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에서 탄생하는 광기 – ‘킬링 조크’ [기획회의 285호]

!@#… 그간 밀린 백업 연말 방출;;;

 

우연에서 탄생하는 광기 – [킬링 조크]

김낙호(만화연구가)

광기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뇌과학적 진단을 내리거나 푸코가 그랬듯 광기로 진단되는 것의 사회적 기준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득을 위한 합리적 행동이 아닌 무정부주의적이고 파괴적인 행동 원리를 취하는 것으로 한정지어 생각하자는 것이다. 여러 작품들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파고든 주제지만, 그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 세상의 우연적 비극성을 깨달을 때 그런 식으로 미칠 수 있다는 발상이다. 조율된 필연성에 따라서 세상이 움직이는 만큼 사람들은 그것에 맞추어 성실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담아내는 종교나 여러 시민도덕과 정반대로, 세상에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우연들이 겹치며 엄청난 비극이 닥치곤 한다. 그리고 그런 것을 알기에 스스로 그런 임의적 불행의 전도자가 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들이 있다. 이런 작품은 그 우연성을 최대한 절묘하게 강조할수록,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대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두운 불안을 자극하여 청중을 매료시킨다. 바로 한니발 렉터나 안톤 시궈, 조커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광기의 악역 주인공들의 매력 포인트다.

‘배트맨’은 여러모로 복이 많은 시리즈다. 원래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이미 펄프소설과 라디오드라마로 인기 있던 수사오락물의 틀 위에, 슈퍼맨의 히트로 새로 떠오르던 슈퍼히어로 요소를 가미한 비교적 안이한 작품이었다. 장르적 시작이 그렇다보니 오히려 초능력이 난무하며 지구멸망의 위기가 수시로 오가는 스케일 큰 오락을 제공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슈퍼히어로 독자층을 포섭하기 위해 수사물로서 본격적으로 파고들지도 못하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악당들은 세계정복을 노리는 초월적 능력의 소유자들이라기보다는 인간사회 기준의 범죄자들이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해보고자 배트맨은 20세기 중후반 내내 여러 가지 방향으로 뻗어나갔는데, 만화적 과장과 원색 가득한 활극을 강조한 TV드라마, 조수 로빈은 물론이고 배트걸과 기타 가족적 팀워크로 캐릭터성을 확장하고자 한 만화책 연재, 그래도 인기 있는 캐릭터인 만큼 초능력은 없지만 추리력 때문에 함께 참여한다는 저스티스 리그(한국명 ‘슈퍼특공대’) 등 여러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배트맨 시리즈만의 독특한 어두운 매력을 부여한 것은 배트맨 세계관에서 펼쳐지는 작품, 87년의 [다크나이트 리턴즈]과 88년작 [킬링 조크]다. 전자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과격한 자경단인 느와르 주인공스러운 배트맨의 이미지를 만들었다면, 후자가 이성과 광기, 히어로와 악당의 상호의존 같은 섬뜩한 아이러니의 주제의식들을 만들어냈다. 두 방향성은 헐리웃 영화든 만화 시리즈든 TV애니메이션이든 대부분 작품들의 기본정서가 되었고, 덕분에 배트맨은 수많은 원색 타이즈 영웅담과 구분되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어두운 풍자로서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킬링 조크](앨런무어 글, 브라이언 볼랜드 그림 / 세미콜론)는 배트맨 시리즈의 가장 유명한 악역 캐릭터 조커의 기원을 담아내는 작품이다. 원래 조커는 그저 희화화된 갱단 두목 가운데 하나였으나, 범죄를 저지르며 웃음을 퍼트린다는 모순된 설정에서 오는 섬뜩함, 심각한 범죄를 장난처럼 다룬다는 의외성 때문에 매사에 진지하기 짝이 없는 배트맨과 대비되며 숙적으로서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그 방향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 아예 광기의 화신으로 만들어 세상의 부조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캐릭터로 만들면 어떨까. [킬링 조크]는 배트맨과 고든 경찰국장을 괴롭히는 현재의 조커, 그리고 한 무명 코미디언이 조커가 되는 과거 두 이야기가 교차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과거 이야기는 한 코미디언이 부인과 곧 출산될 아이를 위한 돈 마련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 앞에 순진하게 범죄에 가담하게 되는 작은 사건, 그리고 몇 가지 우연에 의하여 결국 모든 것이 최악의 결과로 치닫고 마는 사연이다. 그리고 현재의 이야기는 조커가 가장 이성적이고 시민적 질서를 믿는 고든을 함정에 빠트려서 임의적 불행에 눈을 뜨는 광기의 나락으로 이끌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그리고 두 이야기 모두에서 사건을 해결하러 뛰어다니지만 결국 자신도 우연의 일부일지 모르는 배트맨이 있다. 조커의 과거 이야기는 진짜인지, 누군가의 왜곡된 기억인지조차 확실하지 않고, 광기도 이성도 참도 거짓도 우연도 필연도 경계가 희미한 결말로 치닫는다.

[킬링조크]는 임의적 불행의 화신이자 전도자인 조커 역시 그런 경험을 통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는 설정을 부여하여, 광기의 탄생과 전염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배트맨 역시 조커라는 동전의 반대면일 수 있다는 설명을 통해서 살짝 어긋나기 시작하기만 해도 큰 파국이 올 수 있다는 불안정한 세상을 제시한다. 작품의 이런 정서는 만화의 연출방식에서도 자연스럽게 구사되어 있는데, 칸 속 유사한 시각요소를 통한 장면 전환이 중요한 순간마다 빛을 발한다. 현재 이야기에서 비 오는 물웅덩이를 클로즈업하다가 그것이 과거의 비슷한 물웅덩이로 전환되는 등의 방식으로 각각의 이야기들은 서로에 대한 평행적 비교 대상이 되어준다. 조커 및 그의 독에 감염된 이들의 병적인 미소, 그리고 배트맨의 어둡고 무표정한 모습의 강렬한 시각적 대비는 후자가 언제 깨질지 모르도록 불안하게 만들어 독자를 빨아들인다. 이를 포함, 50여 페이지 짧은 본편의 정제된 페이지에는 캐릭터의 멋스러운 장면을 위한 연출이 아니라 이야기의 정서 자체를 담아내기 위한 여러 가지 기법들이 가득하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는 조커의 것인가 배트맨의 것인가, 아니면 함께 웃는 것인가. 만화이기에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절묘함이다.

국내 출간본은 영미권에서 몇 년전 제작된 특별판을 기준으로 하며, 원래 50여 페이지짜리 짧은 본작에 설정과 다른 단편 등을 추가한 것이다. 이 판본이 해외에서 출간되었을 때는 처음 나왔던 판본보다 색채가 전반적으로 선명해져서 작품 분위기에 대한 호오가 엇갈린 바 있는데, 책으로서의 만듦새 측면에서는 어쩔 수 없는 품질 향상이기도 하다. 세미콜론 출판사는 [다크나이트 리턴즈], [이어 원], [허쉬]를 포함하여 높은 평가를 받는 배트맨 관련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내고 있는데, 이번 책 또한 그 라인업을 더욱 튼튼하게 완성시켜줄 것으로 보인다.

얄궂게도, 우연의 불행 앞에서 ‘깨달음을 얻은’ 조커는 광기에 빠졌고, 뚜렷한 근거가 없는데도 희망만으로 시민성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은 고든 경찰국장은 제정신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 둘의 모습을 모두 바라보는 배트맨은,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계속한다. 이 세 명 사이 어딘가에, 실제 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재발명이라는 맥락보다, 초현실적인 대형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곤 하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오히려 더 의미있는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배트맨 킬링 조크 BATMAN The Killing Joke : 디럭스 에디션 The Deluxe Edition (양장)
앨런 무어 지음, 박종서 옮김, 브라이언 볼런드 그림/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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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평소보다 백업이 밀렸다. 그 다음 회 : 닥터슬럼프 애장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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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잘 읽고 갑니다. 원작보다 풍부한 해석이네요. 생각만큼 대단한 작품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흠…

  2. !@#… gnosis님/ 분량이 짧으니까 독자들이 여하튼 읽고 각자 판단하기에 무척 편합니다 :-)

  3. !@#… 이수혁님/ 배트맨은 조커와 동질성을 확인하며 미친걸까요? 다시 한번 그렇게 되는 것을 거부했을까요? 아니면 양쪽 다? 그 모호함을 즐기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