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들, 당연하지 않은 현실: 빨간 약 [기획회의 399호]

!@#… 생각해보니 애당초 김홍모 작가의 블로그명이었…

 

익숙한 것들, 당연하지 않은 현실 – [빨간 약]

김낙호(만화연구가)

익숙하면, 너무도 쉽게 당연해진다. 피곤한 것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해서 가급적이면 분류를 끝내서 결론을 내리고 굳이 계속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계속 접해서 익숙하다고 여기게 되면, 그냥 그것이 현실이겠거니 당연시하고 넘어가기에 매우 적합하다. 하지만 정말로 당연한 것은, 어떤 사회적 사안에 대한 지식이나 판단이 “하도 흔해서 나에게도 익숙함”은 “당연히 그래야만 함”과 전혀 다른 척도라는 것이다. 데모를 보면서 거의 반자동적으로 “시위꾼들이 그저 떼를 쓴다”는 판단을 하는 것은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과연 그런 판단이 당연한 것인가 되묻는다면, 정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사안을 더 깊게 들여다봐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정과 별개로 시위를 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알릴 권리는 원래 보장되어 있다” 정도가 된다.

[빨간 약](권용득, 김수박, 김홍모, 마영신, 김성희, 한수자 / 보리)은 참여 작가들이 각자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무언가 귀찮은 것, 불편한 것으로 흔히 결론내리는 것에 어렴풋이 익숙해져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정말 그런지 살펴보는 작품집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온갖 억울해하는 사람들의 시위 보도에 등장하는 이름이고, 시끄러운 시위를 장기화시켜서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고 대충 손을 터는 결과를 가로막는 “외부세력”의 대표격이다. 교육개혁을 하겠다고 야심찬 발표만 내놓으면 반대하는 빨갱이 운동권 집단, 전국교직원노동조합도 있다. 이왕 빨갱이 이야기 나온 김에, 통일운동가와 아예 남파 간첩도 등장한다. 불온함으로 치자면, 제18대 대통령선거 의혹을 다루는 작품도 있다. 그런데 패륜적 사고가 넘치는 ‘일베’ 공간에 대해, 극우의 구렁텅이로 묘사하지 않으려는 접근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다양한 소재를 묶는 구심점은 바로 어렴풋이 익숙한 것에 대해서, 그런데 다들 좀 더 자세히 생각해봐야할 만큼 우리 사회의 공공성 문제와 곧바로 맞닿아있는 어떤 내용들에 대해서, 좀 더 차분하게 배경을 알아보자는 것이다. 책의 서문에 이미 풀어놓았듯, 책에 담긴 소재들은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알 사람들은 별로 없고, 어렴풋이 익숙해하는 사람들은 넘친다. 하지만 익숙함에 매몰되어, 정작 현실의 문제에 저항하는 이들을 묻어버리거나, 문제의 증상을 원인으로 포장하여 곁다리만 긁고자 하거나, 불온한 사상에 대하여 실제 피해위험이 아니라 과장된 금기로 닫아버리거나 하는 자연스러운 회피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릇된 익숙함이란, 어떤 거대한 권력이 만든 결과는 아닐 것이다. 다만 좀 더 권력이 있는 이들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입각하여, 권력이 덜 있는 이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신경을 끄면서, 또 어떤 이들은 정말로 여력이 없거나 합리성의 방향이 바뀌면서, 그리고 모두가 서로에게 이것 이상으로는 알아둘 필요가 없다고 압박을 주면서 이뤄졌을 개연성이 더 높다. 그 길 위에 서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과장된 단순함의 선악 세상 인식 속에서 그저 기계적으로 몇 가지 고유명사만 대입한 피상적인 ‘시사 상식’이다.

그 함정에서 벗어날 길은 조금 더 편견을 털고, 조금 더 건조하게 원래의 안건과 시발점, 전개 과정의 맥락,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결국 우리들의 사회적 삶에 어떤 식으로 결부되어 있는지를 정리해주는 하나의 시각이다. 그런 작업을 해주는 것은 뉴스미디어의 전유물이 아니고, 학술서적이 해줄 수 있는 역할에도 한계가 있고, 시대적 공분을 녹여내는 픽션 서사물과도 또 다른 부분이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의 중첩영역, 중간 어딘가에 가까워서, 시사적이되 너무 유통기한이 짧지 않아야 하며, 대중적 접근성도 있고, 그럼에도 충분히 사실관계에 건조해야 한다. 그렇기에 사회적 사안에 관심이 있는 작가들이, 배워나가면서, 다큐 양식의 논픽션 만화를 만드는 방식이 하나의 좋은 접근이 되어준다. 지난 수년간 꾸준히 축적되어온 르포만화 장르에 자주 오르내리며 역량이 무르익은 작가, 새로 주목받는 작가가 적절히 배합된 것도 장점이다.

그렇듯, [빨간 약]의 작품들은 주장의 강도 이상으로 공부와 취재의 흔적이 역력하다. 다루는 주체나 현상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근현대사의 여러 맥락을 통시적으로 훑어주는 것은 대체로 기본이고, 자료 조사와 취재를 통해서 생생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에 인색하지 않다. 장기복역 후 출소한 나이든 남파간첩과 나누는 대화든, 일베에 직접 뛰어들어 경험해본 그 곳의 격렬하고도 단순한 주목 끌기 방식이든 마찬가지다. 사실 책에 담긴 주제들이 사회현실의 전체를 체계적으로 지도화한 것이라기보다는, 각 작가의 관심사가 만들어낸 모자이크에 가깝다. 하지만 차분한 접근 속에서 건져 올리는 어떤 가치들은, 충분히 선명한 상을 만들어낸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계기로 약자의 싸움에 힘을 보태주는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고, 전교조의 배경을 계기로 개성의 존중과 평등함을 위한 노력을 생각한다. 일베는 더욱 퍼질 수 있는 ‘현상’임을 서늘하게 돌아보며, 통일운동이라는 평범하고 소박한 목표마저도 강제된 틀 바깥에서는 결코 쉬울 수 없음을 본다. 거창한 병기가 아니라 다른 사상에 충실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간첩도 있는 것이며, 세간의 선거부정론에는 해볼 만한 질문과 부풀려진 음모가 고르게 섞여 있다. 다시 말해, 세상은 보기보다 선명하지 않고,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옳은 방향을 찾고자 노력하는 이들은 있고, 함께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그런 현실에 대한 인식부터 시작한다.

책에 담긴 모든 내용에 동의할 필요는 물론 없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저항적 접근은, 개발 전반에 대한 무조건적 중단으로 빠지기 쉽기에 모든 사안에 적합한건 아니다. 전교조의 방향이 교조가 되어버리면, 학력의 측정 일체를 부정한다든지 민족교육 같은 내용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것을 너무 쉽게 내밀게 된다. 사실여부와 무관하게 스스로를 핍박받는 소수라 자처하는 자들의 일베 공간을 소수를 용납하지 않는 한국적 몰아가기로 보는 것은 특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접근이다. 남파간첩 비전향 장기수의 북한에 대한 사회관은, 자신이 힘들게 지켜온 소박한 민족주의 신념에 입각하여 과도한 낙관으로 점철되어 있다. 무조건 옳은 것은 원래 없고, 적절한 회의주의는 당연한 의무다.

하지만 그럼에도, 빨간 약이 필요할 때가 있다. 불편한 진실을 각성시키는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 약이든, 상처 부분에 바르면 따갑지만 치유를 돕는 빨간 약이든, 그저 ‘빨갱이’라는 낙인으로 배제하고 은폐한 사회적 이견에 대한 직면이든 마찬가지다. 익숙함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가 사는 현실을 되돌아보기 위한 자극으로 말이다.

빨간약
권용득 외 지음/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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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엘포의 유토피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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