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묘하게 구식인 것이 매력적.
다시 기회가 주어지면 – 『남기한 엘리트 만들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지나간 과거를 고치고 싶다는 것은 꽤 보편적으로 표현되곤 하는 욕구다. 자신의 현재에 불만족하며, 그 불만족스러운 상태의 원인을 과거 어느 시점에 선택한 무언가로 귀인한다. 그렇기에 만약 그 때 다른 길을 갔다면 더 나은 무언가를 얻었으리라 상상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접근을 하고자 하는 서사문화 작품에서는 그것을 회상과 회한으로 포장하고,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품에서는 시간여행을 보낸다. 시간여행물의 경우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과거로 돌아가서 미래에 대한 결과를 아는 만큼 ‘현명한’ 선택을 해서 결국 미래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것에 성공하는 활극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이 실제 걸어온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해보지만 오히려 더 상황이 꼬여서 계속 더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전자는 확실한 대리만족을 줄 때 그 효과가 뚜렷해지기 때문에 종종 역사적 스케일로 커지는 거침없는 활극으로 흘러가기 십상이며, 후자는 현재 자신의 생활을 후회하지 말자는 작은 교훈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두가지가 완전히 배타적인 것은 아니라서, 80년대 명화 가운데 하나인 ‘백투더퓨쳐’처럼 현재의 소중함을 주축으로 하되 그래도 시간여행 모험의 결과 좀 더 나아진 현재를 그려내는 낙관적인 정서도 있다. 사실 이 정도의 배합이 편안한 대중오락으로서 가장 깔끔한 것이 아닐까 한다.
『남기한 엘리트 만들기』(미티 / 보리별 / 1권 발간중)는 인생리셋 시간여행 코미디물로,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연재중에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다. 2008년의 공무원시험 준비생인 주인공 남기한이 어느날 갑자기 타임슬립이 일어나서 92년 초반 초등학생의 몸으로 돌아간다. 그 결과 어른의 생각을 하는 어린이로서 다시 한 번 그 시절을 살아가게 되는데, 자신의 인생에 당시 닥쳤던 몇몇 분기점들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하고자 한다. 즉 초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를 해서 엘리트로 성장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그 외에는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다 한들, 어린이로서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아버지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집안이 망하는 것도 막을 수 없고, 새로 태어난 동생에게 촌스러운 이름이 붙는 것을 막지도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동네 사람들과 새로운 과거/현재를 만들어가고, 비슷한 시간여행을 한 다른 이들과의 우연한 만남 속에서 과거를 바꾸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운명적 흐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과연 남기한은 괴짜 이웃들과 “초딩” 급우들의 방해 아닌 방해를 뚫고, 스스로를 엘리트로 키워내는 것에 성공할 수 있을까.
주인공 남기한은 그 시절을 다시 살아가면서 세상을 바꾸기보다 자신을 바꾸려고 한다. 진지한 큰일은 무엇 하나도 막을 수 없는 어린이라는 것도 알고, 처음 와서 한 몇 가지 경로 수정으로 이미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런 과거가 그대로 재현되지 않고 다른 분기로 가버렸다는 것을 이미 납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00년대 소위 스펙사회의 벽이 올 것을 알기 때문에 이왕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을 가서 출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그 개인적이고 소소한 목표조차 간단하지 않은 것이, 단지 좀 더 공부 진도를 예습을 한 정도이고 어쩌다가 우연히 어른의 힘이 튀어나올 뿐 별로 뛰어난 천재인 것은 또 아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들과 공부를 겨루는 경연대회에서 이길 수는 있지만, 다른 사고방식으로 도약을 이루는 영재/천재들의 특별 코스에 받아들여질 능력은 없다. 즉 아무리 해도 좀 더 사회적 인식이 더 나은 대학에 진학하는 정도 이상의 무언가를 이룰 희망은 높지 않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조금만 더 열심히 하려고 하면 운명이 크고 작게 방해를 해서 이상한 일에 휘말리기만 한다. 출세욕이기는 하지만 세계정복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펙이라는 신분 사다리에서 몇 단계 더 위에 있고 싶다는 흔하고 소소한 욕망조차 운명과 싸울 기세로 의지를 다잡고 최선을 다해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서 새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결국 처음 사는 생활과 마찬가지로 그저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 이 정도면 현재를 바꾸는 재미와 현재의 소중함을 되짚어보게 만드는 교훈을 동시에 충족하는 만족할만한 배합의 접근방법이다. 그리고 작품 곳곳에 기본적으로 인간됨에 대한 낙천적인 정서가 녹아있기에, 이런 교훈이 훈계라기보다는 그냥 편하게 건네는 성장담으로 읽히도록 만든다.
소재 측면에서,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물에서 종종 매력포인트로 삼는 향수 어린 정서는 이 작품의 경우 한국의 90년대다. 어린이의 세계로 풀어가야 하는 만큼 90년대의 굵직한 정치사회적 사건을 늘어놓는 것은 아니고, 일상적인 대중문화의 모습이 중심이 된다. 서태지가 은둔형 락음악가가 아니라 아이돌그룹 서태지와 아이들로 선풍을 일으키기 직전이고, 피구왕 통키의 히트가 아이들로 하여금 진짜로 목숨을 걸고 불꽃 필살기를 던져대는 프로 피구 리그가 있는지 헷갈리게 만든 그런 시대다. 10년대를 사는 오늘날 90년대를 향수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사실 시기상으로만 보자면 그렇게 특별할 것 없겠지만, 그렇게 다루는 것을 실제로 보면 신기할 정도로 어색함과 친숙함의 감정이 공존한다. 비단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일상적 풍경 자체도, 방과 후 골목길과 운동장에 어울려 노는 문화가 아직 완전히 없어지기 전의 시대이며 동네마다 한 명씩 있다는 동네바보도 지금처럼 꼭꼭 숨겨놓기보다는 골목에서 흔하게 출몰하던 시대다. IMF 구조금융 사태를 겪은 이후 급격하게 한국사회의 일상으로 스며든 만인의 먹고사니즘 무한경쟁의 모습보다는 좀 더 느슨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세상이다. 이런 것을 보면, 좀 더 나이가 든 세대의 여러 성원들이 “그때가 좋았지”를 외치며 확실히 더 생활수준도 낮고 정치적으로도 억압적이었던 어떤 시절들을 그리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결코 동의해줄 수는 없지만).
‘케빈은 12살’ 같은 90년대 외화 시리즈물이나 어린이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에피소드식 연속극 전개방식, 00년대를 수놓은 엽기개그물 코드보다는 좀 더 오래된 약간 엇박자의 상황 유머 연출은 이런 소재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어준다. 다만 그 결과 필연적으로 구식으로 보이는 면이 있어서 90년대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더 젊은 독자층에게까지 널리 어필하기에는 약점으로 작용할 듯하다. 그림체 역시 시각적으로 압도적인 뚜렷한 개성 혹은 장르적 완성도와는 방향성이 달라서, 새 독자를 작품에 처음 입문시키는 것에 진입장벽이 되어주는 면이 있다.
단행본은 최근 (다행히도) 꽤 보편화된 추세 그대로, 웹 연재본을 칸 단위로 페이지에 재편집했다. 그리고 연재 당시 종종 작가가 독자들에게 제보 요청과 재치 있는 질문을 던졌던 점들을 살려서 챕터 사이에 보너스 페이지들을 넣었다. 좀 더 적극적인 기획으로 90년대 향수를 불러일으켜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매력적인 작품의 무난한 첫 출발로 보인다.
남기한 엘리트 만들기 미티 글 그림/보리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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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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