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대해 성찰한다는 것: 엘포의 유토피아 기행 [기획회의 401호]

!@#… 400호 기념호에 하필 송구스런 원고 펑크를 낸 후 재개.

 

사회에 대해 성찰한다는 것: [엘포의 유토피아 기행]

김낙호(만화연구가)

‘성찰’이라는 용어는 그 거대하고 무거운 철학적 느낌과 달리, 실제로 적용을 하자면 지극히 소박한 과제를 표현하는 것이다. 당장 달리기에만 매진하기에도 바쁘다고 느끼곤 하는 우리들의 사회적 삶에 대해서, 애초에 왜 달리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자 했던 것인지, 그래서 지금 달리고 있는 방식이 원래의 취지에 부합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다. 당연하게도, 돌아보며 살피는 것은 지금의 달리기에 대한 방해요인이 아니라 더 잘 달리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최선을 다해서 엉뚱한 낭떠러지를 향하고 있는지, 무의미하게 몸만 축나고 있으니 달리는 방법을 수정해야하는 것 아닌지, 확인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성찰을 위한 좋은 잣대, 즉 어디로 가고자 했던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유토피아다. 몽상에 빠져들어 현실도피를 하거나 현실과의 괴리에 치를 떨며 패배감에 빠지는 것이야 곤란하지만, 정말로 모든 것이 잘 이뤄졌을 때 원하는 사회의 상태는 과연 무엇인가. 나아가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이상향의 모습 자체도 성찰의 대상이다. 사람들의 꿈과 희망은 당연하게도 당대 현실에서 제한된 인식범위 안에서 펼쳐지는 것이기에, 사회가 이루고자 하는 어떤 행복의 방식에 대한 질문을 필요로 한다. 다양한 방식의 지향점 안에 당대의 꿈이 있고, 세계관의 정수가 있다.

이런 지점들을 고려하며 성찰의 씨앗을 뿌리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시대와 문화에서 제시되었던 다양한 유토피아를 뽑아내어 맥락과 내역을 설명하고, 서로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게 해준다면 성찰의 과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책이 [엘포의 유토피아 기행](엘포 / 서해문집)이다. 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사람들이 상상한 유토피아의 모습을 역사순으로 각각 설명하는 전개다. 당연하게도 첫 유토피아는 기독교 성서의 낙원인 에덴동산이고, 그 후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리베르탈리아, 히피공동체까지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각 유토피아를 이어주는 과정으로, 환상의 나라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오지를 찾아가는 전형적인 19세기 유럽 모험가의 모습을 한 남자와 그의 조수가 끝없는 여행을 하는 모습이다. 그들이 사막을 넘고 산과 물을 건너 우주적 공간까지 넘어가는 사이에, 하나씩 유토피아가 소개된다. 인류가 걸어온 굴곡진 역사 속에서, 이렇듯 새로운 모습의 유토피아들이 각양각색으로 축적되어온 것이다.

첫 번째 유토피아인 에덴동산은 자연의 순리로 살아가고 그 외의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즉 옳음과 그름 같은 사회적 가치를 판단해야할 책임이 요구되지 않고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곳, 오히려 선악을 판단하는 순간 추방되어버리는 곳이다.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과제인 선악 가치 판단이 존재하지 않는 곳, 다시 말해 그만큼 완벽하게 게을러도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상태에 대한 동경이다. 하지만 에덴동산이든 가나안이든 코카인 나라든, 초창기의 많은 유토피아들이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바로 물질적 편의와 풍요다. 맛있는 먹을 것이 넘치고, 젊음은 영원하고, 아름다움이 넘친다. 모두에게 풍요가 넘쳐서, 갈등은 아예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점차 인류 역사가 전개되면서, 유토피아들은 풍요보다는 사회적 관계에 집중하게 되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섬이든, 텔렘 수도원이든, 리베르탈리아든, 지배계급과 평민당대의 위계적 신분제 사회가 아닌 무계급 평등 사회를 그려내고 있다. 모두에게 무한한 풍요가 주어지면 다가올 행복이라는 순박한 몽상은 계급이라는 공고한 벽 앞에서 좌절되었던 것이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생산력이 증대되어 풍요가 꽤 진전되고 여하튼 절대왕정과 노예제도 같은 극단적인 위계는 조금 누그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난해해지는 사회 모순들을 발견했다. 그러자 욕심과 수탈로 이뤄지는 관계를 깨고,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목표가 부각되어, 공평한 공동체를 꿈꾸었다. 18세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미국 아미시 공동체처럼 종교적 도덕률로 그 이상을 추구할 수도 있다. 수탈의 확장을 막는 방법으로 현대적 기계화를 거부하고 농업과 수공업을 고집하며, 평화와 겸손과 전통적 가족에 의한 번식을 강조한다.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신봉자들이 브라질에서 만든 체칠리아 공동체는 공동재산과 자유연애로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을 극복하고자 했다. 1960년대 미국의 히피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벌어진 ‘사랑의 여름’을 통해서 새로운 영성과 평화로운 박애로 엮어진 무소유 군락 공동체를 지향했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흐름 위에, 전화망의 작동원리를 역이용하여 거대자본 통신사들을 골탕 먹인 공짜 전화를 발명한 캡틴 크런치의 해킹 활동에 대한 당대 젊은이들의 지지마저도 하나의 유토피아로 상정한다. 잘못된 수탈의 길에서 벗어난 행복한 인류사회라는 테마를 공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엘포 작가는 역사상의 여러 유토피아 몽상에 분명하게 애정을 표하고 있다. 내용과 맥락을 최대한 명쾌하게 독자들에게 설명해주기 위해 고대 벽화 양식부터 중세 필사본, 미국 6-70년대 반문화의 상징인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로버트 크럼의 그림체까지 동원한다. 무엇보다 그들의 몽상을 일방적인 감정으로 지지하기 보다는, 각 유토피아를 실제로 그것을 추구했던 움직임은 어떤 한계를 보였는지도 양면을 함께 다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실리아 공동체는 자유연애의 급진성 때문에 해체되었고, 파리 코뮌은 외부와의 무력충돌에 무너졌고, 사랑의 여름은 사회체로서의 구체성이 없기에 한 여름 밤의 꿈으로 끝났다.

독자들이 여러 유토피아의 모습을 살펴보는 동안 열심히 여행을 한 모험가와 조수는, 결국 책의 말미에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의 문 앞에 도착한다. 문틈으로 보이는 도시의 안에는, 지금껏 돌아본 온갖 유토피아들의 이름이 온갖 휘황찬란한 건물들에 입간판으로 달려있다. 마침내 각 시대 모든 인간들이 꿈꾸던 이상향의 총합, 궁극의 유토피아에 도달한 것인가. 하지만 그 앞에 문지기가 가로막으며 “너희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 자들인가? 무엇을 가져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모험가는 나름의 대답을 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다시 “너희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 자들인가? 무엇을 가져왔는가?”라고 묻는다. 다시 대답한다. 다시 묻는다. 반복된다.

눈 앞에 도착점이 보이지만 결코 완전히 도달하는 일 없이, 그 길에 있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실천하고 있는지 끝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어가며 바로 그 문턱에서 지금의 방향을 곱씹는다. 유토피아를 소재로 결국 지금 이곳의 사회를 성찰하자는 이런 제안을 더 많은 이들이 받아들이면, 유토피아는 아니라도 조금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듯하다.

엘포의 유토피아 기행
엘포 지음, 우현주 옮김/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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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전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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