 기대되는 것이다. 그런 식의 이야기 협업은 멀게는 그리스 신화에서, 약간 덜 멀게는 괴도 루팡과 셜록 홈즈(캐릭터 권리 침해 관계상 ‘헐록 숌즈’)를 대결시킨 소설에서, 가깝게는 ‘어벤져스’부터 ‘저스티스 리그’까지 온갖 슈퍼히어로 만화 프랜차이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이런 협업이 가장 큰 재미를 발휘하는 것은 캐릭터의 친숙함과 그들이 함께 처하게 되는 상황과 부딪히게 되어 만드는 화학작용의 의외성에 있다. 동시에 그런 의외성이 단편적 자극이 아니라 기존 설정들이 절묘하게 재해석되고 조화되며 일관된 세계관을 만들어낼 때 더욱 그렇다. 일관성 있는 자연스러움이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면, 섞임 자체만 강조하는 수준 너머 아예 그런 주인공들과 각자의 이야기가 주던 재미의 본질을 되묻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젠틀맨 리그 : 비범한 신사 연맹] (앨런 무어, 케빈 오닐 / 시공사)는 바로 그런 경지에 상당히 가깝게 다가서는 작품이다.

1898년 영국, 캠피온 본드라는 비밀요원이 미나 머레이라는 여성을 조직에 스카웃한다, 그들은 대영제국을 위해 다양한 비범한 인재들을 모으는 작업에 나서는데, 여기에는 네모 선장, 앨런 쿼터메인, 지킬 박사, 홀리 그리핀 등이 섭외 대상이다. 이들은 반중력 장치를 입수하여 런던을 파괴하려는 푸만추 일파를 막아내고자 임무에 나선다. 이런 것은 지극히 평범한 모험활극의 줄거리 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브이 포 벤데타]로 사회의 작동과 개인의 역할에 대해 차갑게 직시하고, [왓치맨]으로 초인들의 역설을 이야기하고, [프롬 헬]에서 연쇄살인마 이야기를 통해 비틀린 욕망에 쌓인 현대사회의 탄생을 넌지시 논한 작가 앨런 무어는, 이런 얼개에 훨씬 흥미로운 내용을 가득 얹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극의 재미를 간직하면서 말이다.

곳곳에서 섭외한 주인공들이 모인 팀은 바로 “비범한 신사 연맹”으로, 명칭 자체부터 영국 빅토리아 시대답다. 즉 산업혁명 이후 도시화 사회의 명암이 명백해지고, 비틀린 욕망과 계급. 계층, 인종, 성별 갈등이 현대사회의 등장을 예고하고, 영국이 거대한 제국으로 세계화의 어떤 원시적인 속살을 보여주고,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상류층의 억압적 예절로 억누르며 버티던 시절 말이다. 요원으로 긁어모은 이들은 각양각색의 힘과 개성으로 가득한데도 그것을 “비범한” 정도의 정제된 수사로 포장하고, 여성이 있지만 당연히 “신사” 연맹으로 부르는 그런 모습이다.

이 팀을 바라보며, 독자들은 각자 자신들의 근현대 대중문학에 대한 지식만큼씩 사람들을 알아보게 된다. [드라큘라]에서 흡혈귀 백작의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은 강인하고 진취적인 아가씨가 바로 미나 머레이다(결혼 이전 성으로 되돌렸다는 설정이다). ‘인디애나 존스’의 직계 조상격인 보물 찾기 오지 탐험물 [솔로몬 왕의 광산] 연작의 과감한 모험가가 바로 앨런 쿼터메인이다. 네모 선장은 [해저 2만리]의 그 선장이고, 지킬 박사는 매우 공격적이고 괴력의 소유자인 하이드씨로 변신한다. 물론 홀리 그리핀은 옷을 벗으면 완전히 투명하다. 캠피온 본드가 007 제임스 본드의 오랜 전임자라는 것은 저 정도 설정이면 누구나 대충 추리하게 될 것이다.

이런 대중문학계의 히어로들이 한 팀으로 활약하는 런던은, 빅토리아 시대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과 스팀펑크(주: 빅토리아 시대에 사실은 온갖 초월적인 현대 기술이 존재했다는 상상력을, 증기와 목재, 태엽장치 중심의 미학적 요소로 표현하는 SF 장르)로 그려내는 것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추구한다. 연맹과 악의 조직들이 선보이는 강력한 장비들은 스팀펑크의 정서를 그려내는데, 사람들의 사회상은 결코 그냥 현대인들의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그저 백년 전 옷을 걸치고 있는 장소가 아니다. 지저분하고 거친 저자 거리와 위선적인 예의로 가득한 귀족층이 나뉘고, 미신과 유사과학의 신비주의가 과학적 회의와 부딪히는 전환기의 모습 그대로다.

이런 주인공들과 세계 안에서, 온갖 20세기 초 대중소설들의 소재들이 집요할 정도로 촘촘하고 정교하게 배치된다. 지나가는 대사 하나에도 거의 항상 고전 소설이나 당대 문화에 대한 참조가 들어있고, 뒷골목에 아무렇게나 붙어있는 포스터 하나조차 어떤 문학 작품과 연결되어 있다. 작가 소개 같은 작품 외적인 부분마저 당대 신문잡지들의 말투에 맞추어 펼쳐진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빅토리아 시대 문학 퍼즐 맞추기만으로도 대단한 재미를 얻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이 작품에는 수위 높은 성과 폭력 표현이 난무한다. 그림은 기괴해야할 순간에 망설이지 않고 기괴하고 거칠어진다. 하지만 단순한 선정성이 아니라, 당대 대중문학의 묘한 자극성을 한층 노골적으로 들이미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을 떠날 이유가 없다. 정교한 설정이 주는 흥미 이상으로, 이야기의 전개와 캐릭터들의 매력, 이들이 자아내는 인간관이 워낙 재미있기 때문이다. 초인들을 모아내고, 충돌하는 강한 개성으로 팀이 와해될 위기에 놓이고, 몇 가지 희생을 딛고 결국 힘을 모아 적을 이겨내는 흔한 기본 구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별로 멋진 구석이 없는 구차하고 비정한 사회상에 대해 건조한 냉소를 충분히 보내주고, 어떤 정의감보다는 개인적 욕망으로 움직이는 각 초인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부족함 때문에 더욱 사람들은 계속 지켜볼 가치가 있다.

타인에게 잔인하게 대하고 또 이용해먹는 것도 사람이지만, 의외의 순간에 존엄을 추구하고 타인에 대한 예의를 다하는 것도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 런던이라는 대도시고, 그런 사람들로 이뤄진 것이 비범한 신사 연맹이다. 여러 이야기들이 은근히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거대한 파괴 음모가 드러나고, 부족한 사람들의 연맹이 부족한 사람들의 런던을 구하고자 나선다. 활극의 화려함에만 집중한 나머지 사람들의 사회라는 핵심 재미를 전혀 담아내지 않았던 헐리우드 영화판의 미진함과 결정적 차이다.

젠틀맨 리그 : 비범한 신사 연맹 1
앨런 무어 지음, 이수현 옮김, 케빈 오닐 그림/시공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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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송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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