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구원이다 – ‘화자’ [기획회의 319호]

!@#… 책내서평의 논지를 바탕으로, 리뷰용으로 다시 씀.

 

기억이 구원이다 – [화자]

김낙호(만화연구가)

‘전설의 고향’류에서 흔히 다루는 귀신 이야기들은, 표면적으로 보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원한을 갚는 복수를 그려내는 경우가 많다. 이승의 누군가가 그들의 사연을 듣고는 맺힌 한을 풀어주는 식이다. 하지만 한 꺼풀만 더 깊게 들어가면, 원한 갚기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 있다. 바로 그들의 사연이 전설이라는 형태로 계속 전승되는 것이다. 그들의 사연이 해당 지역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계속 인구에 화자되며,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교훈을 주어 의미를 얻는다. 물론 이런 것은 비단 가상의 전설 이야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들의 모티브가 되어주는 실제 세계의 비극적 사건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두고두고 이어지는 기억이야말로 개인 범죄에 의한 상해든, 광주민주항쟁이나 제주4.3사건 같이 국가권력에 의한 체계적 학살이든 잊지 않는 것이 치유를 향한 가장 큰 걸음이다.

[화자](홍작가 / 미들하우스 / 전2권)는 기억해주는 것의 절실함, 그리고 기억을 통한 구원에 대한 성장물 스릴러다. 이야기의 전반부는 성장물에서 흔히 등장하는 “소년, 소녀를 만나다” 구조를 지닌다. 골목길 놀이문화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88년, 동네 친구인 리유와 재윤은 귀신들린 집이라는 소문이 있는 동네 빈집에 호기심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안에서 사춘기 초기 소녀의 모습을 한 ‘화자’와 만난다. 처음에는 귀신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으나, 죽은 아이들이 보인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모습을 그린다며 하루 종일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노는 그녀와 친구가 된다. 같이 보내는 어린 시절의 즐거움, 첫사랑 같은 아련함 속에 소년은 성장하고, 우리들의 성장담이 흔히 그렇듯 언젠가 극적일 것 없는 이별의 순간도 온다. 리유는 재개발이라는 사정으로 이사를 가고, 그 나날들의 기억은 추억이 된다.

그리고 10년 후의 리유가 그 동네로 돌아오면서, 작품은 원래의 성장물 분위기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도 스릴러로 방향을 전환한다. 어느날 재윤에게 받은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는 문자메시지, 그리고 문자를 보낸 직후 교통사고로 인해 사망했다는 소식이 연달아 들려온다. 장례를 위해 돌아온 동네의 그 집에는, 어릴 적 기억에서 전혀 나이가 들지 않은 화자가 여전히 있다. 그리고 동네의 모든 성인 남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어두운 비밀을 발견해나간다. 그리고 리유는 그 비밀을 외면하고 도망칠 것인가, 혹은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둘 다 아닌 정말 어려운 길을 선택할 것인가 기로에 놓인다.

[화자]가 펼쳐지는 동네의 비밀은, 다중의 무감각한 잔인함으로 유지된다. 모두가 공범이기에 그럭저럭 지속될 수 있고, 특정한 사연으로 인하여 그 집에 묶여 있기에 성장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이질적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에 더욱 타자화하고 양심의 가책 없이 유린할 수 있다. 공범이 되어버린 수많은 동네 남자들은 화자를 누군가가 혼자 독점하는 것도 해방시키는 것도 막아내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집착으로 묶여 있되, 공동체 안에서 모두 함께 하고 외부인은 폭력적으로 차단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정작 당사자인 화자는 소외되어 객체화되어 있을 따름이다. 리유 또한 줄거리 속에서 그들과 점차 닮아가는 묘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들 역시 한 때는 똑같이 소년일 때 동경을 품고, 커가면서 집착하고 결국 찌들어가는 경로를 거쳤을 듯하다.

그런데 모두가 공범임을 강요당할 때, 어떻게 균열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저항과 변화의 열쇠는 무엇인가. 단초는 작품 전반을 묶어주는 핵심인 ‘기억’에 있다. 화자가 집에 묶여 있는 이유는 그곳에서 심한 일을 당해 죽은 아이들의 원혼들의 기억을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심한 일을 당하고 그 곳에 머물다가 그들이 그곳에서 겪은 일의 기억을 전달받는다. 세상의 망각에 묻혀, 우리를 기억해달라고 하는 그들의 사연을 화자가 그림으로 대신 기억해준다. 빈 집과 그 주민인 화자는 삶과 죽음의 경계, 멈춰진 시간 속에서 그저 그렇게 존재한다. 그러나 온 동네 사람들에게, 나이를 먹지 않는 화자는 다소 이질적인 상대고 그녀가 그려내는 그림은 그냥 기이한 그림이다. 그 내용을 직면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을 계속 채울 뿐이다.

그런데 리유는 (아마도 죽임을 당한 재윤도) 기억을 선택한다. 현재의 욕망을 넘어 원래 소년이었던 자신이 동경했던 소녀로서 기억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를 조사해가면서, 화자가 끊임없이 기억을 남겨놓고 있는 그림의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알아낸다. 잊지 말아달라는 아이들의 외침은 화자에게, 그리고 결국 리유에게 이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결국 혼자 기억의 역할을 맡고 있기에 시간이 멈춰버린 화자, 기억을 거부하고 현재만을 유지하려는 동네 남자들과 다른 길을 선택한다. 존재를 확인받는 것도, 화해도 속죄도 성장도, 기억을 이어가면서 다시 움직인다.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절실한 한 마디는 너무도 흔하게 세상에서 무시당하곤 하지만, 누군가가 결국 나서서 기억을 하고 그것에 따라서 움직이고자 할 때 비로소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

아련하다가도 서늘한, 그러나 결국 다시 따뜻한 이야기의 굴곡을 표현하는 시각적 연출 솜씨는 탁월하다. 같은 간략한 선과 단순한 명암 및 다소 바랜 느낌의 색상인데도 소년 시절 부분에서는 흐릿한 향수를 표현하다가, 스릴러로 넘어가면서는 긴장감 넘치는 강렬함으로 역할이 바뀐다. 죽은 어린이들의 기억들을 그려내는 화자의 그림은, 그 부분만 전담한 노을구름 작가의 순박함과 귀기가 공존하는 화풍으로 효과적인 이질감을 마음껏 드러낸다. 일상적 사람들의 순간 돌변하는 눈빛과 폭력상황 묘사 역시 스타일리쉬한 쾌감보다는 집단적 광기를 자연스럽게 묘사해낸다.

특정한 실제 사건을 극적으로 재구성한 유사 르포 작품과는 거리가 멀지만, [화자]의 기반에 있는 여러 억울한 사연들은 결코 낯설지 않다. 시간이 멈춘 빈 집과 귀신을 보는 성장하지 않는 소녀가 없을 뿐, 약자에 대한 일상화된 집단적 탄압, 어처구니 없는 억울한 떼죽음에 대한 빠른 망각, 공범의식에 균열을 내기보다는 피하거나 동조하는 것이 훨씬 덜 어려운 분위기 같은 것은 지극히 친숙하다. 그런 무거운 사회파 소재를 다루면서도 성장물로서의 아련함 역시 함께 유지하기에,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분노나 냉소가 아니라 희망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기억을 이어가고 퍼트리는 식으로 받아들여서 시간이 다시 움직이게 될 때, 삶에는 더 성숙한 인연들과 내일의 크고 작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화자 – 상
홍작가 글.그림/미들하우스
화자 – 하
홍작가 글.그림/미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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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먼지 없는 방’, ‘사람냄새’. 이 두 권은 함께 다룰 때 더욱 강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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