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 만담 활극 – 『은혼』[기획회의 060215]

!@#… 개인적으로, 은혼의 한국어판 번역자에게는 대략 200% 보너스를 지급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봉과 의욕부족과 실력부족의 3중고에 시달려서 엉망이 되기 십상인 (일본 주류 장르) 만화번역 관행에서, 참 보기드문 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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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만담 활극 – 『은혼』

김낙호(만화연구가)

일본 주류 장르만화에서 가장 사랑받아온 역사적 소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오다 노부나가로 대표되는, 전국시대의 화끈한 대결과 치밀한 정치적 암투가 있는데, 중국 고전 삼국지에 비견될 정도로 대하 서사를 위한 좋은 소재거리다. 혹은 거대한 힘에 의한 다양한 문명파괴 및 그 이후의 묵시록적 세계관으로 변용되고는 하는 원자폭탄 피폭 역시 원형적인 테마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분명히 수위를 다툰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대형 서사보다는 개별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을 강조함으로써, 작품의 상품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90년대 이래로 완전히 주류가 되어버린 주류 장르만화라면, 약간 다른 방향의 소재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 전후, 개화기 일본이다.

개화기 일본은 여러모로 캐릭터적인 매력이 넘쳐난다. 우선 개화 결정 직전의 경우, 서양이라는 외부세력의 등장으로 인하여 일본이 개화파와 수구파라는 상이한 ‘우국충정’ 들이 충돌하는 시기. 그 속에서 용기 있는 개개인들은 각자 ‘지사’가 되었다. 신센구미 같은 사설 경비대(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정치깡패)가 나름의 우국충정을 이야기하고, 무명 시골 사무라이들이 검 한 자루와 대망을 품고 거리와 전장에서 결투를 벌였다. 즉 역사적으로 이미 증명된 풍운의 시절이기에, 가상 캐릭터들을 새로 발명하거나 역사적 인물을 캐릭터화 시키기 대단히 용이한 셈이다. 개화 직후도 매력적이기는 매한가지다. 역사적 결과 개화는 성공했다. 그 결과 새로운 역사적 시련을 맞이하지 않고 지난 혈투를 하나의 후일담으로서 되돌아보는 ‘지금은 평온하게 사는 왕년의 강자’ 라는 매력적인 캐릭터 부류를 도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배경 역시 일본의 전통적 가치와 서구적 신식 가치가 섞인 혼성적인 모습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 전자의 부류에서 신센구미 같은 소대 단위의 조직적 인간 군상 또는 사카모토 료마 같은 걸출한 풍운아들의 굵고 짧은 인생을 모델로 하는 매력적인 현재진행형 이야기들이 즐비하다면, 후자의 경우는 『바람의 검심』의 90년대 후반 히트에서 볼 수 있듯 ‘과거 사연’이라는 멋을 더할 수 있다.

하지만 『은혼』(소라치 히데아키, 학산문화사. 10권 발매중)이라는 작품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아에 위의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사용한다면 어떨까. 개화직전의 매력적 풍운아들을 전부 캐릭터화 시켜서 들고 와서, 개화기 직후 혼성 세계의 ‘사연 있는’ 마을로 들고 오는 것이다. 물론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의 각색은 필요하다. 하지만 뭐 만화 특유의 표현 자유도를 이럴 때 마음껏 활용해야하지 않겠나. 아니 그렇다면 아예 확 나아가보자. 서방세계가 침범해온 것이 아니라, 아예 외계인들이 들어왔다면 어떨까.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는 대략 삭제하고 신선조가 개화 후 수도의 경찰대가 되어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정도로 막나가는 설정인데 꿀꿀한 대하드라마로 하기는 이미 글렀으니, 화끈한 개그로 노선을 정해보자. 물론 과거의 사연들과 캐릭터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이 부여해주는 사연의 무게가 무게중심으로 충분히 작용해주기 때문에 언제라도 폼을 잡고 싶을 때에는 잡을 수 있다. 이 정도면 거의 이상적인 구도 아닌가. 『은혼』은 바로 이런 발상을 가득 담고 있는 작품이다. 즐겁도록 황당한 배경, 역사적 모델들을 살짝 비틀어 놓은 매력적인 등장인물들, 과거의 사연이 주는 무게와 작가 특유의 강력한 개그센스가 멋진 조화를 이루며 일종의 퓨전 만담 활극을 펼쳐나간다.

사실 앞서 배경과 캐릭터의 매력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이 작품을 단지 특이한 소재로 접근하는 작품 정도가 아니라 최근 장르만화 가운데 손꼽을 만한 매력덩어리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 유머감각이다. 아무리 진지하고 급박한 상황이라도 금방 인물들은 말다툼 모드로 들어가며, 어느 누구 하나도 말재간이 만만한 사람이 없다. 재치 있는 발언이 하나 나오고 나서 황당한 상황 속에서 여운을 느끼도록 하는 방식의 표준적인 상황개그가 아닌, 재치 있고 공격적인 유머성 발언에 대한 마찬가지로 재치 있는 맞받아치기가 꼭 수반되는 엄격한(?) 스탠딩 만담 개그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런 만담적인 요소는 단어 의미를 통한 말장난 역시 훌륭하게 활용한다. 사실 작품의 제목부터가 말장난인데, 주인공 긴토키의 성인 ‘은(銀)’자와 ‘혼(魂)’자를 합친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어 발음으로 읽은 ‘긴타마’는 남자의 고환을 나타내는 속어다. 또한 만담 특유의 뻔뻔함을 위하여 이 작품은 자신의 연재지면인 일본 최대급 주류 만화 잡지인 <소년점프>마저도 한화가 멀다하고 냉장고 밑에 괴어놓는 물건이라든지 불타는 쓰레기에 분리수거할 대상이라든지 하는 등 개그의 도구로 등장한다. 이러한 만담 분위기가 계속 되다가, 과거 사연의 무게를 바탕으로 하는 ‘멋진 대사’가 한번 씩 구사될 때의 느낌 역시 그냥 허구한 날 폼 재는 대사를 남발하는 여타 소년만화들과 임팩트가 다르다 (작품 속 맥락 효과 특유의 매력이 사라질 수 있어서, 사례는 아쉽지만 생략하도록 한다).

언어적 매력에 의존하는 해외 작품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한국어판 『은혼』은 대형 출판사의 일본 수입만화에 흔히 만연해 있는 오역 투성이 저급 번역과 다행히도 궤를 달리한다. 90년대 이후 주류 소년지의 인기작으로서는 거의 이례적으로 보일 정도로 이야기가 늘어지지 않고 확실하게 달려 나가는 빠른 전개와 철저한 에피소드 방식이기에 더욱 대사 하나하나의 힘이 중요한데, 무리하지 않고 일관성있게 잘 소화하는 장점을 지닌다. 게다가 유머의 핵심적인 의도를 살리는 적절한 번역, 말장난의 어감을 번안하여 자연스러운 독서를 가능하게 해주는 성실함은 근래 일본 만화 번역 수준 가운데 최고를 달리고 있다.

물론 각 에피소드의 마무리 임팩트가 아무래도 매끄럽지 못하다거나, 대형 사건 없이 전개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다가올 소재고갈을 돌파할 방법이 아직 보이지 않아 향후 전개가 순탄치 못해 보이는 등 가시적인 단점들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장르 소년만화 가운데 이 정도로 ‘일관적인 막나감’의 유머와, 뜨거운 활극의 매력을 적절히 섞어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활극과 유머의 만남으로 널리 칭송받았던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이 지녔던 장점들의 상당 부분을, 만화에서는 『은혼』이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단, 만담 정신을 가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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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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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thought on “퓨전 만담 활극 – 『은혼』[기획회의 060215]

Comments


  1. [네이버덧글 백업]
    – 달콤쌉쌀 – 은혼.. 4번이나 다시봐도 그게그걸텐데 계속 재미있던 만화 ~ 2006/03/02 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