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한 파멸의 매혹 – 『뮤』[기획회의 256호]

!@#… 영화판 수입제목과 마찬가지로 ‘뮤’로 나왔다. 뭔가 귀여운 어감. (…)

 

공평한 파멸의 매혹 – 『뮤』

김낙호(만화연구가)

흔한 이야기로, 세상에서 유일하게 평등한 것은 죽음이라고 한다. 부자든 거지든 선한 자든 악인이든 결국은 죽으니까 말이다. 물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조금도 평등하지 않지만 적어도 결과만큼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꼭 죽음이 아니라도, 종종 광범위한 파멸은 공평함의 이미지를 지닌다. 절대적 행복의 공평함을 이야기하는 ‘천국’은 실제로 볼 수 없다. 하지만 파멸의 공평함은 죽음뿐만 아니라 자연재해, 전쟁에 의한 무차별 집단 살상 등을 통해서 유감스럽게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자주 발생한다.

그렇기에 그런 식의 파멸은 한편으로는 두려운 존재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공평함 때문에 강력한 매혹이 있다. 그런데 그런 공평한 파멸을 신체화한 인간이 있다면 어떨까. 사회의 무언가에 대한 원한으로 복수를 하는 연쇄살인마도, 권력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범죄자도, 설정상으로는 무차별 살인마지만 이야기상으로는 수상하게도 특정 부류만 노리는 자들(방종의 10대들만 노리는 공포영화의 스타들이라든지)도 아니라 정말로 아무런 브레이크가 없는 인간형 자연재해 말이다. 대중문화에 일가견이 있다면 영화 ‘다크나이트’의 조커나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의 안톤 시궈, 만화 ‘몬스터’의 요한 같은 비교적 근작들의 이름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엽기적 세계관이 번창한 세기말을 치루기 한참 전, 1970년대의 만화에 이미 그런 캐릭터가 있었다. 그것도 변태적 성향의 인디만화가도 아니라, 따뜻한 휴머니즘으로 유명한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가 만들어낸 작품 속에서.

『뮤』(데즈카 오사무 / 전2권 / AK)은 작가가 작정하고 악을 그려내겠다고 만든 작품이다. 쇼카쿠칸의 성인만화지 ‘빅코믹’에 76년부터 78년까지 연재한 작품으로, 진지한 분위기의 작품에서조차 간간히 등장시켰던 슬랩스틱 개그조차 완전히 배제한 서늘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외국 군대의 기지가 있는 한 섬에서 주민들이 화학무기 사고로 한 순간에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군대와 부패한 정치권은 이를 은폐한다. 당시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두 사람이 한 명은 그 영향 때문인지 사회적 도덕심을 잃게 되었고, 한 명은 죄책감 속에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15년 후인 현재, 은폐되었던 MW를 노리는 살인마 유키와 그와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서도 그의 악행을 막고 구원하고자 하는 가라이 신부의 대결이 펼쳐진다. 천재적 두뇌와 변장술, 마성에 가까운 매력을 가진 연쇄살인범 유키가 벌이는 커다란 사건들의 연속의 와중에, 무력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가라이 신부가 계속 그것을 막으려 노력한다. 어떤 계기로 자신이 만들어내다시피 한 절대악에 가까운 천재 범죄자를 쫒는 일반인의 이야기는 『몬스터』등 여러 후대 작가들의 스릴러물에서 반복되었는데, 절대적 악행에 대한 상상력과 무력한 일반인들이 주는 안타까움은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보더라도 조금도 희석된 감이 없다.

주인공 유키가 세상에 행사하는 공평한 파멸로서의 악은 광기의 스플래터 쑈가 아니라, 차분하고 치밀하게 끝까지 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가 특별히 개인적 충족감을 느끼는 것도, 괴로워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확실하게 한걸음씩 마치 본능에 따르듯 나아갈 따름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주변에서 먼저 무너지고 광기에 동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저항하면서도 그에게 탐닉할 수 밖에 없는 신부, 처음에는 순수했으나 점차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며 매달리게 되는 여자, 은행원에서 정치인까지 이르는 크고 작은 비자발적인 공범들까지, 유키라는 촉매를 통해서 자신들의 어둠을 키우고 그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유키가 MW를 찾아내려고 여러 사건들을 벌이는 것을 보며 가라이 신부는 그가 15년전에 당했던 것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유키는 그런 “어긋나기는 했지만 인간적인” 목표보다는 훨씬 순수하게 무차별적인 파멸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길목에 교차하는 것은, 보다 이기심이 가득한 다른 이들의 악행들 – 대량살상 무기 개발, 대형사고의 정치적 은폐, 금융 추심에 의한 가정파멸 등이다. 여기에는 오키나와의 미군주둔에 따른 사회적 문제, 보수정치권의 부패, 금융권의 비정함 등 보다 사회적 차원의 비판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유키의 사심 없는 절대악이 하나의 비교기준으로 제시되어 있기에, 욕심 많은 개인들과 집단의 추악한 짓이 오히려 더욱 서늘하게 다가오도록 하는 묘한 감정을 일으켜준다. 좀 더 개인적 도덕의 차원에서도, 카톨릭 성직자의 동성애, 수간, 마약, 강간 등 당대(아니 현대까지도)의 부덕함의 코드가 아주 골고루 배합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단순한 말초적 자극보다는 악이라는 것 자체의 성격 자체를 드러내는 쪽으로 다뤄지고 있다. 인간의 광기를 묘사하고 싶었다는 식으로 변명하며 사실은 단지 관음증을 충족시키는 ‘고문포르노’ 장르들과는 달리, 사회의 악과 사회를 초월한 악의 대비를 보여주는 효과가 강하다. 그 속에서 독자들은 사회에 일상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크고 작은 ‘악’이라는 것에 대해서 풍부한 생각거리를 자극받게 된다.

『뮤』는 작가 특유의 유려한 연출 사이로, 실험적 기법들을 심어 넣는 강력한 표현력을 발휘하곤 한다. 특히 시각적 파격으로 만들어내는 탁월한 심리묘사가 일품인데, 점점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라이 신부의 흔들리는 정신을 서양고전미술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을 교차편집해서 표현하는 대목은 마치 같이 정신이 흔들릴 것 같은 느낌이다. 칸을 흐릿한 원으로 묘사해서 각 장면 사이의 단절감을 갑자기 고양시킨다든지, 추격신의 급박한 칸 편집이 주는 시각적 긴장감은 말 그대로 만화 연출의 교과서다. 하지만 사실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능력에 대해서 쓰는 것은 종종 허무한 일이다. 단순히 천재 작가고 선구자라서가 아니다. 대가로서 일찌감치 자리매김한 후에도, 자신의 영향을 받은 이후 세대 작가들의 새로운 성과에 항상 자극받아 자신의 지평을 넓혀나갔기 때문이다. 『뮤』역시 자신이 만들어놓았던 주류만화의 성향에 반기를 들어 성인취향의 사회적이고 비정한 이야기를 다루는 ‘극화운동’에 대한 데즈카의 대응작 가운데 하나였다. 어떤 면에서 보면, 가장 반-데즈카적인 흐름으로 만들어진 작품 경향성의 선두그룹에 막상 데즈카 자신이 서있는 셈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플롯의 디테일은 보기보다 헐거운 편으로, 세밀한 기획보다는 강력한 발상들을 바탕으로 비교적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펼친 감이 있다.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등장하는 유키의 형님이라든지, 등장할 때의 임팩트에 비해서 지나치게 적게 활용된 검사 캐릭터라든지 조연들의 역할이 들쑥날쑥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헐거움을 오히려 이야기 속으로 쉽게 빨려들게 만드는 여백처럼 기능하게 하는 것이 과연 대가의 솜씨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소설이나 시 등 여타 문학서적 분야와 달리, 만화는 고전 작품을 향수 가치가 아닌 작품적 매력으로 즐기는 독서 습관이 아직 널리 퍼져있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아마 이런 식의 작품들이 더 꾸준하게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면 바뀌지 않을까 희망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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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뮤 MW 1
테츠카 오사무 글 그림/에이케이(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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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oughts on “공평한 파멸의 매혹 – 『뮤』[기획회의 256호]

Comments


  1. 고전 만화를 작품으로써 즐기는 문화가 널리 퍼져 있지 않다는 점은 정말 공감. 어디라도 큰 예외가 아닌 듯한 게, 북미 쪽의 아니메 및 망가 정보 사이트의 전용필자 칼럼같은 데서 일본 고전만화의 번역출간본에 대해 [그림이 구리다 (=오래되었다+아름답지 않다+내 MANGA 취향이 아니라능!)] [내용이 이해가 안간다] [가치관이 비도덕적이다]같은 상당히 불공평한 근거의 악평을 (타츠미 요시히로 단편모음집에 대한 평들의 경우 세가지 다 나옴OTL) 심심찮게 볼 수 있다는 점; 흑백영화를 왜 칼라가 아니냐고 씹거나 존 웨인 영화는 툭하면 여자가 따귀 맞으면 반하는 성차별적 폭력이 남발하니 작품적 가치 자체 역시도 형편없다고 폄훼하는 느낌이라 뭐랄까, 고전을 즐길 최소한의 기본적 자세, 즉 작품이 출시된 역사적 맥락과 그에 따른 형식적 구조에 대한 최소한의 감안 및 이해 역시 만화 감상에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99% 향수 마케팅에만 의존해 [애장판] 판매를 주로 열 올리는 한국 시장도 그다지 나을 바는 없지만;

    [MW]는 그 스펙터클과 무시무시한 깊이 때문에, 현재의 일본영화판보다는 차라리 할리우드 스케일이나 유럽에서 제작해주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국내에도 단행본 출시가 되는 이점은 있을지도?^^; 차기 타자는 아마 [카무이 외전]일 듯 합니다(…)

  2. !@#… 시바우치님/ 뭐 시 소설 영화 음악 미술 등 타 장르들도, 그걸 즐길 줄 아는 이들이 나름 폼나는 사회적 위치에 자리잡고 적극적으로 고전을 감상하는 맥락과 고전의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나마 여기까지 온 거니까요. 즉 제가 출세하면 모든게 해결. (핫핫) // ‘카무이 외전’이라면 혹시 ‘카무이전’ 전집까지…

  3. 포스팅하시기 한 1주전에…서점에서 꽁꽁싸진 뮤를 발견하고 지나갔다가, 오늘 다시 아..캡선생님이 쓰신 뮤 포스트가 이 책이었군 하고 샀습니다.

    그리고 지금 150페이지까지 읽다가 일단. 쉬고 싶어서 이제 이 글을 읽네요.

    뮤에서의 캐릭터를 보니, 지금 제목이 딱 안떠오르지만 예전에 일어본으로 봤던 2권짜리 ‘늑대인간이 되는 의사’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그때 그 책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는데. (주역 캐릭터중 한명이 정신질환자로 선과 악의 경계에서 선 인물)

    뮤는 정말 충격 그 자체입니다. 첫 에피소드 하나만으로 혼이 나가는듯한…(교차편집으로 등장하는, 어찌보면 만화라고 할 수 있는 살로메 일러스트 인용이 인상적이더군요.)

  4. !@#… nomodem님/ 아 “키리히토 찬가” 말씀이신듯? 그 작품도 좀 한 비정함 했죠(인간튀김 ㅎㄷㄷ). 두 작품 모두, 충격적 소재와 전개를 나름의 품격을 잃지 않고 유려하게 펼치는 대가의 힘이 가득하죠. 심지어 노골적으로 대충 얼버무리는 부분마저도(고우영 선생과 좋은 승부가 될 능력).

  5. 넵.키리히토 찬가. (역시 전 이렇게 만화 제목조차 기억하지 못하는..오덕군자와 거리가 먼 노말인) 정말 고우영선생과 좋은 승부가…커흐. 어디까지가 뻥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절대악인의 표정이 참 충격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