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피프린스 간지 사장의 펜트하우스로 유명한(-_-;) 서울애니센터에서 최근 발간하고 있는 웹진 ‘Image’ 창간호에 실린 글(원문 클릭. 연결된 다른 글들과 같이 보면 더 좋다). 제작자 미르*님에게 안그래도 팍팍한 인간이 쓴 팍팍하고 긴 글이니 가급적이면 이런 저런 이미지를 좀 깔아주십사 부탁을 드렸으나(라고 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도판을 넘기지 않았다), 결국 여차저차 팍팍 itself로 나갔다. 여튼 제한된 분량에서 너무 이야기가 많아서, 세부 데이터보다 전체 판도 개요에 집중. 한 2년 쯤 전에 정책 보고서의 일부로 넣었더라면 훨씬 더 도움이 되었을 법한 내용의 글인데… 뭐 지금이라도 그리 늦은 건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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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의 해외 진출 둘러보기: 미국, 일본, 유럽에 발표된 한국만화의 반응
– 김낙호 (만화 연구가)
1. 들어가는 글
이렇게 한국만화의 해외진출 상황에 대한 공식적인 글을 쓰게 되다니,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일이다. 사실 한국은 1960년대 이래 ‘수출 지상주의’를 표방해 왔지만, 문화산업 분야에서만큼은 해외진출이 늦게 시작된 편이다. 질서정연함만을 강조하던 군사문화적 획일성으로 문화산업의 근간인 대중문화를 삐딱하게 보던 1960∼70년대야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유화하기 위해 시작된 5공의 우민화정책이라는 호재(?)를 만나서 대중문화가 급격하게 부흥하게 된 1980년대, 그리고 정치적 민주화가 대중문화의 풍성함을 앞당겨준 1990년대에도 한국의 대중문화는 여전히 국내용이었다. 90년대 말쯤 되어서야 비로소 해외진출 사례가 하나씩 눈에 띄기 시작했고 ‘한류’라는 표현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지금은 다시금 분위기가 가라앉았지만, 어쨌든 그런 숨 가쁠 정도의 변화가 고작해야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까지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중문화 상품 수출에 대한 의지가 있었을지언정 경험도 지식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특히 한국만화의 경우에는 최근 수년간 시장침체가 계속되고 있고,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해외 수출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단순히 계약 몇 건에 얼마 벌었다는 식의 이야기보다는 한국만화가 과연 제대로 해외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지, 문화적 영향력을 얻고 있는지 등에 대한 폭넓은 점검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만화는 과연 전 세계에 뻗어나가고 있는가? 아니, 애초에 그럴 필요가 과연 있는가? 뻗어나갔다면 어디의 누가 읽는다는 것인가? 해외진출을 함으로 해서 정말로 돈이 들어오고 작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있는가? 더 나아가 과연 어디까지가 ‘한국’ 만화인가? 이런 것들을 점검해보지 않고서 한국만화의 해외진출을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알맹이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글에서는 한국만화의 세계 진출을 점검하는 데 있어 몇 가지 주제에 집중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우선, 만화가 대중문화 산업으로서 비교적 큰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3대 권역(일본, 유럽, 북미)을 논의의 범위로 한정하겠다. 남미도 물론 끼노나 브레시아같은 훌륭한 만화가들이 간혹 나타나는 곳이지만, 대중문화 산업으로서의 만화는 미미하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고 넘어가겠다. 떠오르는 거대시장이자 저임금 인력의 천국으로 알려진 중국의 경우, 해적판이 창궐을 하는 관계로 의미 있는 해외진출을 정색하고 얘기하기 이르다고 생각하여 일단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하고 다음을 기약하겠다. 또한 한국만화의 해외진출 사례와 방식들을 살펴보기는 하지만, 굳이 그 진출의 ‘역사’를 논하지는 않겠다. 누가 어떤 작품이 최초로 해외에서 출판되었다든지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소재이기는 하지만, 이 지면에서는 그보다는 해당 권역의 만화시장 판에 한국만화가 어떻게 파고들었는지, 그리고 그 시도는 성공했는지 여부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따라서 외국에 진출한 모든 작품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유의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작품만이 진출하는 방식과 창작인력이 진출하는 방식을 각각 나누지만 두 경우 모두 한국만화라는 범주로 포함시켜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국국적의 만화가가 해외에서 그렸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한국’의 것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창작인력들이 보다 자신들에게 적합한 작업환경을 찾아서 활동한다는데 한국 만화계 입장에서 그런 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즉 작품으로서 ‘한국만화’는 아닐지 몰라도, 큰 틀에서 ‘한국만화 판의 해외진출’이라고는 할 수 있을 테니 포함시킨다는 뜻이다. 여하튼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2. 미국권의 경우
미국 만화계의 가장 오래되고 확고한 시스템은 ‘신문 연재’ 만화다. 1칸 카툰에서 4칸 띠 만화(코믹스트립)의 방식을 취하는데, 주로 작가가 신디케이션(syndication) 방식을 통해서 미국 전역에 있는 여러 신문에 동시에 공개하고 지면에 따라서 게재비를 받는 방식이다. 코믹스트립을 제외하면, 24∼32페이지 컬러 중철 판형의 월간 단일작품 연재물인 ‘코믹북’ 시장이 전통적으로 핵심을 이루어 왔다. 이 코믹북들은 도매에서 소매로 반품 없이 일괄 판매하는 소위 직접시장(direct market) 방식으로 거래되고, 덕분에 일부 대형 인기 타이틀이 일반 서점 체인에까지 들어가는 것을 제외하면, 보통은 전문점 위주로 거래된다. 코믹북 방식의 출판물에서 지난 수 십 년간 쌓여온 슈퍼히어로물 장르의 독과점 덕분에, 이런 전문점들은 특히 매니아 지향으로 편성되어 있다. 당연히 독자층이 좁아지고(아무리 화제작이라고 할지라도 가장 상위권 코믹북의 판매 부수가 20만 부를 넘기기 힘들다) 특히 그 과정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애호가 깊은(이른바 ‘geek’) 남성 청소년/청년층에 대한 상호의존 경향이 강해져 있다.
이런 판도에서 최근 수년간 점차 판이 커지고 있는 대안적 영역이 바로 단행본 판매 시장인데, 이전에는 상당히 드문 일이었던 코믹북 연재 작품의 단행본화라든지 아예 처음부터 단행본용 작품으로 기획된 작가주의 성향이 짙은 작품의 양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단행본 방식은 전문점이 아닌 일반서점에서 환영받고 있는데, 왜냐하면 도서의 입고 및 관리가 훨씬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일본만화(망가, manga)가 2000년대 들어 엄청난 물량으로 단행본 판형 시장을 공략 중이라는 사실도 이런 새 바람에 단단히 한몫 하고 있다. 덕분에 만화가 어두컴컴한 분위기의 매니아 집합소 격인 전문점을 벗어나 다시 일반 독자들과 접촉을 확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아치 코믹스(Archie Comics)」 이래로 그다지 자신들의 취향을 추구할 방법이 없었던 여성 청소년층이라든지 그간 성장한 자신의 연배와 인생경험에 어울리는 보다 심도 있는 만화작품을 찾고자 했던 성인층에게도 만화의 매력이 재인식되고 확장되었다.
이야기가 서두부터 길어졌는데, 핵심은 미국 만화계가 크게 코믹스트립, 코믹북, 작가주의 성향 단행본(좁은 의미의 그래픽 노블), 망가 계열 단행본(시장 수치 조사에서는 이것 역시 그래픽 노블로 취급)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중에서 신문연재 코믹스트립의 경우는 당대의 시사성, 문화적 코드가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사실상 북미권 이외의 작품이 이쪽 바닥에 들어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블론디』나 『캘빈과 홉스』, 『베이비블루스』 등의 작품들이 절찬리에 전국 일간지에서 연재된 바 있듯이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버릴 필요는 없겠지만, 아직 한국만화 또는 만화가가 이쪽으로 진출했다는 사례는 없다.
가장 먼저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진출방식은, 미국 만화계가 어떻고 간에 볼 것 없이 돌격대처럼 한국에서 만들던 그대로 미국에 한번 뿌려보는 것이다. 실제로 2000년대 초엽에 그런 시도가 있었다. 그 전에도 『아마게돈』 등 개별 작품들이 시험적으로 미국에서 포켓 판형으로 출간된 바 있었지만, 조직적으로 본격적인 시리즈로 출간한 방식은 스토리작가 야설록씨가 운영하는 야컴(YACOM)에서 『Demon Hunter Eton』 등 대본소 성인극화 방식의 작품들을 200페이지 흑백인쇄 단행본 단위로 출간하며 시작되었다. 다만 역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코믹북 방식에 익숙한 매니아 독자들을 끌어들일 만큼 장르적 쾌감을 보장하지도 않고, 그래픽 노블 단행본이라면 응당 기대할 만한 소장가치를 지닐 퀄리티도 작품에 담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소비의 방식 자체가 다른 대본소용 성인극화는 특유의 밀도 낮은 작화와 줄거리 전개로 독자를 붙잡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의 미국에서 정작 그런 류의 오락을 즐기는 시장은 만화 바닥이 아니라 슈퍼마켓용 펄프 소설,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영역인데 문을 잘못 두드린 셈이었다.
가장 전통적인 주류라는 코믹북 시장으로 진출한다면 어떨까. 지난 1999년~2002년 사이에 그런 시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침프 대디 스튜디오(현 스튜디오 아이즈의 모태)에서 프로덕션을 담당하고 미국현지 주류 만화 출판사인 이미지 코믹스(Image Comics)에 유통 배급을 맡기는 식으로 진행된 이 케이스에서는 김재환, 이태행, 강찬호 등 한국에서는 미국적 그림체에 가깝다고 간주되던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세부적인 공략 루트는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한국의 기존 출간 작품을 코믹북 형식으로 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 작가들이 코믹북 방식으로 새로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이다. 전자의 경우는 사실 일본만화도 90년대 초중반에 미국 만화계의 주류에 편입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기도 한데, 『무한의 주인』, 『총몽』 등의 서구적 취향에 잘 부합하는 작품들이 그런 식으로 도입되어 나름대로 임팩트를 남겼던 전례가 있다. 한국의 경우 이태행의 『타임시커즈』를 코믹북 형식에 맞게 일부 보정하고 색채를 입히는 방식으로 작업했는데, 그다지 큰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조기에 강판되었다. 문제는 한국에서 미국적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와, 정작 미국 매니아들이 멋진 코믹북 만화에서 기대하는 조건들이 달랐다는 점이다. 그들이 바라는 방식대로의 강한 캐릭터성, 장르코드에 부합하며 밀도 있는 전개, 쿨한 대사 등을 충족시켜주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작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코믹북 시장을 노리고 새로 작업한 미니시리즈 『Defiance』 시리즈나『멕 디스트로이어(Mech Destroyer)』나 『워크래프트』 같이 이미 게임 등을 통해서 인지도가 있는 문화콘텐츠 브랜드의 만화화 등에서는 소정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코믹북 업계에서 정작 큰 수익을 이어주는 판권시장 등으로 수익원이 확대될 만한 여지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지속되지는 못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늦게 시도되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가장 자연스러운 귀결이 바로 망가 계열의 단행본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2000년대 초중반에 들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TV에서 보고 자라난 청소년들을 주된 고객층으로 끌어들이고자 고개를 든 비즈(VIZ)와 도쿄팝(Tokyopop) 양대 출판사의 경쟁구도에, 여러 새 얼굴들이 뛰어 들면서 망가 계열 단행본의 출시 종수가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코믹북 시장은 매니아의 폐쇄성으로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러 있었고, 보다 저렴하고 쉽게 독자층을 확장할 수 있는 망가 계열에 대한 여러 출판사들의 관심이 이어진 것이다. 그 결과 라이센스 취득을 위한 경쟁과 출판종수 경쟁의 와중에서, 굳이 일본의 만화가 아니라도 미국인들이 보기에 일본만화적인 특징을 지녔다고 이해(또는 오해)할만한 작품들은 무차별적으로 공략의 손길을 받는 흐름이 생겨났다. 이는 마치 90년대 말 거의 무조건적인 일본만화 라이센스에 목매달던 한국의 풍경과 닮아 있는데, 한국만화 역시 그 공략 대상이 되었다. 2003년 샌디에이고 코미콘에서의 한국만화 홍보부스 등장 등은 이런 움직임을 더욱 촉진시켰고, 그 결과 여러 한국만화 작품들이 망가 계열의 장르만화로 미국에서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도쿄팝 출판사가 먼저 『라그나로크』, 『프리스트』 같은 유명 소년만화는 물론 『여왕의 기사』 등 모험요소가 담긴 순정만화 다수를 일찌감치 선점했고, 덜 기민한 NBM 등은 오히려 젊은 장르적 유행보다는 『남벌』 등 선 굵은 한국 성인만화로 차별화를 꾀했다.
그리고 일부 작품들은 그래픽노블 차트의 상위권에 오르기도 하는 등 좋은 결과를 냈고, 한국 매스컴에서 종종 듣게 되는 ‘한국만화 수출실적 ○○만불’ 소식의 핵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밖에도 한국의 시공사에서 직접 경영에 개입하고 있는 아이스 쿠니온(Ice Kunion)이나 이코믹스에서 운영하는 넷코믹스(NetComics) 등이 『천일야화』, 『위대한 캣츠비』 등으로 일정한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현재 미국의 망가 붐이라는 것 자체가 일본식 주류 소년 모험만화와 순정만화(야오이 포함)라는 특정 장르에 지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적합한 한국작가의 국내산 작품들이 한정되어있다는 약점이 있다. 특히 일본식 장르물을 만들기 위한 조건인 일본식 잡지시스템이 한국시장에서 치명적인 결점을 드러내며 무너지기 시작한지 오래라는 것이 이런 점을 부채질한다. 그 결과 한국의 만화출판업계에서는 정작 “이제 팔 것은 다 팔아버렸다”는 걱정이 여러 각종 경로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반면 작품의 깊이로 승부하는 작가주의 성향 작품들의 시장은 미국도 한국만큼이나 좁기가 매한가지인데다가 문화적 거리감까지 더해지고, 따라서 평론가들의 소개와 해설 등 홍보활동이 필요한 영역이 발생하는데, 그 영역은 한국만화의 현지 회사들이 이상하리만치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3. 유럽권의 경우
흔히 우리가 유럽만화라고 뭉뚱그려서 통칭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실상 꽤나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다만 불어권인 프랑스와 벨기에가 산업적으로나 문화예술적 성취로나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출판문화의 전통 자체가 워낙 강한 독일과 개방성이 매우 강한 이탈리아가 또 다른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여기에 풍자의 전통이 강한 스페인이라든지 여타 문화적 강소국들이 버티고 있으며, 문화적 거리로는 미국 만화권에 가깝기는 하지만 대륙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영국도 있다. 다만 각 나라들이 워낙 가깝게 붙어있고 교류가 자유롭다 보니 편의상 하나의 문화권으로 엮어서 간주하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만화권의 경우 한 가지 전반적인 공통점이 있다면, 만화가 일반 서적들과 그다지 크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처럼 전용 유통망에 의존하지 않고 서적 출판의 일부로 위치하고 있다.
유럽 만화권의 전통적인 주류 유통 형태는 ‘알붐’이라고 불리우는 64-80여 페이지의 풀컬러 대형 하드커버 판형이다. 페이지 당 많은 칸을 사용하고 다양한 색채를 쓰며 밀도 있는 그림체와 이야기를 전개의 방식이 애용되어왔기 때문에 정착된 규격인 셈이다. 하지만 알붐이 비록 가장 주류적인 전통 만화 양식이라고 할지라도, 작가주의적 전통에서는 일반 포켓판형이나 문고판을 위시한 다양한 서적 형태가 각각의 작품 내용이 필요로 하는 형식에 맞추어 적용되곤 해왔다. 이런 작가주의 작품들은 강력한 표현력을 부각시키며 큰 예술적 성취를 얻어내곤 했으나, 반대급부로 주류 오락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90년대 이래로는 전반적으로 장편만화 여러 편을 분절하여 정기적으로 연재하는 잡지 형식이 명맥조차 거의 유지하지 못하는 편이고, 그나마 발간되는 잡지들에 수록되는 것도 주로 한 회에 에피소드를 완결 짓는 매우 짧은 지면의 작품이 많았다. 적어도 망가 붐 이후 다시 잡지연재라는 형식이 재평가를 받기 전까지는.
그런데 유럽 만화권 역시 1990년대 이래로 전통적 의미의 알붐 만화들이 주류에서 쇠퇴돼가는 양상을 보였다. 이미 수십 년 전에 그려진 작품들이 여전히 신선하게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 것은 물론 고무적인 일이지만 새로운 스타작가나 작품이 양성되지 않는 폐단도 지적되었다. 게다가 특유의 분방한 상상력과 직선적인 모험 전개식 스토리는, 젊은 층에서 각광받는 현대 헐리웃 영화 등의 보다 ‘감각적’인 오락양식과의 승부에서 점차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2000년대에 들어서 유럽에 쏟아져 들어온 것이 바로 일본만화다. ‘망가’로 통칭되며 80년대 이래로 소수 매니아층을 중심으로 유통되다가, 그들이 본격적으로 출판사를 차리고 편집기획을 할 수 있는 세대로 성장하자 폭발한 것이다. 동시에 작가주의 만화 진영에서도 표현적 가능성과 작품적 깊이를 지닌 일본만화에 대한 문화적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이어졌다.
여하튼 간단히 요약하자면 현재 유럽 만화권에서 주류 진영을 이루고 있는 것은 쇠퇴하고 노후화 했지만 아직 여전히 중심에 있는 알붐 만화, 소수이기는 하지만 아직 생존하고 있는 짤막한 잡지만화, 다양한 형식으로 선보이는 작가주의 성향 만화, 망가를 중심으로 하는 포켓판형 장편 흑백 만화 등이다.
그렇다면 각각에 대해서 한국만화는 어떤 식으로 파고들어갔는가. 우선 알붐 형식에는 도저히 파고들 길도 굳이 그럴만한 이유도 없다. 물론 한국계 작가들이 실제로 그 분야에서 활동 중인 사례가 있지만, 한국 만화계가 지향해볼만한 메리트는 그다지 없다. 짤막한 잡지만화 역시 한국의 만화호흡과는 워낙 다르기 때문에 비슷한 이유로 곤란하다. 결국 한국만화는 작가주의 만화 계열, 그리고 유사(類似) 망가 계열로서의 두 가지 활로가 있는 셈이다. 단행본이 주가 되며,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잡지 장편 연재물에 명함을 내미는 방식으로 말이다. 비록 이전에 간헐적인 개인적 접촉 정도는 있었겠지만, 유럽 만화권에 한국만화를 처음 본격적으로 소개한 것은 2003년 앙굴렘 만화축제의 한국만화 특별전에서부터다. 문화콘텐츠진흥원이 주도하여 기존 작가단체나 출판사의 이해관계로부터 비교적 독립된 전문 기획팀을 꾸려서 행사를 준비한 결과, 특정 장르나 작가군에 한정되지 않고 한국만화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총체적으로 선보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즉 사회문화적 고찰을 보고 싶은 유럽 독자들에게도, 짧은 호흡의 풍자와 카툰적 정취를 원하는 독자들에게도, 시각적 실험을 원하는 이들에게도, 망가와 비슷한 것을 원하는 이들에게도, 심지어 핸드폰용 만화의 미래를 점치는 이들에게도 각각 한국만화에 무언가 흥미로운 것이 있다고 각인시켜주기 위한 전시였던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성향의 기획으로 같은 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도 한국만화 소개행사를 가졌으며, 결국 그 씨앗은 이후 수년간 차곡차곡 싹을 틔웠다.
그동안 프랑스에서 새로운 대중 오락문화로서의 망가의 가치는 기존 출판사들을 충분히 자극했는데, 프랑스 굴지의 명문 「다르고」 같은 곳도 망가 전문 레이블 「다르고 가나」를 세울 정도였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진출을 선택받은 것은 유사망가 계열이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작품 자체가 꼭 그렇다기보다, 유럽 출판사들이 그런 의도로 수입을 해갔다는 의미다. 가장 두드러진 첫 사례는 프랑스에서 한국만화 전문 연재잡지 「도깨비」의 출간이었다. 대원CI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당대의 인기 소년만화들을 모아갔다는 점,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한국 만화계에서는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 우선 연재만화 잡지라는 포맷이 그곳 독자들에게 낯설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모여 있는 작품들의 성향 역시 취향이 통일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당장 편집이나 기획방향 등 잡지로서의 품질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잡지를 만든 「쎄베데」라는 출판사는 원래 일본에서 성인용 만화(헨타이(hentai) 망가)를 수입하던 곳으로, 망가 붐에 편승하고자 한국만화로 브랜드 차별화를 시도했던 것 뿐이기 때문이다. 즉 좋은 품질의 기획이나 출판제작을 해본 경험이 없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출판사들이 별다른 사전정보 없이 수출이라는 사실만으로 쉽게 작품들을 넘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잡지는 신통치 않은 반응을 얻고 조기 단명했으며, 해당 연재작들의 단행본 역시 큰 반향 없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더 뼈아픈 것은 한국만화라는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웠던 탓에 오히려 한국 만화 그 자체가 저품질의 일본만화 유사품 같은 인상을 남겼다는 점이다. 여하튼 ‘유사 망가’ 계열로서의 한국만화 출판은 이후 다른 출판사들을 통해서도 계속되었고, 그 중에는 특별한 히트작보다는 크게 나쁘지 않은 정도의 평가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무엇보다, 대중 오락문화의 대세를 리드할 수 있는 특정한 코드를 지닌 작품을 수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만화의 경우는 작품 자체로서의 품질보다도 적절한 오락성과 ‘닌자’라는 이국적 히트 코드를 지닌 『나루토』, 사무라이 칼싸움이라는 코드로 승부하는 『블리치』 등의 작품들이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지만, 한국의 소년만화에는 그처럼 시류를 이끌 수 있을 정도의 오락적인 코드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순정만화는 전반적으로 형편이 좀 더 낫다고 볼 수 있는데, 장르 자체가 소재의 오락성보다는 섬세한 감정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결국 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사 망가’ 계열로 수출된 작품들은 유럽에서도 역시 빠른 소진 양상을 보이는 편이다.
결국 일본의 작가주의 만화를 소개해온 경력이 있는 「카스테르망」「솔레이유」 등에서 최규석, 변기현, 변병준, 강풀 등 개성 있고 솜씨 좋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픽업해갔다. 오락성의 파급력보다는 작품 자체의 우수함에 초점을 맞추어 장사를 하는 출판사 라인업인 만큼, 대박 사회현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지속적 교류만 뒷받침된다면 충분한 진출 성과가 예상되는 분야다. 실제로 김동화의 『빨간 자전거』가 2005년 블루아 페스티벌 당시 프랑스 만화비평협회의 비평대상 후보작으로 올라가기도 했고, 권윤주의 『고양이에게』는 프랑스 동물보호협회의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단순한 오락물 시장이 아닌 출판 문화예술로서의 교류 차원에서는 한 시절 호들갑으로 끝나지 않았다. 장르오락물의 차원에서 빠르게 기복을 하던 와중에서도, 작가주의 성향 작품의 범주에서는 한국만화가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꾸준히 국제만화축제에 한국의 작가와 작품들을 소개하며 전문가들 사이에 교류를 쌓아올린 덕택에 한국 작가들의 매력이 지속적으로 홍보될 수 있었다.
4. 일본의 경우
일본의 경우는 한국과 같은 문화권에 있어서 더 교류가 쉬울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정반대다. 일본의 만화시장 구성 방식은 한국에서 참조한 부분이 워낙 크기도 해서 친숙한 면이 많은데, 기본적으로는 장편 작품의 잡지연재를 중심에 두고 있다. 그리고 잡지연재 분량을 단행본으로 묶어서 출간하여 판매하는데, 잡지는 염가로 팔아서 사실상 단행본으로 수익을 내는 구조다. 연재는 작가와 편집자가 사실상 공동창작에 가까울 정도로 긴밀한 팀워크를 이루고 있고, 일본 주류만화계의 오랜 경험축적 덕분에 장르 공식에 입각한 오락성이라는 측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일본 주류만화계는 영화로 치자면 헐리웃에 해당될 만큼 고도의 창작/제작 시스템을 발달시켰으며, 또한 그만큼 거대한 시장을 자랑한다. 하지만 현재 일본 만화계는 보편적 독자층의 지속적인 감소와 함께, 그 감소분을 채워줄 충직한 소비층 즉 매니아층을 대상으로 하는 신흥시장 개척에 강점을 보여 왔다. 전통적인 3대 메이저 잡지인 「소년 점프」, 「소년 선데이」, 「소년 매거진」 등은 되돌릴 수 없는 지속적인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그와 반대로 오타쿠 취향을 대상으로 하는 신규 만화잡지들이 최근 몇 년간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고 있다. 즉 새 연재 작품에 대한 수요는 계속 생겨나지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독자층은 줄어드는 셈이다.
일본 만화계의 또 다른 특징은, 주류 일본만화 양식에서 벗어난 영역에 대해 철저히 폐쇄적이라는 사실이다. 「가로」또는 「악스」 계통으로 대표되는 작가주의 성향 만화 작품들의 독자층은 일본이 아무리 전체 만화시장이 크다고 하더라도 한국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인지, 한때 극화운동을 주창하는 등 사회와 대중과의 호흡을 중시하던 작가주의 성향 만화들도 점차 자폐적 실험성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만화 등 해외만화도 활발히 소개되지는 않고 있으며, 소개된다 해도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단순히 생산이나 유통의 폐쇄성이라면 현지기업을 활용하든지 해서 극복하겠지만, 독자들의 취향 자체가 폐쇄적이라서 도저히 어떻게 해볼 길이 없다. 영어로 녹음된 헐리웃 장르공식 영화만 보는 미국의 일반 대중영화 관람객들과 비슷한 셈이다. 다만 한 가지 예외는 실용서 분야인데, 만약 화제가 되어 대세몰이를 하는 토픽에 대한 만화라면 예의 페쇄성의 벽이 다소 낮아진다.
즉 일본 만화계의 경우 메이저든 마이너든 주류 방식의 잡지연재 만화에 뛰어들거나, 아니면 큰 호응을 기대하기 어려운 ‘바깥’ 만화의 길에 한 발 내딛는 것에 의미를 둘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이러한 상황들에 대한 충분한 사전인식이나 전략 없이 한국 작품들을 일본에서 책으로 낸다는 것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진출한 사례들이 있다. 예를 들어 2001년에 『비천무』, 『샐러리맨』, 『기생이야기』, 『누들누드』 등 한국의 성인 독자층에서 인기를 인정받았던 작품들을 모아서 출간한 「타이거북스」의 사례가 있다. 한국 출판사의 자본을 중심으로 하여 출간된 시리즈인데, 일본 주류 코드를 맞추는 것도 아니고 별도의 화제성을 지니지도 않았기 때문에 일본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후에도 강풀의 『순정만화』 같이 곧바로 단행본으로 내는 시도가 여전히 이어졌지만, 아직 어떤 경우도 괄목할 만한 화제를 일으킨 적은 없다. 하지만 이미 화제가 있는 경우는, 성과가 나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우정의 『김정일 입문』은 권당 50만부가 넘게 팔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북한에 대한 일본의 비상한 관심이 만들어낸 예외적인 케이스이다.
그렇다면 주류 방식의 잡지연재는 어떨까.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작품을 그대로 일본 잡지에 연재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코드가 충분히 비슷하다고 느끼거나, 아니면 ‘한국스러운’ 코드로 오히려 일본 주류 만화독자에게 승부를 걸 수 있겠다는 발상이다. 전자의 경우는 신생 잡지 「코믹 번치」가 처음 창간되었을 때 연재에 들어간 『열혈강호』가 있다.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라는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물론, 나름대로 확고한 캐릭터의 매력 등을 염두에 두고 들어간 셈이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항상 인기순위가 바닥을 쳤고 결국 연재간격이 불규칙해지다가 아예 탈락하고 말았다. 일본 주류 만화 속에 존재하지 않는 ‘무협’이라는 장르의 세계관과 코드들이 와 닿지 않았고, 또한 비교적 작화나 연출력 등이 부족했던 첫 화부터 연재를 시작했던 것도 패착이었다. 한국의 잡지 기준에 맞춘 작품이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일본 잡지의 경쟁에서 살아나기 힘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다음으로는 잡지 「운포코」에 연재되었던 『궁』을 들 수 있다.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일본의 인식은 드라마 『겨울 연가』 이후로 180도 바뀌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겨울 연가』의 히트 이후로는 한국이라는 브랜드 가치가 대중문화에 있어서 시장성이 생겨났다는 것을 문화산업계가 알게 된 것이다. 물론 혜택을 본 것은 주로 TV드라마와 영화지만, 『궁』의 경우 한국 브랜드를 활용하기에 워낙 좋은 아이템이라서 결국 발탁이 된 셈이다. 비록 잡지 「운포코」에서는 1년 정도 연재되었을 뿐이나, 이후로도 단행본을 지속적으로 발간하며 좋은 판매량을 올리고 있다. (발행부수가 총 100만부를 돌파했다고 하는데, 이는 처음부터 일본 잡지에서 연재된 케이스가 아닌 순수 한국만화로서 번역 수출된 경우로는 최대의 판매량이다.)
하지만 일본 주류성향 만화 잡지 입장에서 가장 리스크가 적은 것은 결국 자신들의 시스템 안과 자신들의 컨트롤 하에서 작가들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한국 만화가의 일본잡지 연재라는 방식은 꾸준히 시도되어 왔다. 우선은 1998년 양경일 그림 + 히라이 카즈마사 글의 『좀비 헌터』가 「코믹 빔」에 연재될 때처럼, 일본 편집부나 일본 스토리작가를 바탕으로 한국 작가가 작화를 하는 방식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수 년 후 권가야 작화의 『푸른 길』이나 김병진 작화의 『파이널 판타지 XI』 등에서도 반복되었지만, 썩 좋은 퀄리티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스토리작가와 그림 작가가 서로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은 좋은 만화를 위한 기본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림이 기합은 들어가 있지만 전체 이야기의 맥락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이야기는 그림의 매력을 살려내지 못하는 불협화음에 시달리다가 어정쩡한 품질로 끝나거나 아니면 아예 연재가 중도하차하는 비극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측면으로 보자면, 한국 창작팀이 작업을 하되 일본 편집부와 원활하게 소통을 하는 방식이 가장 합리적이다. 한국작가의 성공적인 일본 잡지연재 진출의 신호탄이 되어준 『신암행어사』, 그리고 『흑신』이 이런 방식의 장점을 잘 살려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스토리작가가 애초부터 여타 한국 스토리작가들보다 훨씬 일본만화의 흥행 코드에 친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혹은 『선켄락』을 연재하는 박무직의 경우처럼 아예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기 위해 화실 자체를 일본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결국 이쪽의 핵심은 일본의 제작시스템에 얼마나 긴밀하게 연계되어 작업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한국 작가들을 구하게 된 것은 당연히 만화 연재에 대한 수요가 늘고 필요한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일본 만화시장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불황 때문에, 매니아 성향 위주이기는 하지만 새 잡지들이 속속 창간되었다. 그런 잡지들은 신인 작가들을 필요로 하고 있고, 동인지 시장을 제외하고 ‘실력이 어느 정도 검증된 작가’를 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창구로서 외국인 작가도 하나의 선택지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일본만화 코드를 가장 근접하게 이해하고 있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물론 한국적 감수성, 또는 작가적 창조 정신을 주문하기보다는, 높은 작화력과 적절한 이야기 구성을 평가하며 고용하는 방식에 가깝다. 물론 처음에 말했듯 이들이 일본 시스템 안에서 만드는 만화를 한국만화로 간주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사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작가 입장에서는 그나마 좀 더 만족스러운 작품 활동 환경과 수입을 얻을 수 있고,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한국작가인 덕분에 뭔가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만 생각하면 되니까 말이다. 한국작가로서 한국의 혼을 일본에 심어주고 오겠다는 식의 허풍이 통할 시대는 분명히 아니다.
5. 그리고 앞으로
간단히 요약해보자. 자의든 타의든, 한국만화는 북미권이나 유럽권에서는 별다른 전략 없이 ‘유사 망가’로서의 매력이라는 카드를 먼저 뽑아들었다가 빠른 소진을 겪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한국만화의 진출이라기보다는 한국의 만화인력 가운데 일부가 그쪽 리그에 발탁되는 것에 가깝다. 각 만화 권역 모두 여러 경로가 있지만, 때로는 운이 나빠서 때로는 그냥 현명하지 못해서 골고루 성공적으로 공략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럴수록, 과연 현재까지 축적된 한국만화가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무엇인지 원점부터 다시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각각의 환경 조건에 따라서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겨울 연가』 직후의 일본과 같이, 상황에 따라서는 때로는 한국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극대화할 필요도 있다. 혹은 유럽 지성인들의 허영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사극을 통한 동양의 신비, 오리엔탈리즘 정서를 일부러 강조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 온라인 만화의 풍부한 역동성을 집중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효과적일 수 있다. 때로는 창작인력들이 다른 만화권에 직접 진출해서 좋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당 만화문화권에 대한 정보를 주고 준비를 시키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쯤이면 독자 여러분도 눈치 챘겠지만, 이와 같은 사례들의 공통점은 바로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시장을 분석하고, 현지 상황과 출판사들을 제대로 알고, 성공할 수 있는 현지 마케팅 전략을 짜내도록 같이 머리를 맞대고 협력해야 성공적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홍보부스 설치나 사인회도 좋겠지만, 우선은 문화예술 차원의 소개 행사와 전문가 교류를 계속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일들의 대부분은 당연히 각 출판사들이 직접 나서서 해야 하겠고, 일부는 공공단체의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 전략도 마케팅도 없이 그냥 해외에서 누가 찾아와서 출판권을 달라고 하면 계약해주는 식으로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쉽게 바닥이 드러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악습이 반복될 뿐이다. 만약 정말로 한국만화를 성공적으로 해외에 진출시키고 싶다면, ‘○○만 달러 수출 달성’ 같은 애매한 수치를 외치며 한국만화가 외국에서 최고의 반응을 얻고 있다는 선심성 보도에 취해 있을 여유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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