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의 기원과 진화 [플랫폼 0905]

!@#… 인천문화재단의 격월간 문화저널 ‘플랫폼‘ 2009년 5/6월호 한국만화 100주년 특집 코너의 한 꼭지용 원고. 기본적으로는 2003년에 월간미술에 썼던 글의 큰 줄거리 위에 좀 이후 상황들 업데이트. 실제 게재본은 개인적으로는 무척 싫어하는 ‘별 이유도 없이 용어 뒤에 괄호넣고 영어 표기 덧붙여주기’ 같은 편집기법이 들어가서 좀 민망한 구석이 있음.

 

한국만화의 기원과 진화

김낙호(만화연구가)

한국만화의 역사는, 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린 이도영의 한칸 카툰을 그 시작으로 볼 때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한다. 세부 역사를 짧은 글에서 소화하는 것은 무리인 만큼, 큰 흐름과 그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 성향들을 몇가지 훑어보도록 하겠다.

한국만화의 여명기와 전후의 짧은 황금기

한국에서 현대 만화는 개화기 및 일제점령기 당시에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인 서구 저널리즘의 풍자만화 기법들을 따르며 탄생했다. 현대의 신문 만평과 그리 다르지 않은 이도영의 한 칸 풍자만화, 세태를 묘사하는 글과 풍자적 삽화가 합쳐진 안석주의 ‘만문만화’ 등은 영국과 미국 대중신문의 만화양식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 한 줄로 연속된 여러 칸으로 이루어진 짧은 에피소드인 코믹스트립 형식을 한국에 도입한 ‘멍텅구리’ 역시 현재의 한국 신문 4칸만화 같이 시사성을 강조하기보다는, 미국의 경우처럼 슬랩스틱 코미디 상황극에 가까웠던 것이 특징이다.

해방직후 한국어 출판물에 대한 억눌렸던 수요가 폭발하면서 만화 역시 부흥하게 되었다. 일제시대 동안 축적된 시사만화의 기반이 1948년 창간된 ‘만화행진’ 같은 만화전문 잡지로 나타나고, 싼 가격으로 펄프적 대중오락 수요를 채워주는 떼기만화 판형들이 좌판에서 인기를 끌었다. ‘헨델박사’ 등의 히트작을 낳은 떼기만화는 SF, 판타지, 모험물 등이 많았고 그림체 등에서 미국의 극화체 모험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와 동시에 200여 페이지 양장본 판형의 책으로 ‘눈물의 수평선’ 등의 작품들이 출간되어 50년대에는 고급단행본, 보급형 오락물, 시사만화잡지 등 다양한 층위로 만화의 기반이 갖추어졌다.

대본소와 장르폭발, 사회적 암흑기와 오락성

경제사정이 풀려서 출판시장의 사정이 밝아지지는 않아서 양장판형 등은 사라져갔지만 만화에 대한 수요는 증가했기에, 58년에는 만화책을 빌려보는 방식인 대본소가 도입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간 쌓아올린 내적 동력, ‘망가의 신’ 데즈카 오사무의 활약을 계기로 한층 새로운 활력으로 발전하고 있는 일본만화의 영향, 미국 골든에이지 슈퍼히어로 만화의 영향 등이 혼합되면서 다양한 이야기만화 장르들이 본격화되었다. 산호의 ‘라이파이’ 등 슈퍼히어로물, 박기당의 사극, 엄희자의 순정물, 박기정의 ‘도전자’ 등 스포츠물, 임창의 ‘땡이’ 시리즈 등 명랑모험물 등 각종 장르들이 형태를 잡았다.

하지만 60년대에 들어서며 정부에 의한 사전심의가 도입되고 대본소 시스템이 독점화되자 대본소 만화는 장르적 다양성의 활력보다는 공장제의 기계적 물량 맞추기의 나락에 빠졌고 창작자들의 세대단절이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 신문과 잡지가 70년대 들어서 다시 서서히 기지개를 펴며 만화의 공간 역시 만들어졌다. 72년 일간스포츠 창간과 함께 고우영의 ‘임꺽정’을 필두로 신문 연재 장편 성인 극화라는 독특한 형식이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새소년 등 청소년 교양잡지를 통해서 명랑만화가 꽃피었다. 성인극화의 경우 정권 세력에 의한 자의적 가위질을 피하면서도 대중들에게 시대적 재미를 선사하는 독특한 우회적 기법들을 이야기 속에 녹여내었고, 명랑만화는 명랑 슬랩스틱의 형식 속에 큰 스케일의 모험담과 다양한 장르들을 소화해냈다. 이외에도 클로버문고 등의 도서 시리즈가 다시금 만화 분야에서 소장용 단행본, 그것도 세트로 구비하는 것에 대한 문화를 성공적으로 도입했다. 비록 엄숙하고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라는 사회적 상황이었으나, 한국 만화는 꾸준히 지평을 넓혀온 셈이다.

80년대의 만화 붐

80년대는 비단 만화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이 급격하게 발전한 시기다. 군부 독재의 기조는 이어가되 대중오락문화에 대한 압박은 좀 더 느슨하게 풀어준 전두환 정권 하에, 그간 발전한 만화의 장르적 완성도와 매체 플랫폼은 더욱 진일보했다. 대본소 시스템이 독점체제의 마수에서 좀 더 자유로워졌고, 만화가 실리는 잡지들의 시장이 더욱 확대되었으며, 스포츠신문들의 만화지면이 늘어났다. 나아가 일각에서는 민중문화론의 부흥 속에 저항적 만화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성공에 대한 각종 욕망이 들끓고 사회적 그늘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한국 만화는 새로운 성장을 했다. 대본소에서는 한국사회에서의 성장과 좌절을 그려내는 비정한 극화들이 때로는 스포츠물(예: ‘공포의 외인구단’), 때로는 무협사극(예: ‘추공’ 연작), 때로는 기업극화(예: ‘신의 아들’) 등의 모습으로 큰 히트를 쳤다. 잡지계에서는 기존의 소년소녀 교양잡지 간의 경쟁 강화는 물론 만화전문잡지 월간 보물섬 창간 등으로 만화지면이 크게 늘어, 성인극화 위주로 재편되어 점점 성인들의 공간으로 변모하던 대본소와 달리 주류 청소년 만화의 안정적 공간이 되어주었다. 당대의 대중문화 트렌드를 반영하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양산되었다. 스포츠신문 역시 대본소 만화의 ‘쌓아놓고 읽는’ 방식과는 달리 하루하루 연재를 읽는 재미를 극대화하는 여러 작품들을 경쟁적으로 유치했다.

그리고 80년대의 말엽에 이르러 그 붐은 최고의 꽃을 피웠다. 87년 창간된 잡지 ‘만화광장’은 대본소 성인극화 진영의 이야기성에 민중문화 진영의 사회비판적 코드가 섞이면서 높은 작품성과 대중적 호소력을 겸비했다. 이와 함께 88년 순정만화 전문지 르네상스와 소년만화 전문지 ‘아이큐점프’의 창간으로, 세분화된 독자층을 상정하는 만화잡지 시장이 만들어졌다. 비록 여전히 정부의 심의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지만, 80년대 말엽은 여러 측면에서 한국만화의 다양성과 대중적 호응이 확실하게 갖추어진 시기였다.

급성장과 급전환

한국의 만화 환경에서 90년대는 일본만화의 개방과 함께 시작했다. 일본만화는 실제로 해방 후 내내 한국만화에 큰 영향을 끼쳐왔지만, 정식으로 개방되어 일본만화 그 자체로서 들어오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볼’을 필두로 도작이나 국적세탁을 거치지 않은 일본만화로서의 일본만화가 독자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이런 개방은 한국 만화에 있어서 새로운 도전이 되어주었다. 한쪽으로는 일본의 소년점프 잡지 등에서 그간 발전시킨 장르 코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대형 히트를 기록하는 한국만화 작품들이 탄생했고, 독자 규모 확대와 단행본 판매 등으로 만화시장은 산업적으로 급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정작 산업적 성공 공식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장르적으로는 오히려 다양성을 잃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90년대 중반부터 인디/언더로 대표되는 대안만화씬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주류가 된 웹만화

2000년대에는 출판 시장의 급속한 침체와 초고속 인터넷의 보편화 등의 조건에 힘입어, 웹만화가 중심 화두로 떠올랐다. 기존 페이지 만화를 웹에서 구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점차 웹 특유의 문법을 실험하게 되었는데, 일기체의 에피소드식 일상 만화와 스포츠신문 연재작 중심의 개그물이 먼저 두각을 나타내어 ‘웹툰’의 고정이미지를 선점했다. 특히 감상적 단상을 파스텔톤 색조의 부드러운 그림에 담아내는 소위 에세이툰 장르가 웹 연재뿐만 아니라 단행본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2003년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된 강풀의 ‘순정만화’의 히트를 필두로, 각 회를 세로스크롤 방식으로 연출하는 장편 연재만화 스타일 역시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으며 현재는 가벼운 연애물부터 스릴러까지 다양한 내용을 소화하는 명실상부한 주류 장르가 되었다.

간단히 살펴보았듯, 한국만화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역동적으로 다양한 외부 영향을 받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특유의 사회적 현실과 매체 조건에 적응해나가며 특유의 형식과 장르들을 탄생시켜왔다. 급격한 변화 속에 작가와 작품의 흐름이 단절되고 중요한 가능성들이 제대로 발전되지 못한 경우도 여러 번 있지만, 반면 매번 역동적으로 새로운 판을 만들어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변화가 기다릴지라도, 그런 역동성의 기조만큼은 계속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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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 이왕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만화 100주년 기념전시도 있고 해서 한국만화사 정리 자료가 종종 여기저기 출몰하고 있는 김에, 한국 예술사의 정사라고 불릴 수 있는 ‘한국예술사대계’에 포함된 만화사 링크 모음.

한국예술사대계 한국만화사 60년대 편
한국예술사대계 한국만화사 70년대 편
한국예술사대계 한국만화사 80년대 편
한국예술사대계 한국만화사 90년대 편
(… 2000년대편하고 50년대편 쓰고 기타 몇 가지 흥미로운 미시사 추가해서 단행본 작업을 하자고 다짐한 모씨와 모씨, 각각의 사정으로 시작도 못하고 있다는 속사정이;;;)

PS2. 엄밀한 의미의 역사서와는 거리가 멀지만, 90년대 이후와 2000년대초의 한국만화판의 유래와 모습들을 다각적으로 조명한 흥미로운 꼭지들이 빼곡한 나름 독보적인 책(핫핫) ‘만화세계정복'(두고보자 편집부, 2003)의 무료 PDF판.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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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한국만화의 기원과 진화 [플랫폼 0905]

Comments


  1. 지적하신 90년대의 장르의 축소에 공감. 아이큐점프를 쭉 훑어본 결과 확실히 없어진 장르는 명랑만화와 청춘만화(이건 뭐 임의로 붙인 말이지만 청소년, 청년 주인공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일상에 촛점을 맞춘 성장기라고나 할까…도식화된 학원액션이나 러브코메디가 개입되지 않은 상태의), 이런 수요층이 원하던 것이 닥터 슬럼프 느낌의 캐릭터풍 개그 및 학원물로 전환된 것 같고, 간간히 보이던 하드 SF(대략 [아키라]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는 아예 모습을 감추었지요. 일본 만화 시장개방이 분명 좋게 말하면 한국 만화가들에게 도전이긴 했는데, 한편으론 이제야 막 블록버스터 영화란 걸 만들기 시작한 영화산업에 몇십배의 역사와 노하우와 자금력을 갖춘 할리우드 최첨단 인기작들을 제한 없이 마구 쏟아낸 느낌의 불평등 시장경쟁이가도 했고. 뭐 마구 들여온 건 정작 출판사 쪽이고, 한편으로는 일본만화의 인기라는 시대적 흐름에 편승한 것 뿐이라고 할 수도 있는 복합적인 상황이니 뭐 때문에 한국만화가 망했(…)니 하는 식의 책임론은 그다지 의미가 없지만요; (아직까지 인기 있는 담론이지만…)
    …그나저나 미시사 단행본을 내셨으면 엄청나게 도움이 됐을텐데! 흑흑;

  2. 좋은 글입니다… 각 시대별 정부의 대처자세는 빼셨다는 점에서, 또 다른 컨텐트를 기대해볼 수 있겠네요.

  3. !@#… 시바우치님/ 뭐, 되는(것 처럼 보이는) 쪽 하나에 닥치고 몰리는 경향은 전세계 공통이자 특히 한국이 무모하게 강력하죠. 특히 투자도 연구도 그만큼 안하면서 비슷하게 외형상 따라잡았을 때 미친듯이 기뻐하죠.

    nomodem님/ 지면이 짧다보니 어쩔 수 없죠. 저는 이왕 역사서술이라면 작가작품 나열하고 거기에 적당한 수사 붙이는 방식보다는 이런 식으로 맥락과 흐름을 풀어내는 방식을 선호하는데, 덕분에 항상 분량의 애로사항이;;; 여튼 정책쪽으로도 이런 원고를 쓸 기회가 오면 재밌겠다 싶긴 합니다. 그 전까지는 예술사대계에 조각조각 들어있는 것으로 만족하셔야… :-)

  4. 80년대 추억의 물품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 같아 쪽지 드립니다.
    현재 80년대 중후반 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유행했던 보드게임 중
    이번에 ‘악령도’ 라는 게임을 복원하고있습니다. 복원 프로젝트 1, 요괴의성 탈출게임, 2. 런던대추적
    의 성공적 복원에 이은 세번째 프로젝트 입니다.
    뜻있는 회원들로 부터 십시일반 돈을 모아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고
    거의 완성 단계까지 와있습니다. 겨울이 오기전 완성될 듯.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하시는 분은 성함과 원하시는 문구를
    넣어드립니다. 기본 세개 드리니 서프라이징 선물로도 좋습니다^^
    제때 참여하시어 같이 소중한 추억의 물품을 완성시켜 손에 넣는
    짜릿한 감동을 맛보시는데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다음까페 졸리메니아 입니다.

    cafe.daum.net/jollyma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