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대표하는 유쾌함 – ‘닥터슬럼프 완전판’ [기획회의 286호]

!@#… 5등신 미소녀(…)에서 시작했다가 그림체가 다듬어질수록 거의 2등신까지 줄어들어간 여주인공 지못미;;

 

한 시대를 대표하는 유쾌함 – [닥터슬럼프 완전판]

김낙호(만화연구가)

장르 자체에 대한 편견으로 굳어지곤 하기에 의식적으로 타파하려고 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만화와 웃음은 자주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어왔다. 카툰화법이라는 직관적이고 과장된 형상은 유머라는 감성전달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고, 분절된 칸 연결이라는 이야기형식은 비약과 반전이라는 효과를 통해 우스운 이야기를 표현하기에 적격이다. 유감스럽게도 유머라는 고급 표현력에 유치함이라는 굴레를 씌워서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런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유쾌한 유머를 담아내는 만화들은 오랫동안 주류문화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유머에 강한 만화로서도 최고 수준으로 유쾌한 개그만화가 되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렵기도 하다. 특히 장편 장르연재물이 개그로서 성공하려면 아예 새로운 방향을 발명하거나, 다양한 웃음코드들을 효과적으로 합쳐내서 신선함과 능숙함을 선사해야 한다. 개그만화의 장르적 완성도는 높아졌지만 아직 매니악한 취향코드나 부조리극 등의 길로 비켜서기 직전인 80년대의 작품 가운데, 후자에 해당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기공룡 둘리]였다면 일본에는 [닥터 슬럼프] 가 있었다.

[닥터슬럼프 완전판](토리야마 아키라 / 학산문화사 / 1권 발매중)은 8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 인기리에 연재되고 한국에는 97년 정식 라이센스판이 출간되었던 작품을 재출간한 것이다. 사실 [닥터 슬럼프]는 한국에는 원래 작가의 차기작이자 세계적 히트작인 [드래곤볼]이 인기를 끌면서 그 작품의 해적판 만화책에 ‘드라곤 비밀의 열쇠’, ‘드래곤볼2’ 등의 유사제목을 달고 부록 격으로 따라 처음 들어와서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낸 바 있다. 이야기는 펭귄마을이라는 사람과 의인화된 동물들이 함께 사는 펭귄마을의 발명가 노리마키 센베 박사가 소녀 로봇을 만들면서 시작한다. 노리마키 박사는 천재적이지만 약간씩 결정적인 결점이 하나씩 있는 발명품을 만들어내는데, 이번에 만들어낸 로봇소녀 아라레는 원래 조신한 가사도우미를 원했으나 호기심 많은 괴력의 말괄량이다. 게다가 로봇이면서 심각한 근시라서, 커다란 둥근 안경을 끼어야 한다. 박사와 아라레,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매일 벌이는 크고 작은 소동들이 에피소드식으로 전개되는데, 처음에는 이웃집 이발사 아저씨와 장난 좋아하는 학교친구, 박사가 짝사랑하는 선생님 등 비교적 평범한 이들 사이에서 박사의 발명품과 아라레가 야기하는 유쾌한 촌극이 주로 나온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머리가 엉덩이인 외계인들, 박사의 숙적이 보내는 악의 로봇 카라맬맨 시리즈, 그 중 아라레에게 반해서 남자친구(?)가 되는 소년로봇 오보챠맨, 중국에서 온 무술가족, 천사, 천재 아기 등 더욱 왁자지껄한 출연진으로 불어난다. 심지어 작가 자신도 그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 캐릭터로 직접 출연한다.

그런 캐릭터들을 바탕으로, [닥터 슬럼프]는 당대에 존재하던 일본 어린이 개그만화의 코드들을 집대성한 명작으로, 시트콤 같은 일상 에피소드극, 대중문화 패러디, 화장실 개그, 신기한 발명품 위에 가족적 따스함, 격투와 종횡무진 모험극까지 버무려낸다. [쿤타맨] 등 일련의 슈퍼히어로 패러디 개그만화들의 맥을 이어 바닥에서 살짝 떨어질 정도의 높이에서 걷는 속도로 날아가는 슈퍼맨이 등장하며, 어린이용 화장실개그로서 주인공 아라레는 늘 나뭇가지에 똥을 얹어서 들고 다닌다. TV드라마들을 패러디하는 에피소드, SF영화의 구조를 가져온 일화들도 적지 않다. 박사의 초월적 발명품들과 그런 발명품으로는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는 구조는 [도라에몽]을 연상시킨다. 아라레가 에너지를 보충하거나 로봇끼리 대결하는 부분은 [철완 아톰]의 영향력을 숨기지 않는다. 소재들은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넘어가는 연령대의 소년들이 좋아할 법한 것들로 가득하다. 로봇, 판타지 동물, 감성 차원의 연애감정, 훔쳐보기식 성적 호기심, 신기한 기계, 무술 격투, 스피드 경주 같은 것들이 뷔페 테이블을 이룬다. 그런데 모든 요소들을 섞어 넣는 솜씨가 워낙 능숙해서, 위화감 없이 그대로 몰입해서 웃으며 즐기기 편하게 되어 있다. 박진감 넘치는 목숨을 건 대결의 와중에서도 지구가 두 쪽으로 쪼개지는 장난스러운 내용이 수시로 교차하는 식이다.

비록 로봇소녀가 주인공이지만, 웃음 뒤에 인조인간의 정체성 혼란과 페이소스를 담는다거나 하는 식은 아니다. 호기심 많고 아무 생각 없이 낙천적이고 괴력을 발휘하며 마을을 종횡무진 매일 뛰어다니는 아라레가 온 마을에 가져다주는 밝은 감성 그 자체가 핵심 기조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사람들 사이의 선한 친분, 특히 가족이라는 단위에 대한 작가 특유의 믿음이 있다. [닥터 슬럼프]는 물론이고 환타지 격투물이었던 차기작 [드래곤볼]에서조차 이어졌던 정서인데, 주인공들은 가족이 있거나 가족을 이루게 되고, 그 가족은 불화다운 불화 없이 지낸다. 박사와 아라레의 유사 부녀 관계는 물론이고, 다른 주요 캐릭터들도 가족 단위로 설정된 경우들이 적지 않다. 마치 놀이터에서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한껏 놀고 다시 가족으로 돌아오는 느낌의 안정성을 지니고 있다. 다이어트를 둘러싼 소소한 소동이든 신이 지구를 멸망시키려고 강림하는 이야기든 폭주하는 법 없이 모든 캐릭터들에게 완만한 따뜻한 결말이 기다린다. 골탕 먹는 사람은 생기지만 결코 악의적이라고 할 정도로까지 괴롭힘의 수준이 올라가지는 않는다(단 한 명의 예외는 계속 센베 박사를 로봇으로 공격하려고 하는 악의 과학자 마시리토인데, 연재 당시 잡지사의 편집자를 모델로 하고 있다).

낙천적 개그도 은근한 박진감도 동시에 갖추었을 뿐 아니라, 만화적 표현법을 활용하는 능력도 대단히 뛰어나다. 우렁찬 인사말이 만화 속에서 글씨로서 대포 같이 발사되는 필살기라든지, 칸과 페이지를 뛰어넘는 장난스러운 연출처럼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캐릭터성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아기자기한 데생, 따로 떠 있지 않고 작품 속 세계로서 확실하게 앉아있는 배경그림, 개그만화임에도 힘과 스피드를 간결하며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는 구도와 효과선 활용 등 만화표현의 기본기에서야말로 천재적 솜씨를 발휘하곤 한다. 각 화의 속 표지에서 간간히 구사하는 캐릭터와 SF메카닉 또는 판타지 동물들을 함께 넣은 일러스트로 선사해주는 시각적 즐거움도 만만치 않다.

이번에 출간된 [닥터슬럼프 완전판]은 연재 당시의 컬러 원고 복원 등 소장가치를 높이는 고급화를 거친 새 판본이다. 원작 기준으로는 80년대 초반, 한국에 소개된 기준으로는 90년대 초반의 순박한 개그 감성이 촌스럽다고 느껴질 이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유머의 힘도 만화로서의 매력도 감소하지 않는 뛰어난 명작을 좋은 판본으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닥터 슬럼프 완전판 1
토리야마 아키라 글 그림/학산문화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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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즉 현 발간호 게재중인 글): 아스테리오스 폴립. 이전에 남겼던 단평의 풀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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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이 만화 90년대가 아니라 80년대 초쯤에 한국에 소개되었다고 봐야할것같은데요. 표절의 형태로요. 81~83년 사이(정확한 연도는 기억 못하고요) 소년잡지 새소년에 ‘공박사와 아차아차’라는 이름으로 표절작이 몇회 연재됐었죠. 그 이후 ‘콩콩동물나라 깜짝이 달짝이’란 이름으로 조금 덜 표절한 작품이 연재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아시는 내용이라면 ㅈㅅ

  2. !@#… corund님/ 당시 소년중앙에 열중하느라 새소년을 별로 안챙겨봤던 것이 이럴때 한스럽군요(…) 제보 감사합니다!

    dcdc님/ 메이드를 노렸으나 실질적 여주인…;;;

  3. 말씀대로 공박사와 아차아차가 1982년경 개재되었구요. 1988년에는 소년중앙에 슈퍼소녀 삐삐라는 표절작이…

  4. 그리고..마사리토 오타 마시리토 (거꾸로 하면 편집자 이름 토리시마..) 나셨네용

  5. !@#… nomodem님/ 좋은 정보 감사! 이런 귀중한 제보들이 모일 때는, 위키라도 하나 만들어놓을까 싶어집니다(만들고 나면 제보가 뚝 떨어지지만요… 핫핫). // 아아 이놈의 살아 숨쉬는 오타란;;; 수정 들어갔습니다.

  6. 글 잘 봤습니다. 제가 처음본 것은 ‘박사님은 IQ 1000’이라는 단행본이었는데 이걸 기억하시는 분도 계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